1975년 4월, 나의 봄
상태바
1975년 4월, 나의 봄
  • 송필경
  • 승인 2023.04.26 16: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논설·시론] 송필경 논설위원

사람에 따라, 어항 속 물고기처럼 자신의 어항이 세계의 전부라고 느끼리라. 이념이 빙하기에 갇혀 있을 때는 얼어붙은 자유를 당연하게 받아들였으리라. 암흑기를 지나 빛을 봤을 때 암흑기의 정신이 광기와 야만이었다는 걸 깨달으리라.

자연의 봄은 해마다 갖은 꽃들이 활짝 피어 화사하고 찬란하지만 역사의 봄은 차라리 허망하고 처절했던 때가 많았다. 인생의 한 시기에 누구를 또는 어떤 사건을 만난 인연이나 악연을, 시간이 지난 뒤 돌이켜 보면 그 이후 삶에 드라마처럼 큰 전환점의 계기였던 경우가 있다.

1975년 그 해 봄이 그랬다. 당시 나는 마음이 들뜬 대학교 신입생으로 내 세계는 단지 어항이었다. 4월 9일, 조작한 간첩사건에 엮인 이른바 ‘인혁당’ 인사 8명이 대법원 확정 판결 18시간 만에 교수형을 당했다.

박정희의 이 만행은 국제적으로 ‘사법살인’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국제법학자협회는 ‘사법 역사상 암흑의 날(Dark day for the history of jurisdictions)’이라고 규정했다. 1995년 판사들은 한 설문조사에서 인혁당 사건을 ‘우리나라 사법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으로 꼽았다.

사형당한 인혁당 사건 한 관련자는 끔찍한 고문으로 터진 창자를 움켜지고 재판을 받았다고 한다. 박정희는 정권 내내 반대자들에게 신체적인 폭력을 가해 개인의 정신을 파괴하고 나아가 가족들에게까지 빨갱이란 덫을 씌웠다. 박정희가 저지른 정권 폭력의 상징이 바로 그 인혁당 사건이었다.

4월 말이 다가오자 신문들이 어수선했다. ‘월남 패망’이라는 뉴스가 각 신문 1면을 가득 매웠다. 북베트남(월맹)은 자기보다 천 수백 배의 힘을 가진 미국을 상대로 최종 승리를 눈앞에 두었고 남베트남(월남)의 부패한 권력자는 금을 가득 실은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도망갔다.

4월 30일 북베트남이 서구 제국주의를 상대로 길고 긴 민족해방투쟁의 대단원을 승리로 장식하자, 남베트남에 동병상련의 동지애를 느끼던 박정희는 정신적으로 실성할 지경에 이르렀다.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더욱 포악하게 강화했는데 이는 파멸의 무덤으로 스스로 발걸음을 옮긴 것이었다.

어항에 있던 나는 당시 바깥세상이 자유가 얼어붙은 역사의 암흑기인 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눈 감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분을 만나기도 했다. 연세대학교 신입생의 교양필수 과목이었던 기독교 개론은 점심시간 직후인 5교시였다. 목사인 교수님은 나이 지긋하고 인자한 분이셨다. 학생 출석에 개의치 않고 나지막한 소리로 강의를 했다.

점심을 먹은 뒤의 춘곤증에 자장가처럼 들리는 조용한 교수님의 강의 목소리를 마지못해 듣는 과목, 낮잠 자기 딱이었다. 아예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잤다.

4월 하순 어느 날 갑자기 분필을 칠판에 ‘쾅’하고 두드리는 큰 소리가 울려 잠에서 후다닥 깼다. 눈을 비비고 칠판을 보니 ‘희망’이란 큰 두 글자가 칠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교수님은 목청을 한껏 높였다. “우리는 ‘희망’이 있기에 투쟁을 합니다.” 전혀 교수님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차분하게 말씀을 이어갔다.

“얼마 전 몰트만 교수가 우리 학교에 왔어요. 제가 조교들을 시켜서 강의 안내문을 학교 게시판 곳곳에 붙이라 했어요. 그런데 2시간이 안 돼 형사들이 찾아와 게시물을 다 떼어내라고 합디다.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나는 희망이 있기에 투쟁합니다.”

이런 요지로 몇 말씀을 하고 강의를 마쳤다. 교수님의 마지막 수업이었고 교수님을 학교에서 다시 볼 수 없었다.

