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성 매매, 처벌이 대책일까?

매매춘- 다른 이야기

2004-11-04     박한종

 

▲ 루오 - 거울 앞의 창부
나는 성 매매의 문제를 다른 텍스트를 기초로 풀어보고자 한다. 사실 읽은 지 오래되어 내가 의지하는 텍스트는 그 자체가 아니라 내가 믿고 있는 텍스트일 것이나... 뭐 어떠랴! 이깟 글쓰자고 다시 책을 뒤척이기도 그렇고...

아마도 5-6년 전 예비군 동원 훈련간의 심심파적으로 책 몇 권을 구하다 손에 걸린 책이 <창부 designtimesp=7895>(꼬르뱅, 동문선)란 책이었다. 그 덕에 하루는 족히 심심하지 않게 지낸 기억이 있다.

매매춘이란 것을 과연 어떻게 정의할까? 처음에는 뮈 쉽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곰곰이 씹어 보면 간단하지 않은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 유사행위가 어디까지인지 몰라 단속 경찰들이 곤혹스러워 한다는 것은 별도로 하더라도, 책에서 인용되듯 원활한 성생활 치료를 위해 동원되는 여성(대개는 의료진의 지도하에 정상적인 성행위를 위해 매매춘 여성이 이용된다고 한다)과 환자를 처벌할 수 있을까? 아니면 치료를 목적으로 한 매매춘은 허용되어야 할 것인가?

더 나아가 부부간의 부부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남자와 여자의 책임을 인정한다면(왜 남자가 가정 경제에 대해 무책임하다하여 이혼의 사유가 되고, 여성은 부부생활을 거부했다고 이혼의 사유가 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이는 과연 성매매와 구별될 수 있는 것인가?

더 나아가 성 매매의 기원을 따져본다면, 남성의 경제적 권력의 문제에서 비롯된다기보다 남, 여의 속죄나 정결 의식이란 종교적 행태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듯 매매춘 자체를 제대로 정의 내릴 수 없다는 것은 매매춘 대책의 어려움을 암시한다 하겠다.

이제 실제를 보자. 어느 매매춘 근절책, 또는 어느 매매춘의 통제책(근절이 아닌)이 성공한 적이 있었던가? 지금 시도되는 듯한 발본적인(래디칼? 또는 무지막지?) 해결책은 말할 것도 없이 장기적으로는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는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른바 양성화는? 프랑스의 경우를 통해 보면 사창이 폐쇄되고 공창이 생기자 역시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공창의 이웃에 사창이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근절은 물론 통제마저도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매매춘의 수용과 공급을 공식화하기에는 너무나 다종하고 다양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까?

책의 제목이 보여주듯, 이 책은 매매춘의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창부의 문제를 다룬다. 내가 느끼기에도 매매춘 문제의 해결은 매매춘의 해결이라기보다는 창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문제 해결의 대상이자 목적이 성적 행위에 집중되기보다는 창부에 맞추어져야 합당하지 않나 한다.

이는 매매춘의 근절이라는 래디칼한 해결보다는 창부가 될 수 밖에 없는 여성의 인권이란 현실의 해결에 더 높은 점수를 주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인신매매나 인신 구속적인 매매춘의 엄단, 저소득 계층의 여성에 대한 보호 등등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리라.

그러나 매매춘이 가지고 있는 사회 문화적인 요소는 엄단이 아니라 사회 문화적인 대안적 투쟁을 통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본다(물론 물리적 규제 자체를 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또한 어린이의 성 접촉, 장애인의 성문제 등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것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 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일 수도 있다).

다른 한편, 남성 가부장적 사회가 매매춘에 작용하는 방식은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매매춘을 조장하는 것이자 다른 하나는 매매춘을 처벌하는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가부장적 남성은 매매춘의 향유자이자 동시에 가부장적이지 못한 남성과 여성들을 이 과정을 통해 통제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부장적 사회가 해체되면, 매매춘의 문제는 해소될 수 있는가? 매매춘은 가부장적 사회 규제는 물론이려니와 인본주의적 규정의 틀 안으로 가둘 수 없는 성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 매매춘의 정의의 어려움은 여기에서 비롯된 부분이 많을 것이다.

동물적 본능, 사회적인 정상적인 성, 이른바 사랑이란 인본주의적 가치로서의 성, 그리고 경제적 문제의 개입의 다양성 등등 이러한 요소들이 다양하게 결합됨으로써 매매춘의 경계를 흐리는 성적 접촉의 다양성으로 우리를 어지럽게 하고 있다. 이것 또한 인본주의적이자 발본적인 대책에 대해 매매춘 문제의 최소화에 집중하는 현실적 대책의 (내가 느끼는) 장점이다.

그렇다면 매매춘이란 금기의 문제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매매춘의 문제는 최소화할 수 있을 뿐이고 해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금기의 문제를 해소하는 것은 어떨까? 그러나 금기와 위반을 둘러 싼 구조와 욕망의 문제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근친 상간적 족내혼(왕족의 신성함을 지키기 위한 근친혼)이나 토템 같은 것이 과연 욕망을 억압하기 위한 금기일까? 어쩌면 욕망을 억압하기 위해 금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금기가 있기에 욕망이 있을 수도 있다. 분명 금기가 욕망을 가두기도 하지만, 금기 자체를 금기하는 하는 것은 욕망을 본능으로 무장 해제시킬 것이다. 포르노가 성의 상상력을 해체시키듯 매매춘의 인정은 또 다른 성의 쾌락을 해체시킬는지도 모른다.

매매춘의 근절이란 것이 진보일 수도 보수일 수도 있고, 역으로 매매춘의 인정이란 것이 진보일 수도 보수일 수도 있는 혼란한 현실에서 매매춘의 근절도 인정도 아닌, 또다른 혼란을 덧붙이자는 것이 저어스럽지만, 그러나 적어도 매매춘의 대책은 어떤 입장의 관철이란 측면이 아니라 현실적인 가능성이나 전망이란 실용적 측면이 더 필요하지 않나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