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이야기] 우엔 반 쬬이와 이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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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이야기] 우엔 반 쬬이와 이승복
  • 송필경 논설위원
  • 승인 2004.10.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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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미와 숭미(勝美와 崇美)

"그토록 오랫동안, 어쩌면 그토록 불굴의 용기로, 도대체 그토록 불패의 전투를 벌였던 베트남 전사들은 과연 누구인가?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맹렬하게 만들었는가? 무엇을 믿고 이들은 끔찍한 고통을 버텼는가? …프랑스 식민지 70여년 그리고 30년 동안 미국 제국주의 침탈을 기어코 극복하게 만든 꿈과 목표는 어떤 것이었는가?"

내가 대학에 갓 입학한 때인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은 미국을 상대로 치른 길고 긴 민족해방전쟁에서 완벽한 승리를 하였다. 이후 내가 줄곧 지녔던 화두가 바로 이것이었다.

2001년 3월 17일 저녁, '화해와 평화를 위한 베트남 진료단'의 일원으로 베트남행 비행기에 올랐다. 53명의 일행 모두는 자기 몸무게보다 더 많은 무게의 진료 장비를 실었다. 인천 공항에서 호치민시까지 가는데는 6시간이다. '호치민'이라는 시의 이름은 베트남에 처음 가는 나에게 낯설었다. '청룡', '맹호',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사이공의 흰 옷'과 같은 말을 듣고 자란 나는 호치민보다는 사이공이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꼭 가고 싶었던 나라에 가고 있는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기내 서비스 술을 얼마간 마셨고, 그래서 약간 취한 기분으로 탄선넛 공항에 내렸다. 이 공항은 60년대 초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위해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크게 지은 공항이라고 했다. 그러나 방금 떠나온 인천 공항에 비하면 초라했다. 공항 건물을 나서자 도시 뒷골목 에어컨 냉각기에서 뿜는 듯한 후끈하고 텁텁한 열기를 접하자 비로소 열대에 나라에 온 것을 실감하였다.

여기 시간 새벽1시, 그러니까 두 시간 시차를 감안하면 우리 시간으로 새벽3시인데다 술기운에 열대 나라의 열기가 더해지니 몽롱한 상태가, 엄청난 양의 진료장비가 세관을 통과하는 동안에도 멈출 줄 몰랐다. 우리는 아침 첫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진료지와 가까운 중부지방에 있는 다낭으로 이동하기에 호치민시를 '심야 관광'하고 이 자리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우리 진료단의 가이드는 구수정씨였다. 호리호리하고 자그마한 키에 윤나는 약간 검은 살결은 얼른 보기에 베트남 여성처럼 보였다. 그녀는 베트남에서 역사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유학생이었다. 1999년 구수정씨는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이 저지른 양민학살에 관한 보고서를 국내 최초로 발표하였고, 이것은 베트남전쟁 참전에 대한 반성을 촉발하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구수정씨는 일부 베트남 참전군인들에게 거세게 항의를 받고 있었다.

탄선넛 공항을 출발하여 야식을 먹기 위해 시내 ABC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구수정씨는 특유의 또박또박한 말투로 우리에게 베트남에 대한 여러 가지 상식과 지식을 설명하였다. 시내 입구인 듯한 작은 다리를 지나는데 설명을 중단하고 이 다리에서 어느 누구가 무슨 일을 하였는데 그를 기념하는 다리와 거리라고 설명하였다. 계속 몽롱한 상태라 대충 들었고 우리처럼 퇴계로니 충무로니 하는 그러한 거리라고 연상됐다.

이어 ABC레스토랑에서 처음 접한 베트남 음식을 맛있게 먹고 사이공 대교회를 비롯한 시내 중심부를 새벽까지 구경하고 탄선넛 공항으로 다시 돌아갔다. 아침 첫 비행기를 타고 다낭으로 가서 진료지인 꽝응아이 성으로 버스로 이동하였다. 7박 8일의 진료 일정을 마치고 무사히 귀국한 후 나는 베트남에 대한 관심이 다시 끓어올랐다.