월남 패망은 곧 북베트남의 민족해방통일이었다. 이에 극도로 불안했던 박정희는 다음 달인 5월 13일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 우리나라의 헌정 역사 상 가장 가혹하고 악랄한 법이었다. 베트남의 민족해방통일이 한국 민주주의에 가혹한 시련을 안겨준 셈이다.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자마자 학생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박정희는 휴교령을 내렸다. 대학에 갓 입학한 철없던 때라 휴교령을 얼씨구 반기며 대구 집에 내려가 미팅을 즐기며 맛들인 술로 흥청망청, 세상을 만끽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 ‘희망이 있기에 투쟁을 할 것’이라던 노교수의 말씀이 진한 여운으로 남아 있었다.

(사진제공= 송필경)
(사진제공= 송필경)

술통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예과 2학년 때 낙제를 했다. 그 사실을 숨기고 대구 집에 내려가지 않고 서울에서 하숙을 계속하면서 아버지께 생활비를 받았다. 부끄러워 친구도 만나지 않고 술을 끊고 하숙방에 틀어박혀 주구장창 고전이라는 책 이것저것을 읽었다.

본과에 올라간 뒤 학생운동으로 제적당했다가 복학한 한 선배를 만나고 어느덧 이른바 ‘의식’의 소중함을 깨달으면서 이른바 ‘의식화’ 책을 읽었다. 이영희 교수가 베트남전쟁의 진실을 다룬 『전환시대의 논리』는 우리 세대 젊은이들의 의식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루게 했다.

『나는 고발한다』라는 책은 20세기 초 프랑스를 뒤흔든 드레퓌스 사건을 파헤친 에밀 졸라의 진실을 향한 행진을 담았다. 에밀 졸라를 통해 지식인과 지성인을 어렴풋이 구분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내 의식은 어항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책을 읽는 가운데 당시 유행하던 해방신학에 관한 책을 우연히 접하면서 『희망의 신학』이라는 것을 보았다. ‘희망’… 나에게는 가슴에 진한 여운을 남긴 글귀였다.

『희망의 신학』이란 책을 펴낸이는 독일의 세계적 신학자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이었다. 노교수께 얼핏 들은, 교수님이 초청했던 그 분이었다. 관심이 생겨서 더 들어가 보니 몰트만의 정신적 스승은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였다.

본회퍼를 찾아보았다. 놀라웠다. 본회퍼는 21세에 신학 박사학위를 받은 ‘천재적 신학 청년’이었다. 박사 논문은 ‘신학적 기적’이란 평가를 받았다.

본회퍼는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더 한 뒤 베를린대학에서 교목을 하며 강의를 했다. 히틀러의 파시즘이 막 기승을 부릴 때였다. 나치 치하의 독일 목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교회가 아니라 히틀러의 말을 듣고 그 앞잡이 교회를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히틀러는 겉으로는 ‘기독교는 독일의 민족성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종교다. 나는 교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겠다’라고 하면서 기만적인 꼼수를 썼다.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히틀러의 독일은 교회를 부른다. 교회는 이 부름에 응해야 한다’는 깃발 아래 결집했다.

독재 시대 청와대에 들어가 ‘조찬기도회’를 연 우리 목사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본회퍼는 위선에 둘러싸인 시대의 추악한 참모습을 보았다. 신학자인 동시에 올곧은 지성인이었으니 당연히 반나치운동에 뛰어 들었다.

본회퍼는 나치에게 요주의 인물로 찍혔다. 나치의 공포정치가 절정이던 1939년 6월 미국 신학교의 초청으로 안전한 미국에 갔다. 하지만 본회퍼는 ‘자신이 미국에 온 것은 결국 실수였다’고 깨닫고나서 고통받는 독일 민중들을 생각하며 채 한 달도 안 된 7월에 귀국했다. 편히 갈 수 있는 길을 일부러 회피했던 것이다.

아, 이 대목에서 받은 내 젊은 날의 충격이 얼마나 컸던가? 이때의 그 충격이 나를 지금의 이만큼이라도 이끈 힘이 아니었을까?

본회퍼는 나치의 엄중한 감시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의 암살모의에 가담했다가 1943년 4월 체포됐다. 그리고 나치가 패망하기 며칠 전인 1945년 4월 9일 사형을 당했다.

본회퍼의 단두대 처형을 지켜본 피셔 훌슈츠룽 박사는 "본회퍼가 죄수복을 벗기 전에 열정적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단두대에 오르는 모습은 매우 대담했고 침착해 보였다"고 당시를 회고하며 "내 50평생에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본회퍼 같은 사람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평화를 위해 저항한 신학자 본 회퍼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각종 신학의 흐름에 출발점이 되는 통찰력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사상 못지 않게 위대했던 그의 ‘행동’은 많은 지성인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본회퍼의 영향을 받은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해방신학’, 우리나라에서는 서남동과 안병무의 ‘민중신학’을 낳았다.

