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공간에 묶인 몸과 생활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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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에 묶인 몸과 생활의 정치
  • 강신익
  • 승인 2011.05.24 11:1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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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강신익 논설위원

 

우리 가족이 영국에 머물렀던 13년 전에는 단 하루도 작은 문화적 충격을 겪지 않고 지나간 날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했다. 40년이나 내 몸과 마음이 담겨있던 땅과 하늘, 공기와 문화를 떠나 말로만 듣던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속을 살아온 인간들 속에 던져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극히 일상적인 일도 미묘하게 달랐다. 상점의 점원은 절대로 두 명의 손님을 동시에 상대하지 않았고, 행정부서에 일을 보러 간 학생들은 사무실 문밖에 길게 줄을 서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점원과 직원은 한 사람과의 업무가 끝날 때까지 절대 다른 손님이나 학생을 상대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전화도 받지 않았다. 차례를 기다리는 환자들이 미리 진료실에 들어와 다른 환자의 진료장면을 그대로 보고 듣는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하지만 여러 사람과 부대끼며 사는데 익숙해진 우리로서는 무척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거리에 나서면 보행자들이 횡단보도의 신호등을 거의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란다. 그것은 자율적으로 질서를 지키는 선진국 시민의 모습이 아니었다.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길의 폭이 무척 좁아지는데 강이나 언덕과 같은 자연이나 건물과 같은 인공구조물 때문에 왕복 일차선으로 좁아진 곳에서는 반대편에서 오는 차와 번갈아 지나야 했다. 그 좁은 길은 10년 만에 다시 가 보았을 때도 그대로였고 우리 일행은 그곳을 지나기 위해 짧지 않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거기는 현대문명의 발상지이지만 사람들은 무턱대고 합리적이기만 하지도 편리함만을 추구하지도 않는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수도인 런던에 가서 알게 된 사실은 더 충격적이었다. 그곳 의회가 양원제인 것은 배워서 알고 있었지만 상원의원이 대를 이어가며 세습을 한다든가 귀족 작위를 받은 사람은 원칙적으로 하원의원에 출마하거나 공무를 담임할 수 없다는 사실 등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상징적이지만 여왕이 국가의 원수이므로 모든 법령이 그녀의 이름으로 공포되고 명목뿐이지만 황태자가 거의 모든 국립대학의 총장이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길이의 단위인 피트와 야드가 어떤 왕의 발과 팔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라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미국에서 공부하다가 잠시 영국에 들른 친구는 그런 사실을 알고는 매우 단호한 어조로 영국은 후진국일 뿐이라고 단정지었다. 민주주의의 토대를 쌓고 산업혁명으로 자본주의의 맹주가 되면서 부를 축적했으며 제국주의 팽창으로 세계를 지배했던 영국은 정녕 후진국으로 전락하고 만 것인가?

하지만 나는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배워가면서 어색하고 불편했던 일상과 이해가 되지 않던 사회현상에 서서히 적응하기 시작했다. 해답은 처음부터 우리와는 다른 개인 중심의 세계관, 그리고 전통을 쉽게 벗어나지 않고 오래된 것을 중시하는 그들의 문화적 습성에 있었다.

영국 사회는 여전히 엄숙함과 권위,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가치를 중시하는 귀족과 근면과 성실을 강조하는 평민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그 구분을 존중하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영국의 입헌군주제와 양원제는 그런 신분질서를 지키면서도 의사결정에서는 평민의 주도적 지위를 인정하는 대타협이었던 셈이다.

‘개인’과 ‘신분’이 공존하는 형국이다. 그들에게는 프랑스처럼 왕의 목을 자르는 과격한 혁명은 없었지만 종교적 차이로 수백 년 동안이나 유혈충돌이 반복되는 북아일랜드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역사적 현실도 있다.

얼마 전, 영국에서는 보행자가 신호등을 잘 지키지 않지만 횡단보도에서의 사고는 신호를 잘 지키는 우리보다 적다는 연구결과가 보도된 적이 있다. 현상의 표면만을 보아서는 사태의 전모를 알 수 없다는 증거인 셈이다.

영국의 차도는 대체로 우리의 도로보다 좁다. 그렇다보니 자동차보다는 보행자가 우선일 수밖에 없다. 넓은 차도를 건너야 하는 우리는 여러 사람이 신호를 기다려 함께 건너는 것이 안전하지만 좁은 길을 건너다니는 데 익숙한 그들은 옆 사람 눈치를 보기보다는 스스로의 판단에 따른다. 우리는 신호라는 인위적 체계에 우리의 몸을 적응시켰지만 그들은 문화적 경험 속에 체화된 행동패턴을 따름으로써 오히려 교통체계에 더 잘 적응을 했던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에는 지하철을 비롯한 공공장소의 계단에 ‘우측통행’이라는 표시를 해 놓은 곳이 많다. 하지만 잠시라도 유심히 관찰을 해 보면 그 표지를 따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걸 알 수 있다. 수십 년이나 ‘자동차는 오른쪽 사람은 왼쪽’이라는 규범에 익숙해진 탓이기도 하고 그런 규칙이 아니더라도 우리 몸이 알아서 서로를 비켜가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몸의 인지구조와 적응력은 인위적 규칙보다 먼저 작동한다. 엄청난 세금을 들여 도입하려던 삼색신호등도 이런 인지구조를 전혀 고려치 않은 탁상공론의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이 사례들은 아주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정권은 어떠한 사회적 합의나 공론화도 없이 밀어붙인 미국산 쇠고기 수입 결정에 분노한 촛불에 머리를 조아려 사과했지만 이내 태도를 돌변해 그 사과를 받은 이들을 보복했다.

하루아침에 수십 년간 몸 붙이고 살아온 공간에서 쫓겨나게 된 용산 상가의 주민을 폭압적으로 진압해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면서도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수천 년간 우리에게 생명을 주어 온 강의 바닥을 마구 파헤치면서도 그로 인해 막대한 영향을 받을 사람들과 한마디 상의도 없는 후안무치는 모두 역사와 문화에 대한 그리고 그 역사와 문화를 살아 온 우리 몸의 지혜에 대한 무지와 ‘더불어 살아감’이라는 생명의 가치를  파괴하는 죄악이다.

이 의미 없는 삽질에 노인들에게 틀니를 만들어주어 식생활의 기본권을 지켜주기 위한 예산이 깎여 나간다. 아무런 감동도 없는 삽질에 그리고 그 삽질의 대가로 죽어가는 복지정책에 분노하는 것은 정당하고도 건전한 동물적 감성이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기 이전에 먹고 입고 머물 곳을 찾기 위해 자연과 싸우고 타협하거나 적응하며 살아온 자연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제는 돈과 권력이 아닌 생활이 중심이 되는 정치가 싹터야 한다. 겨울이 다가오면 국회에서 독거노인에게 연료보조금을 얼마나 지불해야 하는지를 놓고 토론을 벌이는 그리고 그 장면이 생방송으로 전파를 타는 영국에서 배워야 할 점이다.

먹고 입고 쉴 곳을 마련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정치는 하루빨리 헛된 구호가 아닌 일상적 생활 속으로 돌아와야 한다.

강신익(인제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인문의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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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욱 2011-05-24 16:37:35
그 생활의 의미가 꽤나 막연한 편인데, 위 글이 다소 구체적인 감을 잡을 수 있게 한 듯 합니다. 언제나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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