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덕한 정권에 대한 또 하나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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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덕한 정권에 대한 또 하나의 진실
  • 강신익
  • 승인 2011.01.04 10:22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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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강신익 논설위원

 

3년쯤 전, 두 달 동안 미국에 머문 적이 있었다. 줄기세포 연구 조작사건에 자극받은 정부가 그 나라의 생명윤리 심의제도를 배워오라고 보낸 연수단의 일원이었다. 약품이 새로 개발되면 시중에 유통되기 전에 그 효능과 부작용을 확인하기 위한 임상시험을 해야 한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연구가 윤리적으로 행해질 수 있도록 관리 감독하는 위원회의 업무였다. 과연 배울 것이 많았다. 모든 일은 사전에 정해진 법률과 지침에 따라 처리되었고 연구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윤리적 행위에 대한 감시와 규제도 비교적 촘촘했다.

하지만 한 달쯤 지났을 즈음 완벽에 가까워 보이던 제도의 허점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먼저 공익을 위한 생명윤리를 관할하는 위원회가 영리를 추구하는 사기업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심의를 의뢰하는 제약기업, 연구를 수행하는 의료기관, 그리고 연구계획의 심의를 통해 피험자를 보호해야 할 위원회가 모두 이해관계에 따라 책임과 의무를 나누는 계약의 당사자였던 것이다. 위원회의 주 고객이 제약기업인데 그들의 행위를 얼마나 잘 통제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광고의 홍수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미국도 분명 의약분업이 잘 되어있는 나라이고 대부분의 약들이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돼 의사의 처방 없이는 구입할 수 없는데도 TV 화면은 전문의약품 광고로 흘러넘쳤다. 모든 약품 광고의 마지막 멘트는 '의사에게 요구하세요.(Ask your doctor.)'로 끝난다.

전문가인 의사가 아닌 광고의 영향을 받은 소비자(환자)가 선택을 하도록 강요하는 세계 유일의 나라가 미국이다. 환자가 내는 약값에 이렇게 쓸데없이 방송 산업에 지불된 광고비가 고스란히 더해지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미국의 환자가 편법을 동원해서까지 이웃나라인 캐나다에서 진료를 받고 약을 사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변호사들은 ‘무슨무슨 약을 복용하고 부작용을 일으킨 환자는 저에게 연락하세요.’라고 광고한다. 그 약을 처방한 의사와 제약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하거나 합의금을 받아주겠다는 것이다. 미국이 의료소송의 천국인 이유 중 하나다. 임상시험의 윤리를 심의하는 회사의 직원 중 절반이 생명윤리학자가 아닌 변호사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법적 다툼은 사소한 일상 속에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심지어는 같이 방을 쓰던 동료가 나누어야 할 임대료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법정에 불러내어 모욕을 주는 장면을 담은 프로그램이 인기를 끈다. 모든 관계는 권리와 의무를 나눠가진 계약 당사자의 이해 다툼으로 구조화되고 인간관계의 기본이어야 할 공감과 공익을 위한 책무는 설 자리를 잃는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1994년 이후 3번째로 총리직을 수행하고 있는 이탈리아의 언론재벌이다. 마피아 공모, 위증, 세금 포탈, 뇌물 공여 및 부패 등의 혐의로 12번이나 법정에 섰지만 교묘한 술수로 빠져나와 여전히 최고의 권좌를 지키고 있다. 그가 이탈리아 방송의 90%를 손에 넣은 언론 폭군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나라의 최고 재벌이 총리가 된다는 것도, 많은 범죄와 스캔들에 연루되었으면서도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는 지난 12월의 신임투표에서도 유유히 살아남았다.

내가 미국에서 경험한 것이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제도와 관행의 장막 뒤에서 벌어지는 이권다툼의 실상이라면, 이탈리아의 정치는 부도덕한 권력이 언론의 정화기능을 무력화할 때 나라 전체가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이 두 상황이 함께 들이닥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날치기 통과된 미디어법에 의해 선정된 종편이 모두 수구 언론의 손아귀로 넘어가고, 그들은 광고시장의 확보를 위해 의약품 광고를 허용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영리법인이 된 의료기관과 변호사들의 광고까지 허용된다면 정확히 내가 경험한 미국의 상황이 된다. 이 정부는 GDP의 15%를 의료비에 쓰면서도 인구의 1/4이 아무런 보험혜택도 받지 못하는 세계 최악의 미국을 모델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정치는 썩었어도 의료제도만은 프랑스에 이어 세계 2위의 명성을 자랑할 만큼 평등하고 효율적이다. 반면 미국은 선거 때마다 개혁을 외치지만 기득권을 확보한 민영보험회사와 의료기관의 조직적 방해로 번번이 실패한 경험을 가진 나라다.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에도 많은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대만과 함께 적은 비용으로 많은 사람에게 골고루 혜택을 주는 성공한 사례로 꼽힌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탈리아처럼 부도덕하게 언론을 장악하고는 미국처럼 국민과 환자들의 고통을 담보로 재벌 언론과 보험회사 그리고 일부 대형 의료기관을 살찌우려 한다.

지난 해 독서계의 화두는 정의와 도덕이었는데 이것은 부도덕한 정권에 의해 죽어가는 정의에 대한 국민 정서의 반응이다.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는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정의와 도덕이 사라지는 이유를 보다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제 여기에 하나의 진실을 더해야 한다. 무분별한 의료와 방송, 그리고 광고시장의 확대를 통해서는 절대로  국민의 건강과 행복은 물론 경제발전도 이룰 수 없다. 시장이 아닌 복지가 답이다.

강신익(본지 논설위원,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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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욱 2011-01-05 15:39:56
국내에서 미국의 IRB가 결코 객관적 기구가 아니라 전체 시스템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분들이 없는데... 멋진 지적입니다. 어느 때보다 좋은 새해 벽두의 논설이었던것 같습니다.

임종철 2011-01-05 13:01:39
비민주적인 권력과 기득권의 이해가 얽히면 그 피해가 어디로 돌아가는지 간단명료하게 보여주시네요.

송필경 2011-01-04 17:37:38
많이 얻어갑니다. 강교수의 내공이 보입니다. 의료, 언론, 정치가 불가분 관계가 있네요.

전민용 2011-01-04 15:27:26
감사합니다. 시의적절한 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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