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원하던 16강 진출,
겨우.......했다.
전 세계에서 축구 좀 한다는 연봉 비싼 남자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팀 전체를 합쳐도 메시에 못 미치는 게 몸값인지 실력인지 모르게 위태위태하더니,
각설이 마냥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 온 경우의 수를 딛고 결국 .........했다.
어제 아침 신문 1면의 풍경.
“1승 1패를 안고 있는 허정무호가 16강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중원을 장악한 후 상대진영에 침투해 기습공격으로 수비진을 격침시키면서
나이지리아를 3패로 전멸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이다.“
역시나 공개적인 전쟁놀이가 분명하다.
금메달을 못 따도 일본만 이기면 모든 게 용서되는 올림픽 분위기를 봐도 그렇고 스포츠란 일종의 대리만족이다. 대명천지 21세기에 차마 대놓고 총질을 하기는 좀 거시기 하니, 인간의 본성이랄 수도 있는 공격 욕구를 대리만족시키기에 스포츠만한 게 또 어디 있을까.
그러니 일본이 박지성을 칭찬할 수는 있어도 우리에게 혼다 칭찬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일본과의 대결은 언제나 흥분이다. 뭐 우리만 그런가.
일본과 시합할 때 중국도 만만치 않게 광분하고
독일과 시합할 때 폴란드는 더하다.
피해의 기억은 오래토록 생생하다.
공개적인 국가주의 전쟁놀이, 원초적인 남성성의 향연인 월드컵. 나쁘지 않다.
평상시 뱃살을 고려해 멀리하던 치맥(치킨과 맥주)도 월드컵 기간에는 맘껏 즐기고, 상대팀을 저주하고 심판을 욕하고 음모론 주장까지, 마치 예비군복 입혀 놓은 30대 아저씨들 같다고나 할까. ‘오늘만큼은 삐뚤어져 버릴테다.’ 하는 결의가 느껴진다.
공격본능을 풀어내는 가장 건전한 통로, 스포츠!
저 쌍팔년도 올림픽을 유치하시고 최근에는 전립선으로 고생하신다는 꿀두피 각하의 3s 정책도 어떤 관점에선 아예 쓸모없지는 않았군 싶다.
월드컵에 ‘보통주부’ 정도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나는 경기결과가 아무리 궁금해도 두 시간이나 앉아서 축구를 보지는 않다. 거리응원이 재밌어 보이긴 하지만 다음날 피곤할 생각에 선뜻 발길이 안 떨어진다. 당연히 월드컵 기간 중 결방되는 드라마가 박주영의 자살골보다 더 속상하다.
그런 내가 월요일 저녁 북한과 포르투갈의 경기를 두 시간동안 지켜보았다. Again 1966을 외치며 북한이 이기길 바랐지만 사실 기대하지는 않았다. 축구를 봤지만 축구만 본 것은 아니었다. 이천수를 닮은 눈, 차두리 헤어스타일, 박지성의 투지를 가진, 재일동포 북한대표팀 선수의 드라마가 나를 몰입시켰다. 조국을 월드컵 본선에 진출시키는 것이 축구인생의 가장 큰 꿈이었다는 한 젊은이가 최고의 팀 브라질과 최고의 무대 월드컵에서 맞붙은 감격으로 흘렸다는 눈물이 내내 잊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국적의 아버지, 조선국적의 어머니, 한국국적이지만 북한 대표로 뛰는 정대세 선수. 식민과 분단의 한국 현대사를 오롯이 보여주는 그의 가족사와 성장사에서 그의 정체성을 짐작해본다.
“일본에서 사는 나를 번듯한 조선인으로 자랄 수 있게 해준 조선학교에 감사한다.”
“일본을 위해 뛴다면 나올 수 없는 힘이 북한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생겨난다. 정신과 정체성이 돈보다 더 중요하다”
물질만능의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남한에 어울리지 않는 건 확실하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축구 경기장에서 인공기가 게양되고 북한국가가 울려 퍼지자 아이처럼 눈물을 쏟아버린 정대세 선수를 보면서 함께 울어버린 사람이 나 말고도 여럿되리라.
건치가 평양도 가고 그랬었는데, 언젠가는 벽이 완전히 무너지겠지 하는 바람을 키웠었는데, 천안함 미스테리로 시절이 하 수상하여 이러다 전쟁이 나는 건 아닌가 싶을 만큼 남북 간의 벽이 다시금 드높게 두터워져 버린 이때, 정대세의 눈물은 어떤 장거리 슛보다도 통쾌하게 그 벽을 날려버렸다.
그의 눈물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같은 주파수의 떨림이 만든 공감은 멀리 퍼져나간다.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네. 아이 같은 눈물과 멋진 복근을 가진 동포가, 내 형제가 살고 있었네.
논리의 과도함에 지쳐가는 우리에게 가슴으로 먼저 다가오는 정답 같은 따스한 공감.
많은 세월이 흐르고 난 후, 대한민국 축구사에는 당대의 수많은 스타들이 이름을 올리겠지만 대한민국 통일사에 가장 큰 이름으로 남을 축구 선수는 어쩌면 정대세선수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이룬 것은 세계 16등도 아니고, 4등도 아닌 그저 본선진출일 뿐이지만 축구공은 둥글고 어디로든 굴러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니까.
오늘도 북한 대표팀 선수들을 태극전사라고 일기에 쓰는 초등 2학년 아들에게, 북한 국기인 인공기에는 태극무늬가 없으니 태극전사가 아니라고 설명하는 것도 이젠 구차하다. 좀 더 설명하기 쉬운 세상이 오기만을 그저 바랄뿐이다.
신순희(건치신문 논설위원, 인치과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