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렌트가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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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렌트가 필요한가?
  • 박한종
  • 승인 2004.10.28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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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욱 강사의 아렌트 강좌를 듣고

10월 19일, 아렌트 강좌를 들었다. 건치의 강좌로는 그래도 많은 임원들이 참석했다.

아렌트라는 인물 자체가 청중에게는 낯설어, 강좌는 아렌트의 소개부터 시작해 그간의 저작들을 시간순으로 검토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전체주의의 기원>을 통해 나치와 소비에트의 현실사회주의가 가지는 전체주의적 특성, 그리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나타나는 악의 진부함(또는 평범성) 등….

마지막으로 아렌트 정치사상의 특징인 정치적인 것의 고유성을 노동 및 작업에 대비해 설명하였고, 아렌트 사상의 전개로 사회(적인 것)와 정치적인 것의 구별에 대한 강사의 해석이 뒤따랐다.

연속된 문답을 통해서는 하버마스와 아렌트의 비교, 의사 소통적인 아렌트 사상의 한계 등이 지적되었다.

강좌는 시간의 불충분함으로 인해 충실하지는 못했다. 물론 내용의 어려움은 강사의 노련함으로 많이 커버되기는 했으나, 아렌트 사상의 현재성에서 중요한 연대의 문제는 교재에는 있었지만 강의서에는 누락돼 아쉬움이 남는다.

왜 아렌트가 필요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 글은 강좌에서 자유롭게 아렌트 자체를 생각해 보려한다.

아렌트의 정치사상의 특징은 이전에 정치가 가지고 있는 관념을 벗어나 정치의 고유함(정치적인 것)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노동, 작업, 행위로 구분하고 있다.

노동이 생존을 위한 활동으로 즉각적이며 필수적인 소비의 대상을 생산하는 것이라면, 작업은 실용적이기는 하나 내구적인 성경을 지닌 물건(내 생각으로는 물건뿐만 아니라 제도도 어느 측면에서는 작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들을 생산해 내는 것이라 하겠다.

그에 반해 행위는 언어적인 것,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언어의 본성이 그렇듯 표현적이고 공동체적인 것이라 하겠다. 정치는 바로 이 범주, 행위에 속하는 것이다. 정치는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이며, 또한 이는 공동체적인 것이기에 이는 위계적인 것이 아니라 복수(複數)적인 것이다.

이 규정을 통해 우리는 정치적인 것의 고유성을 볼 수 있다.

시민사회단체라는 조직이 가지고 있는 구체화되지 못한 정치(들)에 대한 관점과는 다른 시각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구체화되지 못한 정치(들)의 몇 가지를 들어본다면, 정치는 계급투쟁, 집단간의 갈등의 과정이라 보는 것이 있을 것이고, 정치는 세계를 변화(변혁)시키는 것이라는 것(더 정확히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정치란 생각도 있을 것이며, 정치는 일상과 괴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속에서 실천되는 것이라는 생각 등도 있을 것이다.

내가 받아들이는 아렌트의 정치적인 것은 이런 것들과 다르다(틀린 것이 아니다).

계급 투쟁의 물질적 이해 다툼이 정치를 규정할 때 정치는 인간의 복수성을 사장시키고 만다. 또한 정치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일 수는 있으나 정치는 어떻게 효율적으로 변화시키는가에 일차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또한 정치는 일상의 연장선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경제라는 어원적 의미로서의 가정)과는 다른 외부(공동체적인 관심)의 성격을 띄고 있다.

그러나 아렌트의 정치적인 것은 어쩌면 너무 순수한 것, 그렇기에 빈약한 것일 수도 있다.

아렌트의 개념이 현실로서의 물질적 이해-계급 갈등을 포용하지 못한다면, 정치가 세계의 변혁과 어떻게 관계되어야 하는가에 답하지 못한다면, 아렌트의 정치가 가지는 실천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하버마스의 기준이 비판적 역할이듯 아렌트의 그것 역시 무기의 역할을 하기에는 역부족일 듯하다.

