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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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기현
  • 승인 2007.03.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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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기 베트남 진료단 후기]-③

 

전쟁박물관에서....

구수정.
그녀는 우리에게 말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부도덕한 전쟁이었다고.

또 그녀는 우리에게 말했다.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분명한 사실이며, 그것은 한국에서도 베트남에서도 가장 아픈 기억중 하나가 될 거라고.
그리고 그녀는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이 세상 모든 전쟁이 가져다 주는,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모습을.

그런 그녀가 지금 앞에 앉아있다.

<광주 망월동 묘역의 한 무덤 앞에 낯선 외국인이 서있다. 그의 손에는 국화 다섯 송이가 들려있다. 무덤앞에 그 꽃을 살포시 내려놓는다. 그리고 절을 세 번 한다. 일어나서 그는 조용히 흐느낀다. 이름없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무덤을 지나며 울음은 깊어졌다. 사라져간 친구들을 회상하는 것일까?
다섯 송이 국화가 놓인 묘비에 새겨진 이름은 김남주, 흐느끼는 조그만 체구의 남자는 베트남에서 온반레이다.>(2003. 10. 한겨레21에서)

▲ 전쟁박물관에서 베트남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는 진료단 일행.
베트남 해방후 1980년대 초반 김남주의 옥중 시가 베트남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왔고, 그를 생각하며 호치민을 떠올렸다는 그. 그래서 첫 방한에 가장 가고 싶어했던 곳이 그가 잠들어 있는 그곳이었다는 그. 그리하여 그를 초청해준 한국 친구들에게 조심스레 망월동에 가자고 말했다던 그.

그가 지금 앞에 앉아있다.
그와 그녀가 나란히 앉아있다.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당찬 모습으로...

베트남 오기 전 역시 수없이 들었던 이름이다. 당연히 모두들 반가워한다. 다행히 그의 첫인상은 내가 상상했던 대로였다. 본전(?)은 한 셈이다. 인심좋은 동네 아저씨, 이 이상 좋은 표현은 없을 듯 하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맑고 날카롭다. 사람의 표정(인상)은 포장할 수 있어도 눈빛만큼은 그리할 수 없다는 말, 그래서 어떤 사람의 진심을 알고 싶다면 눈빛을 보라고 했다.

그런데 그 눈빛을 응시하면 자신의 본심이 들킬 것 같아, 고게 참 어려운 것 같다. 난 들키지 않게 그를 응시했다.

맑고 날카로운 눈빛과 인심 좋은 동네아저씨의 인상을 한 사람. 내가 본 그의 모습이다.

그와의 대화가 시작됐다. 통역으로 전달되는 그의 말이 참 안타깝다. 말과 말 사이에, 그리고 말하는 중간의 침묵에도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을 터인데, 그걸 읽어내지 못한다. 아쉬울 따름이다. 그래도 통역에 대한 절대적 믿음감으로...귀를 기울인다.

그의 대답은 명쾌하다.
수많은 여인을 울렸다며 얼버무린 사연, 그 한가지만 빼놓곤....
그리고 재치가 있으며, 은유가 있다. 달변가는 아닌 듯 싶었지만, 재미없는 사람은 절대 아닌 것 같다.
우리의 많은 질문들을 그는 그렇게 넘어가고 있었다.

그를 만나기 전, 그가 김남주 시인의 무덤을 찾았던 걸 알았더라면, 분명히 질문을 했을텐데, 좀 아쉽다. 언제가 꼭, 기회가 있을 것이다.

사실 2시간정도의 짧은 대화(통역을 동반한)로 그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그를 통해 베트남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보려는 나의 시도도 결국은 불발로 끝났다. 그러나 박물관에서 울적했던 나의 기분이 한결 나아진 것 같았다. 그런 점에서 그는 기분 좋은 사람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에게 참 고마운 것 같다.

▲ 전쟁박물관 견학 후 진료단 단체사진
평균주의자(?).

자신은 아직도 사회주의자며, 자신의 조국은 이전의 획일적인 사회주의가 아닌, 좀 더 인간적인 사회주의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그런 자신을 굳이 분류하자면 평균주의자 정도 될 것이라고.... 그녀가 해석한 말이었다.

이상한 말 같기도 하고, 좋은 말 같기도 하고, 아리송하다.
어쨌든 의미는 이해했으므로, 평균주의자가 되고자 하는 그의 바램이 꼭 이루지길 바란다.

반레!
다음엔 그에게서 지난 시절 전장에서 싸웠던 이야기가 아닌, 지금의 베트남을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다. 미래의 베트남을 그려 볼 수 있는 이야기와 함께....
진정 그렇게 되길 희망해 본다.

김남주는 구수정이 되고, 반레가 되어 낯선 이국, 베트남에서 나와 우연히 마주쳤다. 18년전 광주의 구석진 식당에서 처럼.

이렇게 호치민시에서의 길고도 짧은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김기현(건치 광주전남지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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