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환갑 맞은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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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환갑 맞은 한국전쟁
  • 송필경
  • 승인 2010.06.24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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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사건! 60년 전 악몽을 되살리려는가

한반도를 보는 '두개의 렌즈'

시카코 대학의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그의 저서 『한국현대사』 서문에 “한국의 현대사가 모든 경험, 모든 사건, 모든 사실, 모든 낱말이 극단적으로 다른 두 개의 렌즈를 통해 굴절된 채 세계의 다른 어떤 국가에서보다 더 가혹하고 더 오래 지속한 이데올로기적 분열의 타격을 입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라고 썼다.

굴절률이 큰 렌즈는 실상을 왜곡해서 사물의 온전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래서 다른 렌즈로 본 상대의 시각을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5·16을 군사혁명으로 보이는 렌즈가 있는가 하면 군사쿠데타로 보이는 렌즈가 있다. 혁명과 쿠데타의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인데도 말이다.

내가 경험한 역사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다른 시각을 예로 들면 광주의 5·18일 것이다. 김대중 정부에 와서 5·18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을 했지만 조·중·동을 비롯한 극우 세력의 렌즈에서는 ‘북괴가 사주한 폭도들의 무절제한 저항’으로 보일 것이다.

이런 극단적 시각은 극단적 이데올로기 분열이 원인이며 이는 일제 식민지의 쓰라린 경험에서 비롯한 것임은 두 말이 필요 없다.

영원히 지속할 것 같았던 일본의 지배질서가 일순간 허물어지면서 한반도에 갑자기 해방이 찾아왔다. 해방 후 항의해야 할 때 복종한 친일파와 고통스럽게 저항한 항일파의 처지에 따라 건국에 대해 전혀 다른 열정을 낳았다.

우리 한반도는 인종과 언어가 동질적인 그야말로 단일국가로서 오랜 역사적 전통을 이어온 세계에서 이러한 유래를 찾아보기 극히 힘든 지역이다. 제2차 세계대전 승리의 두 주역인 미국과 소련 둘 다 이러한 한반도의 오랜 전통을 아무런 이유 없이 무시하고 나라를 남북으로 두 동강내었다.

북한은 아버지 세대의 나약함과 실패를 경멸로 바라본 아주 젊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좌익 민족주의자들이 똘똘 뭉쳐 미국이 그토록 싫어하는 혁명적 공산주의 길로 줄달음 쳤다. 이런 북한이 친일세력들에게 목숨만큼 소중한 재산을 몰수하는 끔찍하게 가혹한 방법을 쓰자 친일세력은 즉각 남한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미국은 공산주의를 공포에 가까운 혐오로 바라봤다. 미국은 그들이 관할하는 남한에서 반공이란 미덕을 갖고 있으면 어떠한 악행을 저질러도 너그럽게 대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딴 이승만은 사대주의로 보일만큼 친미적인 인물로 이런 역할을 아주 매끄럽게 처리했다.

국내 어떠한 기반도 없는 이승만은 한국인 민중이 증오한 일본인 밑에서 봉사하고 부귀영화를 누린 일제 협력자들을 모아 반공의 장막을 치도록 했다. 이러한 이승만의 남한에서 즉각적인 친일 청산이 일어나지 않자 많은 남한의 민중들은 화가 났다. 성난 민중은 비록 한국인들에게 생소한 사회주의를 강요한 소련의 힘에 의존하였지만 완벽하게 친일청산을 한 북한으로 시선을 돌렸다.

친일세력은 자기 재산을 빼앗는 공산주의를 증오하며 친미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항일세력은 친일을 감싸는 미국을 원수로 여기며 반미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38선은 지구상에서 가장 날카롭고 가장 비극적인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는 분계선이 된 것이다.

‘잊힌 전쟁’으로 기록된 참혹한 동족상잔

이데올로기 대립을 ‘냉전’이라 부른다. 전지구적인 냉전이 시작하기도 전에 분단된 한반도에 가장 먼저 냉전이 찾아왔다. 냉전이 격화하자 불씨만 보이면 폭발할 가스가 한반도에 가득 찼다.

38선에는 선전포고하지 않은 쌍방 총격이 끊이지 않았다. 1950년 6월 25일, 한반도 민족의 역사에서 일어난 최악의 사건인 전면 전쟁이 마침내 터져 버린 것이다. 건국에 대한 모든 열정적 기대는 악몽으로 바뀌었다.

