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인터뷰] 나의 삶을 밀고 온 것은 조국에 대한 사랑과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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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인터뷰] 나의 삶을 밀고 온 것은 조국에 대한 사랑과 열정
  • 이인문 기자
  • 승인 2002.07.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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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인 최초의 HKF출신

 

개원의로 도전한 HKF 박사학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흠뻑 젖은 내의, 그저 마침내 끝마쳤다는 생각과 이제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뿐….”

임플란트의 메카인 스웨덴 예테보리 대학 HKF(Department of Biomaterials/ Handicap Research)연구소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은 설영택 박사는 유학생활 5년만에 학위논문이 통과된 순간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다. 갑자기 머릿속이 텅텅 비워져버린 느낌. 그리고 떠오른 것은 고마운 아내의 얼굴이었단다.

사실 수련과정도 밟아본 적 없는 개원의의 신분으로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HKF의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그가 쏟아부었던 노력과 가족들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자신조차 반신반의했던 유학생활. 긴장과 초조함, 그리고 온갖 스트레스를 떨치고 이루어낸 빛나는 성취.

더욱이 만성간염을 앓고 있던 몸으로 “가면 너는 죽는다”는 내과의사의 만류도 뿌리친 채 유학을 강행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HKF에서 쫓겨나진 않을까, 지병도 숨긴 채 연구에 몰두하다 쓰러져 “이렇게 삶이 끝나는가?” 아이들의 잠든 얼굴을 부여안고 울기도 했다.

그의 이력, 그리고 1990년 9월 17일

1980년 서울치대 입학, 1987년 졸업. 1990년 개업. 1997년 스웨덴 유학전까지 치과의사로서 그의 이력은 평범하다. 아니, 특별한 구석이 있다. 대학시절 소설가를 지망하는 문학청년이었던 그는 80년대 한국 학생운동의 한가운데를 온몸으로 관통하면서 정의로운 삶에 대한 열정을 배웠다. 학생운동을 통해 그가 터득한 삶의 원칙과 인간에 대한 믿음은 어려웠던 유학시절 내내 그를 버티게 해주었던 하나의 힘이었다. 창원에서 개업한 그는 지역 YMCA에서 활동하는 등 운동권과의 끈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역운동 선배의 ‘생활 속의 운동’이라는 말은 그의 화두가 되었다. 치과의사로서의 운동. 그것은 전문성의 확보였다.

그래서 그는 당시에는 선구적이었던 임플란트 시술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90년 7월 서울에서의 임플란트 강연.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와 수술기구. 이외 그가 구입한 두 세 권의 관련 서적.

“이만하면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었죠.”
그러나 운명의 9월 17일. 그는 지금도 그 날짜를 기억하고 있다. 새벽 3-4시까지 비디오테이프를 돌려본 후 맞이한 첫 임플란트 환자. 너무도 긴장한 그는 그 환자에게 어떻게 시술을 했는지 기억조차 할 수가 없었다. 수술을 마치고 위생사가 웃으면서 했던 말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지만. “선생님, 손을 덜덜 떨고 계셨어요.”

그 환자는 시술이 잘되어 지금도 잘 사용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지만 당시 그는 자신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내가 환자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나? 집의 구조와 설계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 없이, 못질하는 요령만 익혀가는 목수의 모습!’ 그는 어떤 이유로, 어떻게 임플란트가 실패하고 성공하는가를 알고 싶었다고 한다.

임플란트에 빠져든 10여 년

그는 다시는 그런 기분에 빠져들기 싫어 철저한 임플란트 공부를 결심한다. 관련 서적과 논문들을 샅샅이 훑어 읽고, 강연을 쫓아다녔다. 외국에서 연구하고 돌아왔다는 사람들도 찾아가 보고….

그러나 그는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한가지, ‘유학’뿐이었다. 개원의의 신분으로 유학을 결심한 것 자체가 모험이기도 했지만 그는 2년에 걸친 준비 끝에 유학을 떠난다. 1년 자격의 방문연구원의 신분으로.

“처음에는 그저 길면 2-3년 공부하고 돌아와 한국에서 열심히 임플란트 시술을 할 생각이었죠.”
그러나 그것은 그만의 생각. HKF의 교육체계는 한국의 그것과는 아주 달랐다. 커리큘럼 자체가 없었고, 스스로 목표를 잡아 혼자서 연구를 해나가는 방식이었다. 유학 한 달만에 처음으로 주임교수인 토마스 박사에게서 받은 숙제는 “논문 주제와 관련된 기발표 논문들을 정리해 6개월 후에 발표하라”는 것이 전부였다. 마치 바위산에서 떨어뜨려 살아남은 새끼만 키우는 사자의 교육방식이라고 할까? 너무나 막막한 과제였지만 이 지독한 과정을 거쳐 그는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스스로 자료들을 찾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그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했다.

그렇게 1년. 그런데 무언가 미진했다. 이대로 그냥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결국 그는 자신의 논문주제로 박사학위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이후부터는 고난의 연속. 까다로운 논문주제 때문에 결국 응용물리학과 교수인 유카 라오즈마교수 앞에서 논문주제에 대한 평가를 받고 나서야 지도교수의 허락을 받을 수가 있었다.

그 후 4년. 그는 지난 6월 7일 ‘Oxidized Titanium Implant와 골조직의 반응’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또한 그동안 피나는 노력과 연구 끝에 SCI 등재 저널에 7편의 논문을 발표(및 2편 제출)했고, 각종 학회 및 저널 초청강의 논문 5편, 학회발표 초록논문 7편 등을 발표하였으며, oxidized implant로 스웨덴 특허를 획득했고, 세계특허를 출원한 상태이다.

한국 임플란트계와 그의 역할

“한국 임플란트계를 들여다보면 너무 상업화에만 치우쳐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학문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이론과 연구성과들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지나치게 술식중심이라는 것이죠.”

97년의 통계자료를 보면 미국을 제외하고는 국민 1인당 임플란트 소비율이 세계 최고일 정도로 만연한 임플란트 시술에 비해, SCI에 등재된 저널에 발표되는 국내 임플란트 관련 논문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 이것이 그로 하여금 유학전부터 교류해왔던 건치 회원 등 개원의들을 중심으로 Evidence-based Implantology를 추구하는 ORI(Osseointegration Ressarch Institute,   회장 권재신)를 한국에서 만들게 한 이유이기도 하다.

“개원의들도 연구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재 ORI에서는 임플란트 관련 스페셜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어요. 1년간은 술식 습득과 임플란트 관련 논문 리뷰에 주력할 것이고, 이후에는 논문작업 능력을 배양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죠.”

물론 최종 목표는 ORI 회원들의 연구논문들을 SCI에 등재된 국제 학술지에 발표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한국 임플란트계의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것. 그 첫 성과로, 지난 3월 미국 AO 학회(달라스)에 네 편의 초록과, 국내저널에 세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또한 ORI와 함께 내년 임플란트 관련 대규모 국제강연과 International School in Implant Dentistry를 준비하고 있다.

오는 8월부터 HKF의 부교수 과정으로 새로운 연구활동을 준비 중인 설영택 박사를 통해 한국 임플란트계의 새로운 바람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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