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 전쟁? '인민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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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 전쟁? '인민의 전쟁'
  • 송필경 논설위원
  • 승인 2008.12.01 17: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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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제1장 역사진실관-(9)

본 연재글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 연재글 첫회부터 읽기를 당부드립니다. (편집자)

9
『‘전략촌’은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시행한 가장 중요한 정책이었다. 우리는 베트남전쟁을 게릴라전쟁이라고 부르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전 국민이 싸웠던 ‘인민의 전쟁’이라 부른다.

베트콩은 이렇게 주장했다. “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었듯이 우리는 인민을 떠나 살 수 없다.” 그러자 미국은 “그래 좋아, 내가 물을 다 퍼내서 물고기를 잡겠어.” 이것이 전략촌 정책이다.

전략촌베트남 농촌은 우리와 비슷하게 비슷한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촌락을 이루며 살았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씨족적인 촌락들을 천 가구씩 모아 전략촌에 수용하는 것이다.

이 전략촌은 마을이라기보다 수용소처럼 만들었다. 전략촌 주민의 명부를 만들어 아침에는 들판으로 내보내고 저녁에 다시 이곳에 집어넣는 것이다. 정시에 복귀하지 않는 사람은 사살해도 무방하다는 지침을 내린다.

베트콩은 전략촌을 파괴하려고 하고 미국은 이곳을 어떻게든 사수하려고 했다. 한국군이 베트남전쟁에 참가하고서는 전략촌 사수가 가장 중요한 임무의 하나였다. 한국군은 서부 산악지대나 접경지대에서 전투를 거의 하지 않았다.

공군력을 갖고 있는 미군이 주로 전담했다. 한국군은 주로 중부지역 평화지대인 마을과 해안지역에 주둔하였다. 한국군은 전략촌 사수가 아주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였다.

실제 전략촌을 사이에 두고 한국군과 베트콩은 계속 서로 교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국군이 들어온 초기 시절인 1966년 초에 주둔지를 결정한다.

▲ 마을을 마치 포로 수용소 처럼 만들었다.

여기는 유격전이기 때문에 주둔지를 결정하면 부대 주변 마을과 사람들을 다 소개해야 한다. 부대 주변에 사람을 두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전략촌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베트콩은 파괴하려고 하고 한국군은 사수하려고 한다.

한국군이 많은 양민을 학살하게 되는데 이 유형 가운데 전략촌 학살이라는 것이 있다. 전략촌을 사이에 두고 서로 교전이 일어나게 되어 만약 한국군이 한두 명 사상이 생기게 되면 그 다음날 본보기로 전략촌의 사람을 열 명 정도 끄집어낸다. 그리고 보복으로 죽인다.

그러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가 하면 베트콩들은 우리가 한국군을 건드리면 무고한 자기들의 인민들이 죽게 되고, 주민들에게는 어떤 공포나 베트콩을 도우면 너희들이 이렇게 된다는 심리적인 공포를 주었다. 나중에 당시의 베트콩 기록을 보면 되도록 웬만하면 가급적이면 한국군과 교전을 피하려 했다고 한다.』

마을을 마치 포로 수용소 처럼 만들었다.전략촌 정책(Strategic Hamlet)이란 게릴라가 아닌 순수한 양민들만 전략촌이라 부르는 철조망으로 둘러친, 바깥과 고립된 마을에 몰아넣고 ‘마을 밖은 모두 게릴라’라는 발상이다.

지엠은 농촌 주민을 힘으로 다스리기 위한 주민 강제 이주정책만은 적극 수용해서 1962년 봄부터 전략촌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1만1,300여 개에 달하는 전략촌을 설치하고 이곳에 농촌 주민을 억지로 집어넣어 이들을 철저히 감시한다는 발상이었다.

그리하여 1961년 4월부터는 ‘평정계획’이 시작되었다. 농민을 강제적으로 집단수용하는 전략촌 설치는, 지엠이 군부 쿠데타로 죽은 1963년 가을까지 전국적으로 8,979촌에 달했다.

베트남 인구의 4분의 1에 달하는 430만여 명이 이곳에 수용되었다. 그러는 동안 수백 개에 이르는 남베트남의 전통 마을이 파괴되고 주민들은 군대의 철조망 안 전략촌으로 옮겨졌다. 그렇게 하면 마을 주민들이 민족해방전선의 전사들 - 오로지 외국인들의 지지만 받는 남베트남 정부에 대항해서 투쟁하고 있는 게릴라들 - 을 돕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상 때부터 살던 집에서 쫓겨나 포로수용소와 같은 강제집단수용소로 이주한 것은 농민의 반정부 감정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베트남의 마을들은 수 세기 동안 공동체로서, 자기들끼리 스스로 다스리며 마을을 이끌어 나갔다. 저수지와 논을 돌보거나 둑과 제방을 관리하는 것은 언제나 집단적인 힘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빽빽한 대나무 울타리로 에워싸인 오래된 마을 안에서 촌로들은 모여서 논의하고 세금을 거두고 분쟁을 해결하였으며, 도깨비 전설과 지난날의 영웅을 떠올리게 하는 사원은 얕은 진창과 벽돌집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미국의 침략으로 베트남 사회의 이러한 기초 단위가 파괴되자 삶의 터전을 박탈당한 침울한 피란민들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자기 자신, 혹은 자신의 어머니와 누이들을 의기양양한 침략자에게 팔아넘기거나, 아니면 민족해방전선에 참가하기 위해 밀림 속으로 잠입하는 것뿐이었다.

 농민들은 전략마을에 끌려가 복종하기보다는 민족해방전선 혁명대열에 가담하기를 선택했다. 민족해방전선의 군사력은 무럭무럭 커져만 갔다.

전략마을 정책은 처음에는 민족해방전선의 활동에 상당한 걸림돌이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지엠 정권에 대한 농민대중의 저항의식을 심화시켰다.

민족해방전선은 전략마을을 슬기롭게 이용하였다. 전략마을의 경비는 현지 주민들로 구성된 민병대가 맡았는데 지극히 허술하였다. 민족해방전선은 밤마다 이곳으로 스며들어 사람들을 모아놓고 소위 ‘사상교육’을 하거나 남베트남 정부에 협조한 ‘부역자’를 본보기로 처형하는 활동 무대로 삼은 것이다.

 20만 명에 불과한 정부군으로 수천 개의 전략마을을 모두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또한 전략마을은 민족해방전선의 새로운 요원들을 위한 훈련기지였다. 그리하여 전략마을은 농민들 자신과 민족해방전사들에 의해서 대부분 파괴되었다. 결국 전략마을 계획은 지엠 정권의 붕괴로 좌절되었으며, 민족해방전선과 민중을 분리하려는 노력은 아무런 성과를 남기지 않았다.

미군 사령부는 “베트남인들을 전략마을에 다 집어넣어라. 그리고 전략마을 밖은 전부 자유발포지역이다.”라고 설정했다. 이것은 전략마을 밖 아무데서 아무나 다 쏴 죽여도 된다는 것을 뜻했다. 베트남전쟁은 적을 찾아서 죽이는 게 아니라 보이는 대로 죽이는 초토화 작전이었다.

송필경(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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