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語) 달리자] 건치 20년, 치과의사 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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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語) 달리자] 건치 20년, 치과의사 20년
  • 서대선 편집위원
  • 승인 2009.02.06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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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 수필 대장정] 24 - 서대선(단국 88 졸,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공동대표)

치과의사 20년, 건치 20년, 나이 먹을수록 환자에게 돈 받는 게 점점 힘들어진다.

1988년 얼떨결에 치과의사가 되고나서 첫 전화를 받은 게 전동균 선배 전화였다. 이러저러한 모임을 하려하는데 같이할 생각이 없냐고. 지금은 작고하신 면허번호 7번 방하숙 할머니로부터 강화도에서 재래식 치과기술을 배우고 있을 때였다. 아마 그때 건치 초기 모임이 준비되고 있었던 것 같다.

부산에서 6개월 월급생활, 성남병원에서 이종호 교수와 1년 동업. 코피 터져 가며 그때 배운 구강 외과적 기술들이 지금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때 이런 농담도 했다. “이종호 샘은 나중에 서울대 치대 병원장하세요. 나는 치과의사협회장 할게요”

근데 지금 건치회장이 됐으니 방향이 많이 틀어지긴 했다. 전국 지도를 펼쳐놓고 개업지를 물색했다. 결론은 공단지역이었다.

당시 동기인 김래영 샘과 지역의원 비스무레한 공동개원을 했다. 지역운동과 전문가운동을 병행한답시고 인천 최초(?) 공동개원을 한 것인데, 제대로 한 게 하나도 없었다. 인천민중연합이라는 단체에 가입해서 진료 후 지하철에서 찌라시도 돌리고, 당시 인천지역 노동운동가 출신 위장취업자들의 치료를 염가에 해주기도 했다.

소비에트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만세를 부르고 있을 때, 절친한 민중연합회원인 박철규 동지가 자살했다. 그때가 건치 서경지부 문화국 막내회원이었을 때다.

건치 일에 매달려 정신 줄 놓고 있는 사이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 당시, 송학선, 한영철, 김옥희 선배님들을 위시해서 많은 건치 선배, 동료들이 오셔서 위로를 해 주셨다.

서경지부를 떠난 후엔 건치 인천지회를 만드는데 주력했다. 김성룡, 김용성, 김재아, 김유성, 김방수 등 참으로 인간미 넘치는 좋은 친구들과 2년에 걸친 예비모임 끝에 건치 인천지회를 창립했고, 몇 년 뒤 정식으로 인천지부로 승격되었다.

인천지부에 안착한 나는 사업국장으로 6년여를 보냈다. 수불사업과 빈곤층 공부방, 탁아방 검진 및 진료사업을 하는 것이 나의 주된 일이었다. 사실 그다지 열심히 하지는 못했다. 건치 중앙에서는 편집부에서 만평, 삽화 그리는 일을 했고, 건치신문사가 설립되고는 ‘김원장 이야기’를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기획부장 이셨던 김옥희 누님이 어느 날, “너 스토리 만화 한번 연재해 보지 않을래?” 해서, 당시 만화를 연재하고 있던 프로만화가 대신에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게 됐다. 아마추어 스토리 만화작가로 데뷔(?)한 셈이다.

그림을 그리면서 한편으로는 전치 중앙에서 해직교사후원회(전교조후원회)로 파견나간 해직교사후원회 간사로 3년 정도 일했다. 이것도 열심히 하진 못했지만, 김영삼 문민정부 들어서면서 전교조 해직교사 대부분이 복직되었다. 반성문을 쓰면 복직시켜주겠다는 말에 많은 전교조 선생님들이 반대했지만, 요식행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학교 밖이 아니라 현장에서 참교육을 실현하시겠다며 거의 대부분이 복직하셨다. 해직교사 후원회는 존립근거가 없어져 자연스레 해산 되었다. 후원회 역할은 미진했지만, 전원 복직 될 때 까지 조금이라도 힘이 돼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근데 요즘 이명박 정권 하는 짓을 보니, 또다시 해직교사 후원회가 필요해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기도 하다.

