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語) 달리자!] 어떤 실패한 치과의사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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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語) 달리자!] 어떤 실패한 치과의사의 고백
  • 강신익
  • 승인 2008.07.28 16:57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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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 수필 대장정] 5 - 강신익(인제 의대 교수, 인문의학연구소장)

 

불혹(不惑)인지 유혹(誘惑)인지 모를 마흔을 지났는가 싶더니 어느덧 하늘의 뜻을 안다는 오십 고개마저도 훌쩍 넘어버렸다. 대학을 졸업한 것이 82년이니 치과의사가 된 지가 벌써 27년째다. 하지만 학교에 다닐 때나 치과의사가 되었을 때나 나는 나의 직업과는 그다지 친하지 못했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는 물리학자가 되고 싶었고 대학에 다닐 때는 공부보다는 나라의 민주화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치과의사가 된 다음에는 늘 전업을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성적이 좋았을 리 없고 직업에서 만족을 얻었을 리 또한 없다. 그런데도 학교를 떠나거나 직업을 버리지 못했던 것은 오직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세상에 대한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사랑과 상상력이 부족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의 입학 동기 중에는 일찌감치 학교를 떠난 친구도 있었고 유신 반대 운동으로 감옥에 간 친구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도무지 그럴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럭저럭 대학을 졸업했지만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던 나는 구강외과 수련을 받기로 작정하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일은 무척이나 힘들었지만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은 있었다. 무엇보다 공부와 일이 하나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나를 찾아온 환자가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을 찾기 위해 공부를 하고 그 지식을 이용해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건 나 자신에게나 환자에게나 무척 가치 있는 일이었다. 마침내 내가 가야 할 길을 찾은 것 같았다. 그래서 3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다시 그 병원으로 돌아가 임상교수가 되었다.

하지만 직업과의 밀월은 오래 가지 못했다. 전공의 시절의 열정도 사라지고 반복되는 일상이 답답해질 즈음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구강외과와 성형외과 전공의들이 외상 환자를 사이에 두고 티격태격하더니 어느 날 성형외과 전공의들이 구강외과 의국을 습격해 잠자고 있던 우리 전공의들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 지난 1월 보건의료 진보포럼-'몸의 철학, 몸의 문화' 강연
환자의 고통을 보듬어주는 의사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돈벌이의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칼부림을 서슴지 않는 조폭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폭력 행위에 대한 사법적 처벌은 솜방망이였고 의사의 윤리 위반에 대한 논의와 판단조차도 없었다. 어렵게 얻은 직업적 자긍심은 더 이상 나를 붙잡아주지 못했다. 떠날 때가 된 것이다. 그런데 어디로?

직업에 대한 자긍심이 무너진 이상 기댈 것은 돈밖에 없었다. 그래서 개업을 했고 돈을 벌었다. 그런데 아무리 돈을 벌어도 기쁘거나 즐겁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개업은 나의 체질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다시 대학병원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진짜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그동안 벌어둔 돈이 있어 부려볼 수 있는 만용이었다.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 그것이 공부일 줄은 그것도 많은 사람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철학일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게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유학길에 오른 것이 내 나이 꼭 40이 되던 해였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정말로 설레는 일이었다. 그 공부는 내가 20여 년 동안 해 오던 일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었고 보건의료의 미래를 전망할 통찰력을 줄 수도 있을 것이었다. 내가 이 분야의 선구자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나를 흥분케 했다. 그렇게 공부에 빠져있다 보니 예정했던 1년은 너무 짧았고 다시 1년을 연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당시 치과의사를 그만두고 런던에서 사회정책을 공부하고 있던 조효제 선생(현 성공회대 교수)과 케임브리지에서 의학사를 연구하고 있던 신동원 박사(현 KAIST 교수)를 만났다. 우리 셋 모두 보건의료에 대한 공부를 했지만 접근방법은 모두 달랐다. 조 교수는 정책을 신 교수는 역사를 그리고 나는 철학을 도구로 삼았는데 이런 학문적 친구를 만난 것도 엄청난 행운이었다. 우리 셋은 런던과 케임브리지와 스완지를 오가며 느긋하게 학문적·인간적으로 교류하는 행복을 누렸다. 

하지만 귀국 후에 이렇게 한 공부로 밥벌이를 할 수는 없었다. 결국 새로 문을 연 일산 백병원 치과과장에 부임해 본업에 복귀했다. 다행히 인제대 의예과에 의료인문학이란 강좌를 개설해 배운 것을 학생들과 나눌 수는 있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치과를 그만 두고 보건의료와 관련된 인문학의 연구와 교육에만 전념하는 것이었는데, 몇 년 동안이나 학교 당국과 줄다리기를 한 끝에 마침내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에 인문의학 교실이 설치되었고 나는 그 교실의 주임 교수가 되었다.

되돌아보면 나의 인생은 치과와 나 사이의 불화의 연속이었다. 마지못해 치과대학을 다녔고 졸업 후에 잠시 그 직업을 사랑한 적은 있지만 결국은 떠나기를 갈망했고 지금은 그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상화해서 바라보는 입장에 있으니 말이다. 직업을 사랑하지 못했으니 치과의사로서는 실패한 인생인 셈이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좋은 의사가 되기를 원한다면 나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자신의 직업을 사랑하는, 의사여서 행복한 사람이 환자에게도 좋은 의사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동기들 중에는 정말로 치과를 사랑하며 치과의사여서 행복한 그래서 치과의사가 천직인 친구들도 많다. 하지만 나처럼 삐딱한 길을 간 친구도 많다. 일찌감치 치과대학을 그만 두고 사회학을 공부한 서울산업대 백욱인 교수, 의료정책과 의사학을 공부한 아주의대 이종찬 교수, 불교학으로 전향한 동국대 김성철 교수, 그리고 인지과학을 공부하여 미국 어느 대학에서 일하고 있는 유욱성 교수 등이다. 그들과 내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아주 일찍 치과를 떠났지만 나는 20년 이상이나 현업에 종사했다는 점일 것이다.

50을 넘긴 지금 또 다시 직업을 바꾸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회가 온다면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은 욕망은 있다.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은 세상과 나의 관계에 대한 발칙한 상상으로 시작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보이지 않던 세상의 다른 국면들을 볼 수 있게 되며 세상과 나의 접촉면을 넓힐 수도 있게 된다. 나는 그것이 세상과 친해지는 길이고 세상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상상은 변화의 시작이다. 여러분도 이따금씩 발칙한 상상으로 이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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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주 2008-10-16 17:55:03
발칙한 상상을 했더라도 실행에 옮길 용기가 모자랐던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 개업 몇 년 후 목사가 되겠다고 무작정 서울로 갔다가 하루만에 내려온 적이 있는데, 목사 안 되기는 잘했지만 치과를 떠나지 못한 것은 능력과 용기 부족

장현주 2008-08-13 01:43:30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건치를 말하는 것보다 나를 말하는 것이 건치를 더 잘 보여준다는 느낌이 들어요. 40에 떠나셨다니 저도 뭔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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