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김대중 씨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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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김대중 씨를 아시나요?'
  • 김기현
  • 승인 2009.08.19 17:5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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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0년에는 당시 제가 다니던 전남대학교에서 전대협 출범식이 있었습니다.
 
당시 출범식을 막기 위해 전국의 경찰병력은 광주로 총집결되었고, 전남대학교 주위는 경찰의 삼엄한 경비로 출범식에 참가하려던 학생들을 막아 원천봉쇄하려 하였습니다.
 
서울 대전 등 타지역에서 오던 학생들은 장성과 광주 중간에서 기차를 세워 내린후 시내버스를 타고 오기도 하였고, 그 과정에서 버스기사가 중간에 버스역을 들르지도 않은채, 전남대학교 인근까지 태워주는 등, 경찰은 막고, 시민과 학생들은 합심해 그걸 뚫고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정문, 후문에서는 거의 매시간 학생들과 경찰들은 화염병과 최루탄을 던지고 쏘아대며 대치하였고, 학교는 말 그대로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도 그 대열속에 있었고, 출범식이 열리기로 한 하루전날(아마 5월 18일이었을겁니다) 경찰들이 학교를 진입할거라는 소식이 있어 정문앞에 바리케이트를 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스크에 빨간 띠를 두른 쇠파이프를 들고 드럼통을 굴리면서 정문앞으로 가던 나를 향해 어떤 여자가 갑자기 '헬로우'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진기와 수첩을 든 그 여자(동양계)는 누가봐도 한눈에 기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 옆에 있던  또 다른 여자(통역)가 '사진을 찍고, 인터뷰가 가능하느냐?, 이분은 홍콩에서 온 00신문의 기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시위대가 사진에 찍히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던 때라 조금 망설여지긴 했지만, '우리나라 기자도 아니고, 마스크 쓰고 찍으면 되겠지'라는 생각에 혼쾌히 승락을 했습니다.
 
당시 그 기자는 저를 보고 반정부주의자처럼 보여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전대협은 당신에게 어떤 조직이냐, 출범식이 개최될 것 같으냐, 노태우정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등등을 물었습니다.
 
20세를 갓넘긴 젊은 청년학생의 패기로 씩씩하게 모든 물음에 답했다고 당시에는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자가 마지막에 한 질문이 바로 '김대중씨를 아느냐,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거였습니다.
 
뜬금없는 질문에 말문이 막혀 좀 주저하다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그도 우리와 함께 했으면 좋겠다'라는 요지의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다시 제가 '근데 왜 김대중씨 이야기를 하느냐'고 하니까, 그 기자 왈 '김대중씨는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 할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마 그때 인터뷰 기사가 00신문에 실렸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이유가 바로 김대중씨에 대한 외국인의 시각이 강렬히 제게 남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2.
 
1992년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였습니다.
 
그해 대선은 민자당 김영삼과 민주당 김대중의 일대 격전이 벌어진 해였습니다.
 
당시 민주운동단체, 시민단체가 함께 민자당 김영삼 후보에 맞설 '범민주 단일후보'로 민주당 김대중씨를 추대하고, 그의 당선을 위해 총력을 집중하였습니다.
 
'범민주단일후보'를 지지 지원하기 위해 광주전남 지역 대학생들이 타지역으로 가서 여러가지 활동을 벌이기로 하고 지원단을 모집하였고, 저 역시 지원을 하였습니다.
 
뜬금없이 12월에 15일씩이나 농활을 간다는 자식놈에게 말한마디 없이 알았다며 보내주신 부모님을 뒤로 하고 제가 간 곳은 충북의 옥천군, 보은군, 영동군이었습니다.
 
그 지역에서 농민회, YMCA, 민청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배들, 그리고 그 지역출신의 대학생들과 함께 낮에는 김대중씨 공식 선거원으로 선거운동을 하였고, 밤에는 '범민주단일후보' 당선을 위한 여러가지 선전활동을 하였습니다.
 
그곳에서의 김대중씨에 대한 정서는 광주의 그것과는 사뭇달랐습니다.
 
옥천군의 어느 시골장터에 가서 김대중씨 선거홍보물을 나눠주기 위해 약국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에는 촌로 너댓분이 사랑방처럼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습니다.
 
제가 들어서자 저를 빤히 바라보던 그 촌로들은 제가 내민 김대중씨의 선거홍보물을 보고서는 약국이 떠내려갈 듯 큰소리로 '이런 빨갱이새끼가 없네, 여기가 어디라고 빨갱이 홍보물을 들고 들어오는 거야'하면서 막 소리를 치는 거였습니다.
 
말빨과 호기라면 어디에 내놓아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 당시, 저는 단 한마디를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습니다. (이전까지 그곳에서는 김대중씨에 대한 다소 못마땅한 반응은 있었지만, 그런 격한 반응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분들의 호통에 주눅이 든 것이 아니라, 제가 전혀 예상치 못한 황당한 상황에 맞닥뜨린 '급작스러움' 때문이었을 겁니다.
 
저에게 있어서 한국사회와 사람들에 다시 인식하게 되는 조금은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김대중씨는 90년대에도 여전히 '빨갱이'였던 겁니다.
 
3.
 
1997년 또다시 대선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신안군 장산도라는 곳에서 공보의 1년차 생활을 하던 때였습니다. 장산도는 김대중 전대통령의 고향인 하의도 바로 옆에 있는 섬으로써 하의도보다도 더 작은 조그만 섬이었습니다.
 
당시 하의도에는 근무를 하시던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김대중씨의 대통령 당선은 거의 따논 당상 같은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대선 일주일전부터 목포와 하의도를 잇는 배편에는 방송차량과 사람들로 바글바글했고, 이번에는 꼭 김대중씨가 될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신안 사람들에게는 널리 퍼져있을때였습니다.
 
저와 같이 근무하던 의과선생님도 이번에는 기어이 김대중씨가 되어야 한다면서 선거일에 광주까지 가서(당시 의과선생님은 주소지를 섬으로 옮기지 않은 상태여서) 투표를 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저와 함께 점심을 같이 먹던 면직원, 경찰서 직원들도, 이번에는 선생님이 꼭 될 거라고 하면서 다들 활기찬 모습들이었습니다.
 
그 섬에서 김대중씨를 찍지 않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불경스러운 행동'이었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저는 권영길씨를 찍었습니다.
 
투표 당일 저는 면사무소에서 기표를 하고 몇번을 접어 투표함에 넣으면서도 가슴이 두근두근했었습니다.  투표참관인으로 있던 면직원들이 봤을리는 없지만, 왠지 김대중씨를 찍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 안된다는 두려움때문에 눈길조차 마주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당시 신안 주민들에게 있어서 김대중씨는 이심전심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논리도 이성도 아닌, 말그대로 교감, 그 자체였던 것 같습니다. 
 
이렇듯 김대중 전대통령은 저에게 여러 모습으로 비춰졌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동시대를 살았던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러했을 겁니다.
 
그런 그가 오늘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의 죽음이후에 그는 어떤 평가를 받을까요? 한마음으로 그를 바라볼 수 있을까요?
 
어렵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그렇게 되길 소망해 봅니다.
 
영욕이 많았던 삶을 뒤로 하고 이제는 영면하시길 빕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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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iya 2011-07-29 12:30:51
And I thought I was the sensblie one. Thanks for setting me stra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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