한반도에서 3년간 3백만 명이 죽었는데, 10년간의 베트남 전쟁 동안 죽은 2백만 명 보다 훨씬 많으니 한국전쟁의 처참함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북한은 중국의 도움으로 남한은 미국의 힘으로 동족상잔하였던 것이다. 전쟁 중에 일어난 상호간 대량학살은 우리 민족사에서 씻을 수 없는 최대의 치욕이었다.

어떤 악몽보다 처참했던 전쟁이 3년 만에 휴전으로 끝나자 한반도의 온 강산은 불타고 황폐하고 피로 물들었고 도시에는 잿더미와 부서진 벽돌과 콘크리트 잔해만 앙상하게 남았다.

대량 살상과 파괴로 한반도가 산산조각 났지만 오직 메마른 이데올로기의 극단적 분열만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지구상 다른 모든 지역에서 벌써 끝난 냉전이 오직 한반도에만 오늘까지 뿌리 깊게 남아 있다.

한국전쟁은 외세의 격돌과 동족상잔이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으면서도 세계사에 어떤 감동이나 교훈을 남기지 못하였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마치 버려진 고아처럼 취급해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으로 기록하고 있다. (‘잊혀진’이라는 형용사는 우리 문법상으로는 ‘잊힌’이 맞다고 한다.)

턱없는 조작으로 시작한 베트남전쟁

미국은 1964년 8월 북베트남 통킹만에서 미군함 매덕스호가 아무런 이유없이 북베트남의 어뢰에 공격당했다는 충격적인 사건을 발표하였다. 이는 턱없는 거짓말로 사전에 계획한 치밀한 시나리오에 따른 것이었다. 이를 빌미로 존슨 대통령은 북베트남에 대한 대규모 폭격하겠다고 하자 미국 하원은 만장일치로 상원은 88:2로 승인하였다.

그러나 베트남 인민은 터무니없는 외세 침략에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남루한 공산주의자들을 곧바로 박살낼 것 같이 힘차게 달려든 미국이 빠져 나오기 힘든 수렁에서 허우적대고 있음을 깨닫기 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국민 자신들이 보아도 그 모습은 참으로 추악했다. 워싱턴 스퀘어 광장에는 양심적 지식인과 대중을 중심으로 반전의 메아리가 장엄하게 울렸다. 이 메아리는 대서양을 건너 유럽의 양심인들에게 까지 퍼졌다. 베트남 강산에 융단폭격을 명령한 존슨은 여론의 악화로 1968년 대통령 선거에 나서지도 못했다. 반전운동은 국제적인 연대로 발전하였다.

끔찍하게 가난하고 남루한 농업국가 베트남은 전쟁에서 인류역사상 최강의 산업국가 미국을 도덕적으로 물리적으로 완벽하게 패배시켜 미국에게 전쟁 책임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하였다.

세계의 양심세력들이 베트남 인민과 베트남에 동조하여 미국이 신봉하는 힘의 논리를 무너뜨렸고 미국 내 우익의 오만함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또한 다윗처럼 여린 제3세계 인민들에게 초거인 골리앗을 상대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호찌민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견문을 쌓기 위해 세계여행을 하던 중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때 호찌민은 물질적으로 풍부하고 민주주의가 정착한 미국이 세계의 미래를 주도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호찌민은 일본이 진주만 공세로 태평양 전쟁을 시작하자 미국이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베트남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과 싸움을 시작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중국 남부와 인도차이나에 주둔한 미군에 협조하여 미국의 호감을 살려고 많은 노력을 했으나 짝사랑으로 끝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식민주의자 프랑스는 미국의 승인 아래 베트남을 무력으로 다시 침공하였다. 호찌민의 베트남은 더 이상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954년 미국의 최신 무기를 지원을 받은 프랑스 군대를 인민의 의지라는 무기로 무릎 꿇렸다.

이것은 세계전쟁사에 약소국의 보기 드문 승리일 뿐 아니라 아시아의 작은 식민지 국가가 유럽 식민본국을 상대로 치른 전쟁에서 이긴 최초의 승리였다. 기적 같은, 신화 같은 이 전투가 유명한 ‘디엔 비엔 푸’ 전투였다.

