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프로페셔널리즘
상태바
21세기의 프로페셔널리즘
  • 강신익
  • 승인 2011.08.23 12:18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논설]강신익 논설위원

 

나는 ‘전직’ 치과의사다. 그래서 더 이상 치과의사 면허를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파렴치한 짓을 해서 강제로 취소처분을 받지 않는 한 그 면허를 반납할 방법이 없다. 국가는 면허를 ‘부여’하지만 그것을 ‘갱신’하거나 ‘관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유럽과 미국에서 의료인과 변호사와 같은 전문직의 면허는 전문가 집단의 대표와 그 서비스를 이용하는 소비자 집단과 공공의 이익을 대표하는 위원이 적절한 비율로 섞인 위원회에서 관리한다. 하지만 우리는 면허와 관련된 모든 권한을 국가가 독점하고 있다. 그런데 국가기관의 한정된 인력과 전문성으로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전문서비스에 관련된 사항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아예 면허에 관한 지속적 관리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 개발된 약이나 의료기구의 안정성과 효과를 검증하려면 그 약이나 기구를 직접 사람의 몸에 적용하는 임상시험을 거쳐야 한다. 임상시험은 그 계획에 대한 사전심의를 거쳐 통과되어야만 시작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나는 그 심의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선진국의 사례를 보기위해 미국에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제출된 임상시험 계획을 검토하던 중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연구 책임자의 면허에 관한 기록이었는데 거기에는 면허가 발부된 날짜보다 면허의 만료시기가 더 중요하게 언급되어 있었다. 의료인의 면허는 지속적인 관리를 통해 재발급하도록 되어있었던 것이다!

의료인의 면허는 지속적으로 관리되어야 한다.

그 중에는 면허를 취소당했다가 회복하는 과정을 자세히 기록한 것도 있었다. 예컨대 마약을 복용했다는 이유로 면허가 취소된 의사가 있었다. 그 사람은 주 의료위원회(State Medical Council)에서 면허 취소처분을 받았는데, 그 사실을 통보하는 문서에는 면허를 회복하기 위해 당사자가 해야 할 일의 목록과 그 구체적 절차가 명시되어 있었다. 그렇게 그 의사는 재활치료를 받고 여러 차례의 검사를 통해 중독에서 벗어났다는 증거를 제출해 인정을 받은 다음 면허를 회복했다. 

이 제도의 강점은 전문가와 소비자 집단의 이해관계가 골고루 반영될 수 있으며 사회적 변화에 쉽게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도의 시행 초기에는 영국의 의료위원회(General Medical Council) 위원 중 다수를 해당 전문가가 차지했지만 점차로 소비자 대표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전문가들이 스스로 의료서비스의 공공성을 지킬 것이라는 믿음이 깊었지만 점차 전문가도 대중의 감시를 받아야 한다는 쪽으로 변해간 것이다. 의료위원회는 의사의 면허뿐 아니라 의과대학의 교육에 대해서도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고려대 의대생의 성추행 사건 같은 것이 발생했다면 학생의 징계에 대해 간접적 이해관계를 가진 학교당국이 아닌 중립적 입장을 가진 의료위원회가 나설 수 있다는 말이다. 또 다른 강점은 이 위원회가 전문가와 소비자가 상시적으로 대화하고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통로가 된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이 지식과 기술을 독점하고 사회가 그 지위를 인정해 주는 과거의 프로페셔널리즘이 전문지식의 대중화를 이뤄낸 정보혁명에 적응한 결과다.

우리는 무척 경직된 제도를 가지고 있다. 면허는 전문성과 대표성이 부족한 국가가 관리하고 모든 의료인은 중앙회(대한의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 등)에 당연 가입되어야 하며 의료정책에 관한 국민의 발언권은 무척 제한적이다. 이 제도는 국가가 전문직 단체를 통제해서 정책적 목표를 달성하려고 했던 구시대적 발상의 산물이다. 다양하고 복잡해진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할 민주사회에는 적합하지 않은 제도다.

다양한 관점과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모두 중앙회에 가입해서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도 불합리하다. 프랑스의 경우 매년 수가협상에 참여하는 의사단체가 8개나 된다고 한다. 미국의 최대 의사조직인 미국의사협회(AMA)에 가입한 의사도 전체의 절반을 넘지 않는단다. 그들은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다양한 조직에 참여해서 활동한다. 의사 노동조합에 가입해서 자신들의 정당한 몫을 주장하기도 하고 윤리적 의료행위를 강조하는 단체에서 활동하기도 한다.