휴식도 잠시, 월간 말지에 “수돗물 불소화는 원자폭탄 제조의 일환”이라는 ‘전대미문’의 기사가 실리면서부터 장장 7년간의 뜻하지 않은 ‘공부생활’로 접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수불과 관련된 거의 모든 책들을 미친놈처럼 뒤지고 다녔다.

결과론적 얘기지만, 수불 때문에 인생 공부도 많이 했고, 내 자신, 내면의 가치관을 키우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수불 관련해서 김광수 선배님, 박한종 샘, 박덕영, 공형찬, 김유성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나이 40에 들어서자 나는 점점 초조해지지 시작했다. 더 깊은 공부와 사색이 필요했었고, 어떻게 하면 행복한 치과의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과 답변이 필요했다. 속초에서 근 2년을 쉰 것은 그 때문이다.

속초에서 생활비가 떨어질 때 쯤, 서울로 올라와 서울시립동부병원에 취직했다. 의도한바 대로 돈 신경 쓰지 않고 환자 진료만으로 행복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게 웬걸, 취직하자마자 이명박 시장의 공공기관 민영화 방침에 따라 시립병원 민간위탁문제가 터져 또 뜻하지 않은 일에 엮여들게 되었다. 민간위탁, 의료민영화 저지, 공공의료 강화라는 보건의료운동에 본의 아니게 합류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서울시립병원 민간위탁 저지에 큰 역할을 한 김용진 샘과 우리 건치, 보건의료단체연합과 김정범 샘, 건강세상네크워크 조경애 대표, 전노협(전국노점상협의회), 민노당 동대문구지구당, 노숙자협의회가 아니었다면 하나뿐인 일반종합병원으로서 시립병원이 서울에서는 영영 사라질 뻔 했다.

민간위탁이 결렬되고 시립병원이 공사형태로 전환되자 내가 해야 할 일은 최소한 공공병원의 치과가 민간병원에 비해 환자도 많이 보고, 친절하며, 교과서적 진료를 통해 지역주민뿐만 아니라 노숙, 장애, 생활보호대상자들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 했다.

이거 ‘착한사람 컴플렉스’ 아니다. 내 스스로에게 구체적 데이터로서 증명해보여야만 했다. 최소한 우리나라에서도 공공병원이 서비스, 친절도, 의료의 질, 모든 면에서 민간병원보다 우수하다는 걸 보여주어야 ‘공공의료 강화하자’는 구호가 현실에 더 와 닿지 않겠는가.

아무튼 5년 동안 죽어라고 일했고, 구해달라는 임상 치과의사는 병원 측에서 구해주지 않았다. 결국은 왼쪽 어깨 쪽 견경완 장애와 통증, 과로와 격무에 시달리다 견디지 못해, 부천 복사골 치과로 도망 나왔다. 서울시립병원 재직시절에 치계 내 성폭력 사건을 접하고, 여성성의 중요성과 여성주의 운동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하기도 했다. 곽정민, 신순희, 정달현 샘들께 감사드린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인지. 개업과 동시에 불어 닥친 한국경제의 위기, 환자 수 줄고, 수입 줄고, 금값 올라가고, 이명박 정부에서 잘못 관리된 환율정책으로 크라운 골드 값이 오르락 내리락 하니, 진료에 심대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돌겠다. 이제 또 머리 싸 메고 공부해야 한다.

경제 공부. 인간의 역사 이래로 ‘발등에 떨어진 불’이 꺼진 때가 없듯이, 내 발 등에도 불이 꺼진 적은 없었다. 그 불을 끄려할 때 마다 내가 건치인인 것이 위안이 된다. 건치는 나에게 이런 것이다. 어렸을 때 동네 어귀를 돌아다니다 위급한 상황에 ‘쫑’ 한마디 하면 내 주변을 빙빙 돌다가 손살 같이 달려와서 날 지켜주는 백구, ‘어디선가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 적을 사정없이 무찔러주는 짱가’ 같은 존재.

치과의사가 된 후, 20년이 지난 작년 초에 면허번호 12번 할아버지 치과의사의 치아를 치료해드린 적이 있다. 80후반 힘없고 가련해 보이는 할아버지 치과의사께서 얼마나 겸손하시든지...

요즘 따라 이상하다. 경제 탓만은 아닐 터, 나이 먹을수록 환자에게 돈 받는 게 점점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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