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語) 달리자] 건치 10년, 예뻐져라 내 얼굴
[릴레이 수필 대장정] 21 - 김철신(경희 97졸, 구강보건정책연구회 회장)
특별히 무슨 선배가 꾀어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미 누가 꾀어낸다고 어찌될 나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다만, 마음속에 있는 무엇인가를 살짝 건드려준 누군가가 있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가진 특별한 자산이 있다면, 그 무엇인가를 건드려줄 이들이 주위에 참 많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학번과 달리 유난히 많았던, 그리고 능력과 상관없이 질긴 동기들과 선배들이 있었으니 말입니다.
건치에 회의한다고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 구강보건정책연구회로 가게 되었습니다.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왜 있지 않습니까. 그 오래된 우리나라의 초상화에 입 꼬리 내려간 고집스런 표정의 영감얼굴들... 더구나 학교도 다른 이들이 잔뜩 앉아 움직일 생각은 안하고 그 초상화속의 표정으로 일을 합니다.
저에게는 복사와 자료정리, 그리고 조용히 듣고 앉아있기 같은 막중한 일들이 맡겨졌지요.그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무슨 법안의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 심각한 표정으로 한 두 달 모여 대더니 말입니다.
그리고는 얼마 후에 사람들이 다 사라졌습니다.
한사람이 들어왔는데 자기는 정책연구회의 회원이지 건치회원은 아니라고 합니다. 건치는 자기 삶의 지향이랑은 거리가 있다면서 말이지요...이런 선배들 가끔 있었는데 말입니다.
아 그때 생각했습니다. 저 멘트 뭔가 있어보일지도 모를 저 멘트, 난중에 후회 할 텐데... 물론 지금까지 좋은 술안주가 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사람 들어와서 같이 일했습니다.
몇몇 후배들이 들어왔습니다. 당연히 자발적으로입니다. 이미 무슨 이야기를 한다고 들을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도 그랬겠지요. 마음속에 무엇인가가 살짝 건드려진 게지요... 제가 가진 특별한 자산 중의 두 번째는 그 무엇인가를 건드리고 싶은 사람들을 또 한 가진 것이지요...
말을 참 많이 했습니다. 저 원래 과묵하고자 하는 사람인데 그렇게 안 되었습니다. 조그만 회의실에서 어찌 그리 짊어질 것들은 많은지 이야기를 나눕니다.
건치에서 함께한 지난 10년 동안 저는 결혼을 하고, 개원을 했고, 아이를 낳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이 치과의사로서의 제 삶을 설명해주는 것 같습니다.
물론 특별한 뜻이 있어서 건치와 함께 한 것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건치와 함께한 시간이 특별한 의미가 될 수 있도록 애쓴 것은 사실입니다. 많은 이들처럼 말입니다.
나이가 드니 내가 큰 뜻을 품어 건치에 있었던 양 우기기도 합니다. 괜시리 실망한척, 뿌듯한 척도 하고... 그러나 그것은 나잇살의 증거일 뿐인 것 같습니다.
사람에게는 무엇이든 선택의 순간이 있고, 그 선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그 순간의 각오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선택후의 시간인 것 같습니다. 그 시간을 의미 있게 만들려는 노력들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나라 초상화속의 영감들은 왜 한결같이 눈은 무섭고, 입 꼬리는 처졌을 까요?
뭐 체면 때문에 웃지 않았을 수 있지만, 초상화를 그릴만한 영감들 대부분은 세상만사가 완전히 맘에 들지는 않았겠지요. 자기 뜻을 몰라주거나 곡해하는 사람이 많았겠지요.
그렇다고 돌아앉아 세상과 담쌓고 살기에는 관심이 너무 많았던 것 아닐까요?
세상에 대한 과중한 책임감과 진지함, 그리고 자신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절박함. 그냥 추측해 봅니다. 만약 이 영감들이 자기 모습을 한발 떨어져 지켜보았다면, 아니 요즘처럼 회의사진을 가끔씩 미니홈피에 올려서 보았다면, 쑥스러워 살며시 웃었을지도 모릅니다.
건치에서 얼마만큼 내 초상화가 그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한 가지는 입 꼬리가 내려가지 않았으면 합니다. 뚫어질듯 쳐다보는 눈빛만 가졌으면 합니다. 그것도 약간만 말입니다.
나랑 생각이 너무 다른 사람이 세상일을 다 결정하는 것, 짜증납니다. 내가 가진 분노와 상관없이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것, 슬픕니다.
내 무책임이 항상 과중하게 느껴지는 어처구니없는 피해의식도 화가 납니다.
솔직히 그런 것들 참아내고 성숙하게 처리하는 심리적 장치에 대해서는 포기했습니다.
그냥 뒷담화로 목이 쉴 때까지 떠들어대며 처리합니다. 이런 저급한 내적 분노의 처리방식에 대해서는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
그러나 건치와 함께 하는 시간 속에 그려질 내 얼굴이 종국에는 웃는 얼굴이었으면 합니다.
과중한 책임감과 진지함도 때로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건치가 없으면 세상이 무너질 듯 한 간절한 절박함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진지함에 어색해하며 웃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내 입 꼬리 방향이 어느 쪽인지 항상 의식하며 살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미 건치와 함께 10년이 넘는 시간을 선택한 것이고, 그 시간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제 몫입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저도 사람들 이름을 불러보고 싶네요, 구강보건정책연구회, 집행위원회, 그리고 각종 국과 회를 같이 한 선생님들 말이에요... 정곽정김김김소신류전박이이전홍정김조서강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