독립적 면허관리기구의 설립이 필요하다.

지금 의료계 일각에서 일고 있는 중립적 면허관리기구 창설과 복수 의료인 단체 허용이라는 주장은 이런 사회적 변화와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다. 복잡해진 이해관계, 사회 전반에 걸친 민주화, 전문지식의 대중화에 적응하려면 제도 자체의 유연성을 크게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한 주장이다.

특히 국가가 통제하고 전문직 단체가 그 지침에 따라 움직이던 권위주의 시대의 패러다임을 깨는 건 시급한 과제다. 하지만 의료인에 대한 징계의 권한을 모든 의료인이 당연히 가입해야 하지만 대표성이 크게 부족한 중앙회에 맡기는 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과 다름없다. 이 조직에서는 다양한 이해와 관심이 반영될 기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스스로를 규제하고 통제해 본 역사적 경험이 없다. 대중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불온시하는 전문가도 많다.

의료인과 환자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의료 환경을 위해서는 제도의 개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그 제도를 운영하는 당사자들의 가치관과 태도는 더 중요하다.

대한치과의사협회는 2006년 제 55차 정기총회에서 치과의사 윤리의 네 가지 원칙(환자 복지 우선의 원칙, 환자 자율성 존중의 원칙, 사회정의의 원칙, 진실의 원칙)과 10가지 의무를 담은 <치과의사 윤리 헌장>과 구체적 실천방안을 담은 지침을 채택 통과시킨 바 있다. 여기에는 분쟁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원칙과 가치뿐 아니라 구체적 절차와 방법까지 명시되어 있다.

치과의사 윤리헌장을 살리자.

그렇지만 지금 치과계의 큰 이슈인 네트워트 치과 문제를 이 헌장의 정신과 절차에 입각해 해결하려고 노력한 사람은 거의 없다. 헌장 제정 이후 5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도 치과의사협회의 홈페이지에조차 이 헌장은 없다. 그 대신 고소와 고발 관련 기사가 넘친다. 우리가 윤리 헌장을 제정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회원이 많다. 나는 이 지침에 의해 구성된 윤리위원회 위원이지만 이 사안에 대해 단 한 번의 연락도 받은 바 없다.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는 헌장과 지침이 되어버린 것이다.

개정된 의료법이 내년 5월 발효되면 치협이 구성한 윤리위원회가 회원에 대한 징계요청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이번 사태는 그 징계요청권의 실효성을 시험해 볼 절호의 기회다. 우리가 제정한 윤리헌장이 그 중요한 매개가 될 수 있다. 헌장의 목적은 징계대상자를 윤리적으로 나무라는 데 있지 않다. 우리가 천명한 ‘탄핵주의’의 입장은 옳고 그름을 둘러싼 자유로운 공방이 보장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자율’이다.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매도만 하는 건 자율일 수 없다.

우리에게는 프로페셔널리즘의 역사적 경험이 거의 없지만, 유럽과 미국의 경험에서 배울 수는 있다. 그들의 프로페셔널리즘은 전문가 집단의 자율적 규제를 위해 생긴 제도와 이념이지만 이제는 점차 대중의 통제를 받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

우리는 전문가 집단의 ‘자율’과 대중의 ‘통제’라는 상반된 가치를 한꺼번에 수용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을 맞고 있다. 독립적 면허관리기구는 그 둘을 한꺼번에 담을 수 있는 그릇이고, 우리가 스스로 제정한 윤리헌장은 그 속에서 21세기 프로페셔널리즘이 자라날 토양이다.

강신익(인제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인문의학연구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전민용 2011-08-23 16:10:47
논의와 자기 성찰과 대안적 제도를 마련해야 할 때인데 이것들을 추진할 수 있는 의지와 실력을 갖춘 분들이 절실합니다. 치과계가 자력으로 이런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의문입니다.

박덕영 2011-08-23 15:29:18
이 어지러운 상황을 통하여
치협이 보다 원숙하고 유능하고 정제된 의지와 행동을 가지고,
드러난 표면뿐만 아니라 그 심부의 원인까지를 해소하고자 하는
'철학을 가진' 집단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