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구! 시대와 인물] 채소종자 식민지 한국의 ‘독립운동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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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 시대와 인물] 채소종자 식민지 한국의 ‘독립운동갗
  • 편집국
  • 승인 2003.08.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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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 박사(1898-1959)


씨 없는 수박
지금은 종자개량으로 큼지막해진 수박에 씨도 별로 없지만 60, 7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한 여름 시원한 수박을 먹으면서 씨 없는 수박과 그것을 만들어 냈다는 우장춘 박사를 떠올렸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도쿄제대 부설 전문학교 농학실과를 졸업하고 1936년 다아윈의 진화론을 뒤집은 ‘종의 합성론’이라는 유명한 논문으로 세계적인 육종학자의 반열에 오른 우장춘 박사. 그가 우여곡절 끝에 1950년 한국으로 돌아와 우리의 토양과 기후에 맞는 채소 종자를 개발하면서 보낸 말년의 10년은 그의 ‘나라 사랑’만큼이나 우리에게는 행운이었다.

우박사의 아버지 우범선은 구한말 개화파 박영효의 측근으로 별기군 훈련 제2대장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공사와 공모해 경복궁으로 쳐들어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데 앞장섰다 일본으로 망명, 8년 째 되던 해인 1903년 고종의 측근이던 또 다른 망명객 고영근 등에게 참혹하게 암살 당하고 만다. 사카이라는 일본 여성과 결혼해 얻은 첫아들인 우박사의 나이 6살 때였다.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한때 고아원에서 자라기도 했던 우박사는 혹심한 궁핍과 ‘센진노꼬(조선인의 자식)’라는 멸시 속에서 성장기를 보내야만 했다. 1936년 그 유명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딴 뒤에도 우장춘이라는 한국 이름은 그의 일본에서의 삶에 늘 부담으로 작용했다.

1937년 일본 농림성이 그를 중국에 신설하는 면화시험장장으로 승진 발령하면서 창씨개명과 일본국적 취득을 조건으로 내걸었을 때, 그는 가차없이 18년 동안이나 몸담았던 농림성에 사표를 냈다.

그에게 이러한 민족의식을 심어준 사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너는 조선 혁명가의 아들’이라는 부단한 가르침을 준 어머니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아버지에 대해 그리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 같지는 않다. 한국에서의 생활 10년 동안 그는 거의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해방, 그리고 한국에서의 10년
우박사는 1945년 9월 3일, 8·15 이후 보름만에 다게이연구농장 농장장직과 교토대학 출강을 모두 그만두고 귀국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그의 출국을 허락치 않아 일본인 아내와 여섯 자녀를 일본에 남겨두기로 하고, 밀입국과 범법 외국인들을 수용하는 오오무라 수용소에 억지를 써 입소한 끝에 부산으로 오는 38번째 송환선을 타고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후 1959년 고국의 품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부산 원예시험장에서 채소 종자 개량에 바친 그의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신 것이었다.

식민시대 일본에서 들여오던 종자들이 해방 후 국교단절과 함께 끊기고, 거의 수입에 의존하던 각종 채소류의 국산 우량종들을 속속 개발해 냈던 것이다. 엉성하게 키 큰 재래종 배추와 달리 속이 깊고 단단한 ‘결구배추’와 제주도의 감귤농장, 국산 카네이션, 온실 장미, 큰 국화 등이 바로 그의 작품이다.

그는 우리나라 채소, 곡물류 재배에 ‘코페르니쿠스’적인 전기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70년대 이후 번성하게된 ‘화훼산업’의 주춧돌을 놓았던 것이다. 씨 없는 수박만 빼고…. 씨 없는 수박은 사실 일본 기하라생물연구소의 작품으로 1955년 당시 “농촌지도소가 권장하지 않는 작물만 심으면 된다”는 농민들의 ‘농정불신’을 해소하기 위한 우박사의 고육지책의 이벤트였을 뿐이다.

한국에 묻힌 우박사
우리말을 듣고 읽을 줄은 알았지만, 한마디도 하지는 못했던 우박사. 가족과도 떨어져 홀로 외롭게 원예시험장 울타리 안에서만 생활해야 했던 우장춘. 한국 정부는 그가 다시 환국하지 않을 것을 우려해 1953년 그의 어머니가 운명했을 때조차 그에게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았다.

그는 귀국한 지 5년 만인 1954년 잠시 일본을 방문 가족들과 겨우 재회를 했고, 이후 다시 그의 아내를 보게된 것은 그가 당뇨병과 십이지장궤양 등 합병증으로 병원에 입원, 죽음을 열흘 앞두고 있을 때였다.

그는 1959년 8월 세상을 떠나 현재 농촌진흥청 구내 여기산 기슭에 누워 있고, 그의 후손들 대신 진흥청 사람들이 정갈하게 가꾸고 있는 묘역은 한국에 오는 세계 여러나라의 농학자들이 반드시 찾아보는 순례코스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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