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창] 디지털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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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창] 디지털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단상
  • 신순희
  • 승인 2004.10.1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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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깨어있기를 원하는가?
IT강국, Internet 코리아의 위상에 걸맞게 오늘도 초고속 인터넷망에 연결된 내 메일박스에는 "오빠, 너무 더워" 따위의 메일이 수북히 쌓여 있다. 핸드폰에는 한 여성 연예인 누드가 첫 모바일 서비스를 시작한다는 문자가 찍힌다. 물론 접속자는 폭주란다. 한때 종로 뒷골목이나 용산의 어느 으슥한 곳에라야 있었다던 포르노 산업이 바로 내 코앞까지 침범한 오늘의 현실이 어느덧 무감각하다.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너 X양 비디오 봤니?"를 "너 실미도 봤니?"라는 말처럼 누구나 쉽게 내뱉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이 오늘날 IT강국 코리아를 만든 중요한 역사적 분기점이 되었노라 역설하는, 사단법인 한국인터넷 성인문화협회장이 보무도 당당히 2002년, 제47회 정보통신의 날에 정보통신분야에서의 노력을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단다. 인터넷이 뭔지, 검색은 뭐고 다운로드는 뭐며, 또 인터넷 쇼핑은 뭔지 도대체 모르던 이 나라 중장년층들에게 인터넷 유저가 되어야하는 강렬한 동기를 부여하여, 오늘날 번창일로의 인터넷 산업 기초를 다졌다는 주장이다.

어느덧 포르노그라피는 디지털 문화 콘텐츠가 되었고, 포르노 산업은 국가에 의해 승인되고 심지어 투자되는 수출, 효자기업(아~ 듣기만 해도 국민 모두가 흑흑거리며 쓰러져 모든 것을 양보해버리고야 마는 바로 그 단어)으로까지 발돋움하고 있다.

포르노 논쟁이 진부한 논쟁 취급을 받으며 여성주의 아젠다에서 소외되고 있는 사이, 한국의 포르노는 그야말로 노마크 찬스를 맞았던 모양이다.

디지털의 축복 속에서, 뒷골목을 헤매이거나 비디오가게 주인의 시선을 느끼며 자기정체성을 확인해야하는 구차한 과정이 생략된 채로, 사회적 이미지의 손상을 더이상 염려하지 않고, 컴퓨터로 혹은 최신형 300만 화소 핸드폰으로, 은밀하며 세련되게, 손쉽게 포르노를 소비할 수 있는 환경이 구현된 오늘날, 포르노는 이제 더이상 성적 낙오자의 컨셉이 아니라 인터넷 문화, 첨단 기술의 컨셉으로 소비되고 있다.

포르노 산업은 IT산업이 되었고,

포르노 유통자는 첨단 컴퓨터 기술자로 대접받으며,

포르노 소비자는 love, freedom, life style, health, 심지어 healing, caring 등의 고상한 개념들 속에서 포르노에 대한 무감성을 획득해 간다.

네티즌의 정보 공유 정신과 연대애는 포르노에 공공성을 부여하는 따위의 일에 복무하고,

심지어 가난한 자도 포르노를 접할 수 있는 디지털 민주화 시대가 도래했음이 찬양되어지는 오늘,

그렇게 포르노그라피는 세련된 외투를 걸치고, 본질이 은폐된 채로, 우리의 경계심을 무너뜨리며 일상이 되어 버렸다.

지금, 포르노는 더 이상 여성주의 아젠다가 아닌 진부한 이야기인가? 나는 결코 아니라고 본다.

포르노는 그냥 야한 어떤 것이 아니다. 단순한 에로티시즘 문화가 아니라 에로를 가장한 폭력이다. 성욕이 식욕에 준하는 본능이듯, 에로티시즘은 좀 더 보호 받고, 좀 더 밝은 조명 아래로 나와야 할 당당한 인간의 문화 영역이지만, 그것과 포르노는 구별해서 인식해야 한다. 페미니즘이 비난하는 것은 포르노의 폭력성, 즉 사회적 권력관계에 기반한 약자에 대한 억압적 폭력이지, 인간에게 필요한 성문화의 향유가 아니다. 오히려 폭력이 배제된 건강한 관계로서의 성문화가 페미니즘적 대안문화라는 이름으로 구석방 신세인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렇듯 포르노에서 에로티시즘과 폭력을 구분해 내는 지점에 페미니즘의 개입이 필요하다.

따라서 포르노그라피 논쟁은 '강간 포르노' 본다고 지나가는 여자를 강간하네 안하네 따위의 얘기가 아니다. 그 핵심은 사회적 학습효과도 아니고 개인의 에로틱 취향도 아닌, 폭력의 사회적 허용 여부에 대한 것이다. 포르노그라피는 사회적 약자의 몸을 식민화하는 과정일 뿐이며, 디지털이란 껍질이 그 본질마저 세련되게 바꿔주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사회가 그 폭력을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곧 포르노 논쟁의 수준이며 지표라고 나는 생각한다.

무심히 포르노를 보며 스스로가 폭력을 지각하는 능력을 퇴화시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타자의 몸에 대한 겸허함과 경건함을 잃고 부지불식중에 인간에 대한 존엄을 부인하는 것은 아닌지, 폭력의 무차별적 노출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것은 정말 미성년자 뿐인지, 성년인 우리는 과연 안전한 건지가 논의의 핵심이다.

놀라운 디지털 환경의 가면 놀이 속에서, 폭력에 대한 자기성찰이 사라지고 공모자의 죄의식마저 마비돼 가는 지금의 우리는, 어쩌면 메트릭스 속의 인간과 꼭 닮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남근의 원격공학, 사이버 섹스까지 언급한다면 메트릭스도 더이상 먼 미래 이야기가 아니다.

사이버 상에서 누구나 포르노 산업의 생산, 유통, 소비에 참여할 수 있게 된 지금의 현실도 장비와 기술능력에만 기인하지는 않는다. 칼이 있다고 누구나 사람을 찌르지 않듯, 핵심은 장비 보유 여부가 아니라 자기검열 능력이다. 정말 무서운 것은 자기검열 능력 즉, 감수성의 소멸이다.

타자에 대한 폭력을 손쉽게 묵인하는 환경 속에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하는 민감한 감수성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수 밖에 없다.

물론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가 에로티시즘이고 어디서부터가 폭력적 포르노인가, 혹은 무엇이 표현의 자유를 획득해야할 문화 콘텐츠냐에 대한 논쟁을 진지하게 벌여야 한다. 다만 포르노 사이트의 접속자 30%가 여성이며, 니들 페미니스트만 빼고 다 본다는 허접한 논리가 페미니즘의 포르노 개입을 막는 진입장벽이 되서는 곤란하다.

페미니즘은 규제라는 이름으로 남성 정부와 남성 포르노산업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들만의 논쟁 틀을 깨고, 그곳에 철저히 소외된 약자의 목소리를 담아내야 한다. 피해자의 눈으로, 약자의 감수성으로 논의에 접근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잎새에 이는 바람을 볼 수 있고, 괴물이 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의료시장 개방으로 붕괴될 국민의 건강권을 지키내려 애쓰는 지금, 이미 세련되게 변장한 디지털 포르노그라피는 별 저항 한번 받지 않고 국민의 정신건강 파괴를 완결해낸 것은 아닐까하는 끔찍한 공포가 밀려온다.

어쩌면 우리는 메트릭스에서 깨어나기를 두려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2004년 가을, 또문대학 강좌를 들으며 나는 저항군 진지를 방문한 기분이 되었다.

우리가 늘 깨어있고자 소망한다면, 오늘도 여전히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논쟁은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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