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읽기]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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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 이주연
  • 승인 2004.04.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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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에매 소설. 이세욱 옮김)


오늘은 일요일, 주산회 회원들과 북한산에 올라갔다.
산위에선 다른 게 있다. 육칠십대 노인들이 뛰어다니고, 사오십대는 속보로 걸으며, 청년들은 식은 땀을 흘린다.

약간 비만형인 우리 아이는 회원들의 격려에 힘입어 바위 위를 기어올라간다. 아이는 어제 광화문 촛불시위에서도 신나했는데, ‘다음엔 가족이 없는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는 주산회 회장님 말씀에도 박수를 보낸다.

이번 대통령 탄핵건이 한국의 연령, 학력, 지역, 기득권 등의 갈등을 기본 축으로, 다양한 이분법적 코드(포용력/외골수, 미친 코메디/정상적인 분노, 엘리트주의/포풀리즘 등)를 곁가지로 하더니, 이제 막을 수 없는 시대적 대세로 탄핵의 벽을 뚫고 있지 않은가.

‘벽을 드나드는 남자’는 아주 짧은 이야기이다.
주인공 디티유월은 벽을 통과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꺼림직하게 여겨 처방받은 약조차 서랍에 넣어둔 채 잊고 지낸다.

등기청 하급직원이던 그는 레퀴예 과장이 오면서, 골방으로 쫓겨나는 모욕을 당한다. 그가 벽을 통과해 과장의 방에 얼굴을 내밀기를 반복하자, 과장은 정신병원으로 실려간다.
이를 계기로 그는 벽을 드나들 수 있는 능력을 자기 한계를 뛰어넘는데 사용하기로 결심한다.

먼저 매일 밤 은행이나 보석가계, 부잣집의 재물을 털며 ‘가루가루’라는 가명을 써놓아 대도로 돈과 명성을 얻는다. 등기청 동료들이 자신이 ‘가루가루’임을 믿어주질 않자, 일부러 체포된 그는 몇 번에 걸친 탈주에도 성공해 그 능력을 과시한다.

세간의 명성에 회의가 들 때쯤 그는 한 여자에게 반한다. 그녀의 남편은 의처증에 바람둥이로 밤마다 그녀를 가두고 밖으로 나간다. 디티유월은 그녀 집 벽을 통과해 그녀와 사랑을 나눈다. 이튿날 두통을 느낀 그는 서랍 속의 알약을 먹게 되고, 그녀와 다시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고 나오던 순간 능력이 사라져 벽 속에 갇혀버리고 만다.

이 책의 원제는 ‘르 파스 뮈라유(Le passe-muraille)’다. ‘통과하다’는 뜻의 동사 ‘passer’와 ‘장벽’을 뜻하는 명사 ‘muraille’를 합쳐 만든 말로 직역하면 ‘벽을 통과하는 사람’이다.
난 이 해석이 더 좋다. 왜냐면 나도 나름대로의 한계 상황 속에 갇혀있다고 느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소박하게나마 그 벽을 통과하고 싶다. 통과하다보면 그것이 길이 되어 또 다른 미로속에 갇히고, 그러다 에너지가 소진돼 벽 속에 갇히면 어떠랴, 누군가는 그 벽을 더 가뿐이 통과하게 될텐데….

이주연(세브란스 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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