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생크츄어리'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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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생크츄어리'를 위하여…”
  • 신영전
  • 승인 2010.01.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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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사] 비판과 대안을 위한 건강정책학회 신영전 이사장

이 글은 건강정책웹진 'Healthy Sphere' 2010년 1월호에 게재된 것임을 밝힙니다.

2010년이 2009년의 나날과 굳이 다른 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연속된 시간에 줄을 그어 365일마다 새로운 한 해를 만들어 냅니다. 이는 아마도 한 시기를 매듭짓고 새로운 각오로 새롭게 출발해 보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2010년은 어떤 해일까?

2010년은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의미 있는 해입니다.

경술국치 100주년, 한국 전쟁 발발 60주년, 4.19 혁명 50주년, 5.18 광주 민주 항쟁 30주년, 6.15 공동 선언 10주년 등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회고가 이어질 것입니다.

또한 현실적으로는 6월에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중간 평가적 성격이 있는 이 선거에서 국민이 누구의 손을 들어주느냐가 적어도 향후 3년, 길게는 10년 이상 우리나라 정책의 기조를 결정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2010년은 건강 정책사에서도 몇 가지 의미 있는 해입니다.

먼저 2010년은 의약분업, 건강보험 통합 10주년의 해입니다. 의약분업과 건강보험 통합은 우리나라 건강 정책사에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평가, 현재적 함의와 향후 과제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또 2010년은 국민건강증진종합계획 2010의 마지막 해이기도 합니다. ‘Health Plan 2010’은 우리나라 건강 정책의 구체적인 목표와 접근 방법을 천명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따라서 2010년은 지난 10년간의 성적표를 받는 해인 셈입니다. 지난 10년의 공과를 가리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영역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반성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Health Plan 2020’에 반영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2010년은 의료 민영화 정책의 본격적인 법제화와 시행이 이루어질 수 있는 시기입니다.

이명박 정부 건강 정책의 핵심은 ‘의료 민영화’입니다. 현재 많은 시민 노동 단체들이 이에 반대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찬반을 떠나 ‘의료 민영화’ 정책의 본격적인 시행이 가시화될 경우, 사회적 연대의 정신을 기초로 설계된 기존의 보건의료 체계, 건강보험 체계 질서는 무너지고 시장과 경쟁 중심의 새로운 체계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큰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 우리의 ‘생크츄어리’를 위하여

제가 몇 년 전 안식년을 보낸 보스턴의 집 근처에는 조그마한 ‘생크츄어리(sanctuary)’가 있었습니다. ‘휴양림’이란 말을 쓰지 않고 굳이 영어를 쓴 것은 ‘생크츄어리’에는 국역이 담지 못하는 ‘안식처’, ‘피난처’ 등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건강 정책사의 중요한 시기를 맞아 우리 학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갑자기 ‘생크츄어리’란 단어를 꺼낸 것은 우리 학회가 건강 정책 부문의 ‘생크츄어리’가 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학회는 많은 학자들의 성찰의 공간, 때로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힘을 충전하는 휴식의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학술 영역의 튼튼한 어린 꽃씨들을 키워 세상으로 내보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생크츄어리’의 가장 큰 임무는 바깥의 위험과 소란으로부터 이 ‘생명과 성찰의 공간’을 ‘지켜 내는 일’입니다. 하지만 사익을 앞세운 거대한 정치권력과 대자본으로부터 학문의 독립성을 지켜 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개발의 불도저 소리가 강산 전역에 울리고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따라서 ‘생크츄어리’를 지키는 일은 때때로, 아니 자주 개개인의 비장한 결의와 헌신, 그리고 다른 이들과의 견고한 연대를 필요로 합니다.

하여 2010년 새해를 맞이하여 건강정책학회 회원과 학회에 관심을 가지시는 모든 분들에게 두 가지를 제안합니다.

첫째, 우리의 생크츄어리를 지키고 풍성하게 해 주십시오.

생크츄어리를 지키고 풍성하게 하는 데 묘약은 없습니다. 오직 회원 분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자리 지키기가 필요합니다. “괜히 나만?”하는 마음보다는 “어떻든 나라도”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둘째, 1인 1공부방(연구 공동체)과 연구 네트워크를 제안합니다.

훌륭한 정책은 훌륭한 연구를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훌륭한 연구는 몇몇 유능한 학자가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이를 만들어 내는 기름진 토양이 필요합니다.

저는 불교도는 아니지만 “당신이 앉은 곳에서 정토(淨土)를 세우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법정 스님의 “홀로 우뚝 자기 자리에 앉으라.”는 법어도 아마 같은 뜻이라 생각합니다. 학자가 만들어야 하는 정토는 치열한 정진과 토론이 있는 연구 공동체가 아니겠습니까?

구성원의 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2~3명만이라도 함께 스스로 관심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를 가지고 연구 공동체를 꾸려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미 몇 개의 초동 모임이 시작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건강정책학회는 이들 연구 공동체들을 지원하고 서로 연결하는 일에 앞장설 것입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것처럼 1920~30년대 암울한 시기, 식민 지배의 압제 중 잠깐 열린 공간 속에서 서울에만 1000여개의 공부 모임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저는 이 공부 모임이 수많은 독립 운동가를 길러내었고 이후 독립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확신합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시점에 너무 비장한 이야기가 길어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버드 대학 레빈스(Richard Levins) 교수 말대로 “건강을 추구하는 것은 영구적인 과정”이며 “건강이 각축장”이라면, 건강 정책학자에게 건강 정책학의 생명력을 늘 싱싱하게 유지하기 위한 ‘끊임없는 긴장’은 ‘숙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며칠 전 한겨레신문의 구석에 짧은 글이 하나 실렸습니다.

“지난 22일은 21년 전 브라질 환경 운동가 시코 멘지스(치코 멘데스)가 아마존을 지키기 위해 벌목꾼들의 전기톱을 온몸으로 막다가 대지주의 총에 맞고 숨진 날이었다. 그는 룰라와 함께 노동자당 창당을 이끈 인물이다……지구 어딘가에는 싼값의 고기가 들어간 햄버거로 배를 채워야 하는 사람이 있고, 최근 개봉한 제임스 캐머런의 <아바타>에서 ‘나비족’의 운명처럼 한 몸 같은 숲을 잃는 원시 부족도 있다. 아픈 지구를 보고도, 이성은 늘 무력하다. 이 별에서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새해를 맞아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신영전(비판과 대안을 위한 건강정책학회 신영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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