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읽기] 고슴도치의 우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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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고슴도치의 우아함
  • 장현주 편집위원
  • 승인 2007.12.14 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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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계급 - 정신적 귀족, 고슴도치들

자본가들과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대립의 세월이 길어지면 그것도 일종의 상투성을 띄게 되는가 보다.

이 책 [고슴도치의 우아함 - 뮈리엘 바르베리, 아르테 출판사]은 그 상투성에 비명을 지르는 새로운 계급의 존재주장이다. 이 새로운 계급은 그들이 소유한 자본의 크기나 그들이 팔 수 있는 노동력의 크기로 규정되지 않는다.

이 계급의 교환가치는 그들이 읽거나 듣거나 본, 책이나 음악이나 영화, 그림으로 규정된다. 더 정확하게는 그들이 감동하는 문화들, 그 문화들을 통해 드러나는 그들의 취향, 혹은 감성으로 규정된다.

특히 그 문화들이란 오늘날 날로 희소해져만 가는 인문학적 지성을 토양으로 하고 있기에 필연적으로 귀족성을 띈다. 희소할 뿐만 아니라 다른 계급의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문화를 소유하는 데는 엄청난 돈이 들지만 그걸 향유하는데는 도서관 출입증이나 미술관 관람료, 큰 지출이라고 해야 mp3 정도의 장비가 필요할 뿐이어서 이 계급의 경제적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그들은 서로를 고슴도치라 부르고 스스로를 우아하다고 믿는다.

이 계급의 욕망은 세계를 바꾸는데 있지 않고 세계로부터 숨는 것이다. 그들의 밑바닥에 흐르는 정서는 어쨌거나 이 삶은 부조리하다는 것. 어떤 경로로 흘러가듯 결국은 하나. 인간은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프랑스 소설에는 3명의 주요한 고슴도치가 등장한다. 그 밖에 고슴도치가 호의를 느끼는 몇명의 주변 인물들, 그리고 그들에게는 다만 희미한 그림자일 뿐인 호화빌라의 거주자들(거주자들은 보수적인 자본가이거나 속물적인 사회명사, 집권사회당의 장관 등이다.)이 있다.
 
고슴도치1. 르네 미셸

54세의 미망인. 27년째 빌라의 수위로 근무 중. 못 생겼고 등은 휘었으며 뚱뚱하다. 애완동물은 고양이. 취미는 철학서적과 러시아문학 읽기. 네덜란드 정물화에 열광하며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좋아한다. 무뚝뚝하고 무식하며 무신경한 3무의 전형적인 수위처럼 보이는게 평생의 희망. 혹시라도 자신의 유식함이 탄로날까봐 때로 걱정한다. 특기는 눈빛의 광채를 지우고 흐릿하게 눈 뜨는것. 투명인간 되기.
 
고슴도치2. 팔로마 조스

12살의 천재소녀. 빌라 5층의 장관집 둘째 딸래미. 아침마다 커피를 마시며 각종의 신문을 읽는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쌓아올리는 아버지와 10년째 정신분석을 받거나 정신분석을 하느라 열심인 속물적인 엄마, 스스로를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멍청한 언니를 증오한다. 조만간 집에 불을내고 자살할 계획. 자살전 2권의 저작을 집필중이다. 1권- 깊은 사색, 2권-세상의 움직임. 고슴도치답게 누군가 자신의 천재성을 알아볼까봐 평범한(?) 영재처럼 보이려고 애쓴다.
 
고슴도치3. 카쿠로 오주

빌라4층에 이사한 부유한 일본인. 오즈 야스지로의 먼 친척. 종족을 알아보는 예민한 후각으로 빌라의 수위가 사실은 수위처럼 보이는 고슴도치라는 것과 팔로마 역시 어린애처럼 보이는 고슴도치라는 걸 알아차린다. 고슴도치1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취향을 지녔다. 그녀의 천재적인 수위연기를 포기시킬 정도로 그는 다정하고 관대하다. 그로 인하여 드디어 빌라의 고슴도치들이 소통하기 시작한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20년이 넘도록 거주자들이 바뀐적이 없는 호화빌라 4층의 요리비평가가 세상을 뜬다. 부유한 일본인이 4층에 새로 입주한다. 일본인으로 인해 수위와 천재소녀가 우정을 쌓게 된다. 심연처럼 거대한 계급의 차이를 넘어 일본인과 수위의 로맨스가 드디어 시작된다. 천재소녀는 방화및 자살 계획을 수정할까 생각한다.
 
그런데 소설이 끝나가는 그 마지막 순간에, 소설가는 아마도 그 자신의 분신이기도 할 고슴도치들의 바닥정서를 드러낸다. 수위 르네가 다가올 로맨스의 전조를 느끼며 잠을 설친 다음날 아침, 소설가는 그녀를 지나가는 세탁트럭에 치여 죽게한다. 삶의 부조리. 그녀는 슬로모션으로 죽는다. 아무런 아쉬움도 회한도 없이. 과연 평생을 준비해온 조용한 죽음이다.
 