그럼에도 아렌트를 받아들인다는 것, 아렌트의 현재성이 살아있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일 수 있다고 본다.

계급투쟁으로서의 정치가 이제 시민정치로 많이 대체되었기에 뒤의 두 가지만 살펴보면, 시민사회단체(건치)의 정치는 사회운동으로 사회의 민주화에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 자기(치과) 영역에서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다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이것 자체가 문제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다인 듯한 실천과 사고가 팽배한 것이 아닌가 한다. 더 나아가 시민사회단체(건치)내의 조직활동에서도 자기 부서 내의 일을 충실히 함으로써, 그 일만 충실히 한다면, 조직내에서의 자기의 실천이 충분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 아렌트의 의미로는 전혀 정치적이지 못한 그런 사고의 모습이 내부적으로 침투하고 있다는 것이다(물론 어떤 조직이 친목 조직이라면 정치의 문제는 사족일 것이다. 그러나 대중운동조직이라면, 정치는 그 조직에 너무나도 중요하다).

아렌트의 정치사상의 현재성이 가지는 중요한 장점은 시민사회에서의 정치에 있어 전략적 활동의 정치에 대해 연대적 활동의 정치가 가지는 가치를 높이 둔다는 점이다.

우리는 사회의 이러저러한 어떤 측면을 보다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다. 그 제도의 틀,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의 작성, 역량의 배치 등등... 그 속에서 일차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합리적 형상과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효율성이다(이는 아렌트의 작업의 범주가 될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사회의 구성원인 민중(단체)나 시민(단체)와의 연대, 즉 노동이나 작업에서 중요한 기준인 효율성이 아니라 행위로서의 복수(複數)적인 것이다. 민중단체와 시민단체와의 연대를 통한 공동체적 관심의 시각에서 하나의 조직(건치)는 자신(정체와 방식 등)의 변화분만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키고, 그 사회구성원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정치인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대중조직(건치)의 위상 역시 정치의 관점에서 시사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건치에 대한 치과의사대중의 동의를 높이는 것이 건치의 정치력이기는 하겠지만, 건치의 문제의식이 정치적인 것이라면, 동의력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폐쇄된 치과의사대중에 공동체적 관심을 환기하도록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의미 있는 일상적 실천을 통해 대중과 건치와의 접촉면을 넓히는 것, 그 자체는 훌륭한 것이 될 수 있겠지만, 정치적인 것은 일상적 활동 속에서 자연스럽게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는 다른 것, 일상적 관점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공동체적인 것이다.

건치가 아렌트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건치의 현 활동 방식을 재검토하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건치내의 정치- 건치의 부서 활동은 자체의 독자성을 가지지만, 자체의 완결성으로 이루어 질 수 없다. 건치 내에서의 의사소통을 통해 건치란 공동체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관심과 방향을 통해서 부서 활동은 보다 생산적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 될 것이다.

건치와 대중- 건치와 대중간의 관계에서 건치는 치과의사의 중심에 있는 것일 수 없다. 건치는 치과의사대중의 한계(이 한계의 외부는 시민사회나 민중일 것이다)에 있어야 한다. 건치는 자신의 대중을 이 한계에 계속 위치시키고 이 한계로 끌어들여야 한다.

건치와 사회- 건치는 우리 사회 속에서 끊임없이 연대하여야 한다. 그 연대 속에서 복수(複數)성, 그리고 공동체적 관심,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 관심의 대상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아렌트의 수용은 충분히 시도할만한 것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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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이 2004-10-29 13:12:55
그 자체가 하나의 완결된 유기체가 아니라 관계(relatoin)의 집합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관계의 꼭지점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겠구요.

건치와 정치,건치와 대중,건치와 사회가 늘 관계 설정의 고민위에 존재하듯이 건치 내부의 관계 설정에 대해서도 지금 논의가 진행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건치가 아렌트를 받아들이고 시도를 하는 작업이, 어떤 형태의 구체적 조직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까?

혹은, 그 작업의 성공이 필수로 동반하는 사항은 무엇입니까?
구체적 채현의 모습에 대한 힌트를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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