승리의 소식을 들은 호찌민은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승리는 장하지만 아직 미국이 뒤에 버티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아니나 다를까, 미국은 약소국의 분에 넘치는 승리를 방관하지 않았다. 프랑스가 보장한 독립을 미국이 승인하지 않은 것이다. 1955년 미국은 베트남을 우리처럼 남북으로 갈랐다.

반미(反美)·항미(抗美)가 아닌 승미(勝美)의 베트남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이익에 따라 분단되었지만 베트남은 순전히 미국의 독선으로 분단되었다. 호찌민은 미국의 힘이라는 현실 앞에 미국이 제안한 분단을 고통스럽게 받아들였다.

남한에서 이승만을 세워 재미봤던 미국은 남베트남에도 비슷한 인물인 응오 딘 지엠을 대통령에 앉혔다. 이 자는 이승만보다 훨씬 더 포악한 인물이었다. 반공 외에 내세울 것이 하나 없는 인물이 폭정을 하자 참을 수 없이 성난 남베트남 인민은 게릴라를 조직하여 미국의 앞잡이에 저항하였다.

이 조직을 ‘민족해방전선’이라 부르며 미국은 이들을 비하하여 ‘베트콩’이라 불렀다. 남북베트남 사이 전면전쟁이 아니라 남베트남에서 내란이 일어난 것이다. 내란의 주역인 민족해방전사자들은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강고한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이들에 대한 탄압이 가혹해지자 이들은 시선을 북쪽 공산주의 정권으로 돌렸다. 북베트남의 호찌민은 이들을 도와주면 미국이 반드시 개입할 것이라 두려움을 느꼈지만 핍박받는 남쪽 동포의 고통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라오스 국경지대 험악한 증선 산맥을 따라 호찌민 루트를 만들어 물자를 공급하는 등 얼마간 도움을 주었다. 미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전쟁의 빌미를 만들어 비행기 몇 대밖에 없는 나라에 헬기를 포함한 수만 대의 항공기를 동원해 8년 동안 인류역사상 최대의 폭격을 조그맣고 가련한 나라에 퍼부었다.

베트남전쟁에 관한 여러 자료를 보면서 내 나름으로 정리한 미국에 대한 호찌민의 태도는 이렇다.

호찌민은 1890년에 태어났으며 20대인 1910년대 유럽에서 막노동을 하며 유럽의 정치와 문화의 핵심을 독학했다. 1920년 무렵 미국에 들렀다가 미국의 엄청난 잠재력을 몸소 느꼈다. 1945년 50대 중반 나이로 집권하자 반대파들이 볼 때 비굴할 정도로 미국과 충돌을 피하려 했다. 호찌민이 직접 작성한 베트남 독립선언문의 첫 구절은 이렇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창조주로부터 불가양의 권리를 받았다. 생존, 자유, 행복추구의 권리 등이 그러한 권리이다.” 놀랍게도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문 첫구절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1955년 확고한 지도력을 갖춘 60대 중반의 노인은 미국이 조국을 분단하는 굴욕을 꾹 참았다. 1965년 미국이 노골적으로 침략하자 70대 중반 노인은 미국과 충돌을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보여준 무자비한 파괴력을 잘 알고 있었던 가냘픈 노인은 미국의 폭력으로 동포들이 당할 참상에 가슴이 미어지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은 인간이 가진 무기보다 강하다’는 신념을 평생 간직한 정신이 강건한 노인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는 말로 전 인민을 결집시켜 미국의 폭력에 맞섰다.

호찌민의 진심을 잘 알고 있는 베트남 인민들은 10년간 말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고 외세의 도움 없이 미국이 무릎을 꿇게 하였다. 전 세계의 양심적인 지식인과 핍박 받는 제3세계 인민은 호찌민을 감싼 베트남 인민이 보여준 고결한 저항정신을 결코 잊지 않는 것이다.

미국의 전략·잠재력 간과한 섣부른 전쟁

‘잊힌 전쟁’인 한국전쟁은 무엇보다 섣부른 전쟁이었다. 영국의 장미전쟁 같은 내란은 어떤 나라든 현실 역사에서 피할 수 없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미국도 노예제를 둘러싼 논쟁을 남북전쟁이란 내란을 통해서 해결했으니 말이다.