부패한 남베트남 정부가 패망하고 베트남이 민족해방을 이루자 남베트남처럼 독재정치를 하던 박정희 대통령은 극도의 히스테리칼한 반응을 보이면서 그 악명높던 긴급조치를 선포하였다. 이른바 유신공포정치 속에서 나는 대학생활을 죽 보냈다. 이즈음 베트남전쟁을 다룬 이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라는 우리 현대사의 고전 중의 고전이 출간되었고, 나는 여기에 흠뻑 취했다.

진료단으로 같이 갔던 동료들은 거의 대부분 80년대 이후 학번인 까닭에 이들에게 베트남 현대사를 보여줄 내 나름대로의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대형 서점가를 훑으면서 베트남에 관련된 책을 40여권 이상 모았고 인터넷에 부지런히 들락거렸다. 마침 작가 방현석 선생이 '말'지에 "호치민의 나라 베트남에 가다"는 기행연재물을 내보내고 있었다. 2001년 5월호에 '미국이 감히 줄을 세울 수 없는 나라'란 제목의 글을 읽어 보다가 문득 한 사람의 이름이 불현듯 떠올랐다. 내용의 일부는 이러하다.

『…처음 베트남에 온 친구 하나를 위해 나는 오늘 하루 가이드 노릇을 하기로 되어 있다. 대통령궁, 전쟁범죄박물관, 역사박물관을 둘러보고 난 이 친구는 가장 인상적인 것으로 두장의 사진을 꼽는다.
첫 번째 사진의 주인은 ‘우옌 반 쪼이'다. 미국의 국방장관 맥나마라가 사이공에 왔을 때 폭탄을 설치했다 잡혀 사형을 선고 받은 전기공의 사진은 누구에게나 강렬하다. 사형집행 직전 눈가리개를 벗어버리고 ‘호치민 만세', '베트남 만세'를 외치며 24살의 나이에 총살당한 노동자.
두 번째 사진의 주인공은 '모아 디 탕'이다.…』

‘우옌 반 쪼이’, 구수정씨가 설명한 공항에서 호치민 시내에 진입하는 다리와 거리가 바로 이 청년을 기념하는 이름이었다는 것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 이 후 나는 이 청년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려고 애썼다. 그에 대한 자료는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도 잘 나타나지 않았다. 현대사 공간에서 벌어졌던 베트남과의 악연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베트남전쟁에 대한 충분하고도 객관적인 자료가 참으로 부족하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어쨌든 그에 대한 쥐꼬리 만한 자료를 어디에선가 간신히 구할 수 있었다.

‘우옌 반 쬬이’는 1964년 맥나마라 당시 미국 국방장관이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그가 지나갈 시내 입구 다리에 폭발물을 설치했다 그만 들켜버려 사형 당한 갓 결혼한 젊은이였다. 프랑스, 일본 그리고 미국같은 제국주의자들과 100년 동안 무력으로 저항하며 한치도 물러서지 않은 베트남에는 하늘에 별만큼이나 많은 애국지사가 있을 것이라고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암살 미수범이 우리나라 안중근 의사 정도의 대접을 받는 슈퍼스타라는 것을 얼른 납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체포된 후 6개월 간의 재판 끝에 공개 사형을 당한다. 두 팔과 양손이 기둥에 묶이고 눈가림을 당한 채 총살형을 기다렸다. 많은 보도진 앞에서 유언을 말하였다.
"내 마지막 소원이 있다. 내 조국의 산하를 보고 싶다. 눈가리개를 벗겨 달라...."
눈가리개가 벗겨지자 장엄하기 짝이 없는 사자후를 내뱉는다.

"내 이 말을 꼭 기억해 달라.
미제국주의타도!
베트남 만세!
호치민 만세!"