일본인과 천재소녀는 쓰라린 슬픔을 느낀다. 천재소녀는 알게된다. 그녀가 느끼는 쓰라림은 그녀가 수위아줌마와 나누었던 짧았던 공감, 그토록 짧았던 행복의 대가임을. 아니 거꾸로다. 아름다움이 아름다운 이유, 행복이 행복인 이유는 언제나 종국의 결말인 죽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임을. 그래서 천재소녀는 죽지않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인생에 숨어있는 아름다움의 순간들을 찾아나서기로.
 
죽음이 기다리고 있기에 더 빛나는 젊음, 시들기 때문에 아름다운 장미. 꽤나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난 이 소설을 통해서 비로소 이해했다. 아름다움의 본질이 바로 그 無常性 속에 있다는 것을. 아니 아름다운것들이 죽지 않는다면, 변하지 않는다면 美라는 것이 무엇인지 우린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美라는 것은 변화하는 사물의 어떤 한 순간, 한 빛나는 순간에 대한 시간적 정의이기 때문이다. 그때문일 것이다. 고슴도치1이 네덜란드의 정물화에 열광하고 고슴도치2가 베르메르를 사랑하는 이유. 고슴도치3이 자기집 현관에 그 정물화를 걸어놓은 이유는. 그 [순간]을 포착하고 싶은 것이다. 변해가고 죽어갈 운명을 피해가는 것처럼 보이는 박제된 정물들에 대한 사랑은.
 
그리고 고슴도치들이 유독 그 취향에 의해서 발견된다는 사실 역시, 그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예민한 감각, 바꾸어 말하면 죽음의 필연성에 대한 그들의 예민한 감각을 말해준다.

그들을 다른 계급과 구분짓는 것은 사실 문화적 동질성이 아니라 바로 이 감각이다. 이런 감각은 인간조건의 근본적인 한계에 대한 이해를 포함하고 있기에 위험하다. 그들은 대체로 냉소적이다. 현재의 자기자신이 아닌 다른 누구도 결코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눈에 띄고 싶어하지 않는다. 연대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반면, 소통불가능성, 필연적인 소멸에 대한 예리한 인식만큼이나 다른이들과 소통하고 싶어하는 갈망을 가지고 있다. 아니 갈망을 가지고 있다기 보다 그걸 느낄때 보통 이상으로 감동한다. 전혀 기대하지 않은 선물을 받았을때처럼.

천재소녀는 과연 어떤 어른으로 성장하게 될까...

그들이 발견한 無常의 아름다움에 공감한다. 하지만 난 약간 촌스러워서 사실 아름다움보다는 그 스러짐에 더 가슴이 아프다.  다른 종족에 대한 고슴도치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에 속 시원하다가도 속 불편해진다.

그들의 낯가림이 때로는 너무 편협해 보이고 그 까다로움은 때로 피곤하다. 그래 니들 참 잘났다 잘났어 하고 토라지고 싶다. 아마 내가 제대로된 자본가도 제대로된 사회주의자도 아니면서 고슴도치들 같은 정신적인 귀족도 못되는 함량미달의 어정쩡한 속물이어서일 것이다. 

삼각지 교차로 한가운데서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 행인같은 기분이랄까? 

우연인지 몰라도 유독 내가 읽은 프랑스 문학들은  삶의 부조리함을 대놓고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겁이 없다. 그런 허무바이러스를 퍼뜨리는게 그토록 당당하다. 물론 이 소설은 약간의 희망적인 전망을 내놓고 끝나긴 하지만 모두 그런건 아니다. 철학이 대입시험과목인 나라라서 그럴까. 아니면 너무 노회한 제국이라서? 

대선이 얼마 안남았는데 사상 유래없는 저조한 투표율이 예상된다고 한다.  사실 삼각지의 어정쩡한 행인인 나도 이번 선거에 벌써 맥이 풀릴대로 풀렸다. 이건 우리나라도 프랑스처럼 고슴도치의 목소리가 당당해지는 시기가 도래했다는 전조일까?

고슴도치의 특성상, 그리고 인문학의 위기가 하루아침에 전복될 것 같지는 않기 때문에  목소리가 당당해져봤자 별로 들릴것 같지는 않지만,  사회전체적으로 냉소적이고 체념적인 분위기가 팽배한 것은 사실인 듯 하다.

소설속에서 한국의 지적담론의 미래가 언듯언듯 비치는 듯해서 좀 심란했다.  내 심약한 마음을 들킨듯 해서 그랬을까. 어쩌면 내가 나이들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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