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국민시인 탄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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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국민시인 탄타오'
  • 송필경
  • 승인 2010.10.20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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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역사에 의무를 다한 시인 탄타오

 

본 연재글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 연재글 첫회부터 읽기를 당부드립니다. (편집자)

▲ 시인 탄타오
2001년 3월 20일 우리 베트남 진료단은 진료를 마치고 저녁에 베트남이 자랑하는 시인을 초청하여 강연을 가졌다. 약간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다정한 눈매, 수줍은 웃음을 머금은 입술, 총상을 입어 다리가 불편한 시인은 죽음을 넘나들은 전투원이자 종군기자였고 이제는 국민시인으로서 추앙받고 있다. 시인은 그 어떤 강인함이나 비장함 또는 흔히 유명인이 풍기는 거드름 같은 것이 추호도 배어있지 않고 그저 손님에게 친절한 이웃집 아저씨 같이 느껴졌다.

먼저 통역을 맡은 구수정 선생이 탄 타오 시인을 소개했다.

1946년 꽝 아이 성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1969년 하노이 종합대학 어문학부 졸업하자 최전선 전투병을 자원했다.  
1978년 『초원을 건너는 발자국』이란 시로 베트남문인 최고상을 받았다. 1996년 장편 서사시 ‘미 라이의 아이들’이 실린 시집 『태양의 파도』로 두 번째 베트남 문인 최고상을 받았다.

시인은 먼저 자신의 대표 서사시 ‘미 라이의 아이들’ 중 마지막 부분인 ‘망루에서의 호소’를 낭송하였다. 베트남어는 6성조를 지닌 언어다. 4성조의 중국어보다 훨씬 더 율동적으로 들렸다. 시인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고 낭랑한 음률이 담겨 있어 듣는 이의 가슴에 다정하게 밀려왔다. 이어서 같은 분위기의 목소리로 구수정 선생이 우리말로 번역 낭송하였다. 솔직히 당시에는 시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시인이 짧게 말하면 구수정 선생이 통역하였다.
“전쟁이 남긴 상처는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어린이는 고엽제 후유증에 몹시 시달리고 있다. 전쟁의 상처가 깊지만 한국 사회가 스스로 잘못을 반성하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 어버이 세대 잘못을 뉘우치는 한국의 새로운 지식인의 모습을 베트남 젊은이들은 배워야 할 것이다.” 먼저 우리에게 덕담을 했다.

“나는 ‘항미전쟁’을 ‘기억’하고 있다. 전쟁, 정말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나는 23살에 입대했다. 그 당시 17~18세가 되면 무조건 입대하였으나 대학생은 졸업 후에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자신을 회고했다.

이어진 시인의 말 중간에 베트남 여학생들 쪽에서 가벼운 웃음이 일어 약간 어리둥절하였다. 여학생들은 호찌민 대학 한국어과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환자와 우리 사이에 통역을 담당하는 역할을 했다. 구수정 선생의 통역이 뒤따랐다. “죽었던 부대원들은 한번도 입맞춤을 해보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시인의 죽은 동료전사들은 대부분 앳된 이팔청춘이었다. 한창 나이인 베트남 여학생들이 ‘입맞춤’이라는 단어에 수줍은 웃음을 흘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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