이것이 내가 찾아냈던 자료의 전부이다. 나는 이 짤막한 유언에서 베트남의 역사와 호치민의 일생을 압축한 엑기스를 느꼈다. 그것은 마치 천 수백 년 축적된 불교의 대장경을 압축한 반야심경을 접한 것처럼 심오한 감동이었다.

나는 2002년 3월 '베트남평화의료연대' 진료단장으로 다시 베트남을 방문하였고, 호치민시에 있는 베트남 전쟁박물관을 관람했다. 거기서 ‘우옌 반 쪼이(阮文追 烈士)’의 사형집행 전의 사진들을 직접 볼 수 있었고, 전시 사진과 그 아래 한문으로 쓰여진 설명을 내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阮文追 烈士, 1964年10月15日 在志和監獄被槍斃之前, 開口疾呼
記得我所說的;
打倒 美帝國主義!
越南 萬歲!
胡知明 萬歲!

당시 조국을 극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만든 미국의 제국주의 침탈에 젊은이는 어떻게 항변하였는가? 신혼의 단꿈에 젖은 젊은이가 목숨을 바치고자한 조국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절단된 조국의 다른 쪽 지배자, 생전에 한번도 만나지 못한 인물인 호치민을 왜 조국만큼이나 소중히 했는가?

나는 그때부터 ‘우옌 반 쪼이’의 유언을 되뇌이며 베트남 인민과 지도자가 추구한 이상과 신념을 찾아보는 행복한 사색을 시작한 것이다. 맹목적으로 투쟁하는 교조주의자가 아닌 반드시 거머줘야 할 꿈을 위해 열렬히 투쟁한 인민과 지도자가 어떻게 어울렸는지를 하나 하나 찾아 나갔다.

"타도 미제국주의, 베트남 만세, 호치민 만세"는 현대 베트남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이다. 이 세 마디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20세기에 미국이 저지른 야만에 대항하여 베트남이 이룩한, 인류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저항의 승리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호치민은 그냥 지배자(ruler)가 아닌 진정한 지도자(leader)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강릉을 가는 영동고속도로에서 속사로 빠져 운두령으로 가는 중간에 이승복 기념관이 있다. 무장공비에 살해된 9살 짜리 어린이를 기념하는 폐교에 마련한 반공교육장이다. 운동장에 탱크를 비롯한 각종 무기를 전시해 놨다. 이 어린애를 유명하게 한 것은 죽기 직전 공비를 향해 “공산당이 싫어요!”라 했다는 것이다.

이 상황은 조선일보가 지어낸 것이라는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60여 년에 걸쳐 반공을 애지중지한 나라에서 젖먹이 어린애가 반공 톱스타라는 것은 매우 서글픈 코메디이다. 나는 운두령을 넘는, 아름다운 이 길을 지날 때마다 베트남의 톱스타 ‘우옌 반 쪼이’와 조선일보의 톱스타 ‘이승복’을 비교해 보았다.

그러면서 비이슬람계 국가 중 유일하게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침략”이라 목소리 높인 베트남에 비해 미국의 요구에 알아서 무릎꿇고 얼른 파병이라는 “침략”에 동조한 우리 현실이 한 없이 서글퍼졌다. 왜 우리는 베트남전쟁에서 저지른 죄악을 이라크에서 다시 되풀이 하려 하는가? 그것은 “우옌 반 쬬이”가 상징하는 승미주의 인민과 “이승복”을 내세우는 숭미에 절은 그룹 간의 격조 차이가 아닐까?

베트남평화의료연대는 해마다 진료를 위해 베트남을 방문하고 있다. 우리는 진료지에서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이 저지른 학살의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그리고 가장 직접적인 사랑의 실천인 진료를 통해서 부끄러운 역사에 사죄를 하고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모색하고 있다. 더 나아가 베트남전쟁에서 베트남 인민과 지도자가 엮어낸 승리를 배워 우리가 이룩해야 할 통일의 타산지석으로 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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