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속마을 센터의 치과진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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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속마을 센터의 치과진료실
  • 이동호
  • 승인 2007.07.25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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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친구들 이야기 (2)

 

이미 20년이 지난 옛날 이야기 하나.

매주 일요일마다 문을 열었던 성문 밖 교회의 치과진료소에서 본과 4년의 많은 날들을 보냈었다. 당시 우리는 서울과 인근지역에서 몇 개의 주말진료소를 이미 졸업한 불순한 선배들과 운영하고 있었다.

그 당시 <영등포산선>으로 알려진 그 교회는 순진한 공단근로자들을 의식화시켜 노동조합을 만들고 노사분쟁을 일으키는 아주 불순한 단체로 종종 TV방송을 타고는 했다.

성남과 시흥의 치과진료소는 도시빈민지역이었다. 우리는 성남과 시흥지역의 도시빈민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공부했었다.

지금의 성남은 분당까지 포함한 대도시로 발전했지만 최초의 성남은 서울의 청계천변 판자촌 주민들의 집단 이주촌이었다.

3공화국 정부에 의해 ‘대규모 위성도시건설’로 선전되었지만, 도시기반시설은 물론 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은 허허벌판에 그들은 던져졌다. 집도, 도로도, 상하수도도, 학교도 없었다.

산을 깎고 말뚝 박아 바둑판 모양 그어 만든 황무지 20평씩이 유상으로 불하되었다. 1969년부터 70년까지 약 1년 동안에만 무려 2만세대가 옮겨졌다.

사람들은 우선 천막이라도 짓고 살아남아야 했지만 박정희 정권는 구호 밀가루조차 제대로 내려주지 않아 수백 명의 사람들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나갔다.

서울에 지게품이라도 팔려고 해도 1시간 반이 걸리는 서울까지 가는 버스비 35원이 없어서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불순분자들의 난동으로 보도된 1971년의 소위 <광주대단지사건>은 국가와 사회에 외면당한 도시빈민들의 최후의 생존의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프놈펜의 센속마을, 언동마을은 약 40년 전의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국가의 발전을 위해 그들은 눈앞에서 깨끗이 ‘치워져야 할’ 존재들이었다.

지금은 철거되었지만 박정희가 세운 청계천의 고가도로는 70년대 고도성장의 상징으로 어릴 적 초등학교 사회교과서의 단골사진이었다. 하지만 그 청계고가도로 아래에 수 만 명의 피눈물이 묻혀 있었다는 것을 그 땐 미처 알지 못했다.

40년의 시간과 공간을 이동하여 나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 캄보디아, 그 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생활을 이어가는 철거 빈민촌에 서 있다.

그리고 20년 전의 그 주말진료실보다 더 못한 시설과 장비로 정말 보잘 것 없는 치과진료실을 차려놓고 이들의 엉망진창인 치아들을 보살피겠다고 하고 있다.

오래 걸리는 치료들은 아예 엄두도 못내고 주로 발치나 간단히 때울 수 있는 치료들만 해준다. 정작 아파서 고통스러워 하는 곳을 치료해주지 못하는 것이 미안할 따름이다.

진료를 마치고 동네를 나서며 나는 센속마을의 미래를 상상한다. 20년의 세월이 흐르면 이 곳도 살만한 동네가 될까?

고급 아파트 단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벽돌에다 나무지붕을 올린 빗물이라도 제대로 막아내는 그런 집들이 들어설까?

문득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2층 다세대 슬라브집들이 다닥다닥 빼곡이 붙어있던 성남의 옛날 동네풍경을 떠올린다.

참, 시흥의 달동네 꼭대기의 작은 교회는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동호(건치 부경지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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