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남아있는 3대의 역사
1762년(영조 38년) 윤 5월, 사도세자는 인정전 뜰에서 뒤주에 갇혀 죽는다. 아버지 영조의 손에 의해.
이때 인정전 뜰에서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울부짖던 11살의 세손 이산(李祘)은 강제로 끌려나간다. 이게 정조가 본 사도세자의 살아 생전 마지막 모습이었다. 한중록에 의하면 사도세자의 친어머니 영빈 이씨가 세자의 병을 이유로 ‘대처분’을 내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세자의 위치에서 처벌을 받지 않고 죽음으로써 세손인 정조를 보호하려 했다는 이야기와 다른 두 딸인 화완, 화평옹주의 편만을 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영빈 이씨가 아들의 관을 붙들고 통곡하고 이후 “자식에게 못할 짓을 했으니, 내 앉은 자리에는 풀도 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는게 사실에 가까울 듯 싶다. 그렇게 믿고 싶다.
정조는 세손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어려서 죽은 삼촌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된다. 여기서부터는 드라마 ‘이산’에 자세히 나온다.
1776년 3월,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한 정조는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언한다. 그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1800년 그가 죽고 정순왕후가 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첨정하면서 잔혹하게 지워나간 봉건왕조의 절정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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