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역사를 찾다] 가양동 공암과 허가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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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역사를 찾다] 가양동 공암과 허가바위
  • 임종철
  • 승인 2007.10.22 12: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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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과 그림으로 남은 한강의 한 모퉁이
 
▲ 현재 구암공원 안에 있는 공암

 

 고려 공민왕때 이조년(李兆年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라는 시조로도 알려져 있다)이 형과 함께 길을 가다 금덩이 둘을 주워 하나씩 나눠 가졌는데 배를 타고 나루를 건너면서 아우가 그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

▲ 정선의 그림 소요정에 
        보이는 공암

버렸다. 왜 그랬냐고 하자 형이 가진 금덩이가 자꾸 커보이자 이를 화의 근원이라 여겨 그런 것이다. 이에 형도 그 말을 듣고 금덩이를 던져버렸다. 그래서 이름붙여진 투금탄(投金灘)이 지금의 강서구 가양동 구암공원 있는 근처의 공암나루터라고 한다. 하지만 혹시나 하고 땅을 보고 걸어도 금덩어리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다.

 


 양천현감을 지낸 겸재 정선의 그림에서도 보이듯이 세 개의 바위로 이뤄진 공암은 원래 한강 물 속에 있었고 양천허씨의 유래지라는 허가바위의 석굴 앞까지 강물이 드나들어 그 옆에 나루터가 있었다 한다. 80년대 올림픽대로가 한강과 공암 사이에 놓이고 나서도 도로 한편으로 호수같이 분리된 강물 위에 떠있는 공암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이곳이 아파트단지가 되면서 공암 주위를 연못으로 남겨놓고 구암(로마자 표기로 GUAM이다!)공원을 만들었다. 아파트 숲속 작은 연못에 갇힌 세 개의 바위산을 보면 참 기발한 보존방법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분수는 좀 심한 것도 같다. 글쎄, 전설처럼 경기도 광주에서 떠내려온게 맞다면 이 바위산은 고향으로 보내주길 바라진 않을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공암옆 탑산 허가바위는 양천허씨의 발원지고 허준이 나고 죽은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래서 탑산(31.5m) 옆에 허준박물관이 들어섰고 그 옆에는 한의사회관도 자리잡았다. 겸재 정선의 그림에 있는 석탑은 일제강점기 옮겨졌다고 하는데 현재는 행방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형제가 금덩이를 던진 강물 양편으로는 자유로와 올림픽대로가 뻗어 먹고살기 위해 한푼이라도 더 찾아서 내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후손들의 바쁜 행렬이 끊임없이 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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