나른한 봄날 오후 ‘희망이 있기에 투쟁을 할 것’이라는 사자후를 통해 조는 나를 깨운 교수님은 바로 본회퍼의 정신적 계승자인 서남동 교수였다. 서남동 교수는 1960년대 본회퍼의 세속화 신학을 비롯한 현대신학의 조류를 국내로 들여오는데 온 힘을 다햇다.

서남동 교수는 1970년대에 들어서 국내 신학자들과 함께 발표한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을 계기로 활발하게 사회참여운동을 했다. ‘해방·희망·민중’ 같은 저항적 이념을 박정희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지성인은 독재자에게 손에 가시가 되는 게 역사적 당위가 아닌가? 서남동 교수는 우리에게 마지막 강의를 한 뒤 곧바로 해직을 당했다. 1976년 함석헌·문익환 선생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에 서명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됐다. 서남동 교수의 고난은 전두환 시대까지 이어졌고 1984년 운명을 하셨다.

서남동 교수를 만나지 못했다면 무종교인인 나는 결코 본회퍼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내 가슴을 뜨겁게 달군 아래 본회퍼의 말은 신학자로서 히틀러를 처단하려는 그의 단호한 의지를 표현한 명언이다.

“만약 미치광이가 차를 몰고 인도로 돌입하려 한다면… 목사인 나는 단지 그 미치광이에게 치어죽을 사람들을 위해 장례준비를 하고 기도해야 하는가? 아니면 차에 올라 그 미치광이에게서 핸들을 뺏어야만 하는가?”

국가의 권력과 신앙인의 양심이 충돌했을 때 과감히 목숨을 걸고 돌파한 자유투사의 의지를 이 짧은 말에 절절이 담았다. 암울한 유신과 전두환 시절에 내 용기를 북돋워주는 빛과 소금같은 구실을 했다.

서남동 교수와는 채 2달도 안 된 짧은 인연이었지만 양심(또는 진실한 신앙)의 빛이 태양보다 더 찬란하다는 걸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1978년은 유신의 막바지였다. 본과에 올라오니 양심(의식)적인 동료 선후배들이 있었다. 문학반이라는 위장 의식화 서클에서 그들을 만났다.

어항 속 세계만 알던 나에게 문학반, 즉 이념동아리는 아주 낯설었지만 선배들과 동료, 후배들이 아주 인간적인 매력이 있는 이들이었다. 이 매력 때문에 나는 어항 속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이념의 세계에 점점 빠져들었다.

인혁당 같은 사건이 박정희 치하에서 무수히 많았다는 사실, 베트남은 미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민족통일을 이루었다는 사실, 쿠바의 사회주의혁명은 위대한 무상의료를 이루었다는 사실들을 치과대학 문학반에서 배웠다.

1975년 봄부터 유신의 종말이었던 1979년 가을까지, 그때 많은 사건들과 사람, 그리고 책을 만났기 때문에 오늘날 내가 역사의 진보에 희망을 지닐 수 있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그 만남들은 내 운명이었을까?

1980년 광주의 5.18은 내가 겪은 가장 끔찍하고 허망한 봄이었다. 허망하기에 진실이 아름답다는 것은 결코 역설적이지 않다. 그 허망을 뚫은 광주시민들의 ‘숭고한 저항정신’은 그 어떤 지옥이라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란 진실을 깨달았다.

1999년 한겨레신문의 베트남 통신원 구수정은 베트남에서 저지른 한국 군인들의 민간인 학살사건을 소상하게 밝혔다.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는 바로 사죄를 위한 진료단을 꾸렸다. 

나는 2001년부터 베트남진료단의 일원으로 베트남 땅을 밟은 뒤 20여 년 동안 총 26차례 베트남을 방문하면서 베트남 역사와 통일과정에 관심을 기울였다. 2018년 나는 대학시절 문학반에서 배운 ‘쿠바의 무상교육·무상의료’ 과정을 맛보기 위해 쿠바를 방문했다.

나는 지금 대구 출생 전태일의 정신을 잇는 ‘전태일의 친구들’ 이사장을 맡고 있다. 앞으로 ‘베트남민족통일정신’과 ‘쿠바의 사회주의혁명정신’, 그리고 ‘전태일의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랑의 정신’을 더욱 깊이 성찰하고 싶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