극단적인 해결 방법인 전쟁에서 ‘노예제 폐지’라는 대의를 가진 북측이 승리하여 미국 사회가 도덕적으로 한 단계 성숙하는 계기를 삼은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남북전쟁에서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지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어떤 중요성도 갖지 못한다.

해방 공간에서 항일파는 친일파에 대해 도덕적 우월성을 자부하여 내란의 유혹에 쉽게 이끌렸다. 일본 식민지를 오랫동안 경험한 한반도가 해방과 더불어 외세로 분단되었기에 내란은 어쩌면 필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반도는 지극히 약소국이었으며 강대국의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전략적인 곳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먼저 총을 쏜 주역들은 미국의 전략과 잠재력을 섣부르게 간과했다. 방아쇠를 성급하게 당겼기에 미국은 한반도에 즉각 출동했고 좌우 균형을 맞추기 위해 중국이 대규모 참전했다.

미국은 한반도를 석기시대로 만들어 한반도 사람을 공포에 질리게 한 ‘초토화 작전’을 구사했으며 중국은 인해전술로 맞받아쳤다. 친일청산 후 새로운 건국이라는 내란의 도덕적이고 열정적 명분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한반도는 외세의 추악한 각축장으로 돌변한 것이다. 누구를 탓해야 하는가?

이 섣부른 전쟁의 주역인 젊은 김일성은 전쟁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미국을 상대로 무승부를 기록헸다는 것 자체가 승리라고 스스로 만족했다. 전쟁 후 권력을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신화와 전설에 가까운 영웅숭배 이야기를 만들어 ‘항일·항미투사’라는 이미지를 확고하게 구축했다.

그리하여 배타적 고립주의에 가까운 사상을 ‘주체’라 부르며 전체 인민의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동질화하여 반대의견이 없는 사회가 되었다. 유교 사회의 어버이 같은 제왕적 군주에 다름없는 혁명적 군주로 군림한 것이다.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태양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모든 인민이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사회를 만들었다.

반공 이외 어떤 정당성도 갖지 못한 인물인 이승만은 섣부른 전쟁발발로 반사이익을 가장 많이 얻었다. 친일협력자를 감싼 정치로 민중을 분노하게 했지만 전쟁의 책임을 공산주의자에게 돌림으로서 ‘친미·반공투사’라는 이미지를 확고하게 다졌다.

공산주의와 비슷하면 무조건 혐오한 미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해 이승만에게 계속 정권을 맡겼다. 하지만 노회한 이승만은 파시스트에 다름없는 지독한 경찰국가를 만들었다.

이승만은 일본 경찰에 복무하면서 동족인 항일 투사를 고문한 자들에게 자신의 치안을 책임지게 하고 자신에게만 충성하기를 강요했다. 그리고 이완용과 송병준의 후손들이 일본 왕에게 하사 받은 땅을 아직까지 버젓이 소유해도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은 사회를 만들었다.

천안함! 60년 전으로 되돌아가나?

파괴적인 한반도 분열의 자세한 원인에 대해 학문적 판단을 할 깊은 능력은 나에게 없다. 또한 좌우를 막론하고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개인의 견해를 자유롭게 펼칠 수 없기 때문에 내 생각을 주관으로 치부하고 이 부분에 대한 의견을 여기서 멈춰야 할 것 같다.

2010년은 1950년의 참변이 일어난 지 60년, 인간의 나이로 치면 환갑이 되었다. 뜻밖에도 당혹스럽고 어정쩡한 천안함 사건이 터졌다. 천안함 폭발을 남한은 북한의 짓이라고 단정하고 북한은 ‘절대’라는 용어를 쓰며 부정하고 있다.

미국은 남한을, 중국은 북한을 무조건 두둔하는 오랜 관행을 되풀이 한다. 이쯤 되면 진실은 오리무중이다. 한쪽은 ‘우기고’ 한쪽은 ‘딱 잡아떼는’ 모습에서 ‘퇴행’과 ‘과거 회귀’라는 듣기만 해도 섬뜩한 단어가 떠오른다.

한반도는 환갑 나이에 걸맞은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60년 전 악몽인 남북대결이라는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좋은가. 어디로 가야할지 누가 정답을 가르쳐주면 좋으련마는…

송필경(논설위원, 대구 연세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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