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의 '호주제' 헌법불합치 결정을 환영하며
상태바
헌재의 '호주제' 헌법불합치 결정을 환영하며
  • 편집국
  • 승인 2005.02.14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호주제폐지 운동을 담당해온 활동가의 단상

부모성 함께 쓰기를 시작했던 그 때 그 사람들

이이효재, 조한혜정, 이유명호, 김신명숙…. 지금은 별로 낯설지 않은 이런 이름들이 97년 당시 처음으로 <부모성 함께쓰기>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170명의 명단이 발표되었을 때를 잊을 수가 없다.

그 때만해도 인터넷은 거의 보급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천리안, 나우누리와 같은 PC통신이 맹위를 떨치던 시절이었는데, 각 토론게시판마다 이 요상스런 이름에 대한 비난의 글들이 쇄도했다. 글 하나 읽고 나면 그 위로 수십개의 글이 뒤엎을 정도였다.

변씨랑 소씨가 결혼하면 ‘변소’씨가 되나, ‘강간’씨는 어떻게 할 것이냐, 자식 세대로 가면 성이 4자, 8자가 된단 말이냐 등등 얼토당토 않은 인신공격성 글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동안 아버지의 성만을 써온 우리의 고정관념이 얼마나 깊고 강고한지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부모성 함께쓰기>는 성차별적 생명관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여아낙태(아들을 낳아야 하기 때문에 태아성감별을 통해 여자아이일 경우에는 낙태함, 연 3만명으로 추정)의 부끄러운 현실을 변화시키고, 종래의 가족관과 관습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타파하기 위해 시작한 문화운동이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서 ‘이구경숙입니다’라 했을 때, 대부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즉‘어머니 성을 함께 쓰고 있습니다’는 설명을 듣고 ‘저럴 수도 있구나’하는 상상을 한번 해보게 하는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어머니와 그토록 친밀하면서도 내가 아버지의 성씨만 따르는 것에 대해 별로 의심을 해보지 않았다. <부모성 함께쓰기>는 이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다른 상상력을 해보도록 자극하는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된 것이다.

호주제 문제는 여성문제 넘어선 가족문제, <호주제폐지 시민연대> 발족

<부모성 함께쓰기> 운동으로 폭발한 사회여론을 기회로 여성연합은 99년에 호주제폐지를 주요사업을 설정, 본격적으로 이 운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대한여한의사회, 호폐모, 가법과 함께 토론회를 개최하고, 여성연합 내 호주제폐지운동본부를 발족시켜 전국 50여개 단체에서 ‘호주제 불만 및 피해사례 신고전화’ 운영, 각종 거리캠페인,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다양한 사연들이 전국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얼마 전에 결혼했는데 혼인신고하러 갔더니 남편이 호주가 되더라'면서 기분 나빠서 호주제 폐지될 때까지 혼인신고를 하지 않겠다는 젊은 세대에서부터, '오빠와 이혼한 올케가 재혼을 할 예정인데 아이의 성씨를 새아버지의 것으로 변경하기 위해서는, 호주(전 남편)가 아이의 장례를 치르고 사망신고를 해야 가능하다고 해서 빈 시신을 놓고 장례를 치르고 한참을 울었다'는 기막힌 사연까지... 이들은 얼마나 많은 세월동안 이 아픔을 간직해온 것일까,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위의 눈치 속에 숨죽이며 살고 있는 것일까.

그 다음 해인 2000년에는 호주제 폐지운동을 중점사업으로 설정, 사이버 호주제폐지운동 전개, 국정감사 모니터 등을 통한 국회 압박에 박차를 가했다. 무엇보다 호주제는 단순히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구성원 전체의 문제이며, 우리 사회가 성평등 민주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문제라는 인식을 확장시켜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호주제폐지를 위한 시민연대(이하 ‘호폐연’)>를 발족시켰다. 당시 113개 단체가 참여했으며 현재 137개 단체로 확대되었다.

2000년 9월 발족한 호폐연은 사업의 방향을 크게 세 가지로 잡고, 그 외 나머지 사업들은 각 단체의 역량에 맞게 진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 세 가지 갈래는 호주제 위헌소송과 민법개정안에 대한 국민청원, 범국민 캠페인인데, 범국민 캠페인은 전국의 호폐연 소속 단체들이 매년 1차례 이상 거리에 나가 시민들의 여론 변화를 촉구하는 방식으로 진행됐고 국민청원은 박근혜, 이미경, 한명숙 의원의 소개로 진행했지만 국회에서는 주요하게 논의되지 못했다.

호주제 위헌소송 시작, 헌법이 정한 성평등 및 개인의 존엄에 위배

호주제 위헌소송은 민변의 이석태, 강금실 변호사가 처음으로 아이디어를 냈는데, 이는 소 제기 자체가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될 뿐만 아니라 보수적인 국회의원들에게만 민법개정을 맡기기 보다는 국회 의결과 관계없이 호주제를 무효화시킬 수 있는 전술이라고 판단하여 시작했다. 예상대로 소 제기 자체가 뜨거운 감자로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고, 5차례의 변론을 거쳐 드디어 ‘헌법불합캄 결정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몇일 전 초등학생이 될 아들의 입학통지서를 받고 가슴이 막막했다. 얼마 전 걸려온 재혼여성의 전화때문이었다. 전 남편의 자녀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아이의 본래 성이 드러나게 되었다며 아예 머리를 싸고 드러누웠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얼마나 많은 재혼가족의 부모와 자녀들이 행복해야 할 3월 입학을 앞두고 괴로워하고 있을까. 개인적으로 헌재의 결정이 무엇보다 즐거운 이유가 여기 있다.

국민의 기본생활을 규율하는 민법상의 대표적 성차별 조항인 호주제 폐지를 통해 가족 내에서도 민주주의적이고 수평적인 사고방식, 성평등 의식이 서서히 확산되리라는 기대와 함께, 가족형태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고 고통받는 가족이 사라진다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일이다.

가슴으로 지지해준 시민들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여성연합은 그동안 가정법률상담소, 여성단체협의회, 호주제폐지를위한시민의모임 등 호폐연 간사단체들과 함께 캠페인과 토론회를 통한 긍정적 여론확산, 시기별 대응을 통한 국회 압박 등의 활동을 벌여왔다.

그 밖에도 여성연합 호주제폐지운동본부에서는 UN 사회권 위원회가 한국 정부에 ‘호주제’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도록 NGO보고서 제출, 매년 대규모 전국 순회캠페인 전개, 사이버 캠페인, 민법개정안 의원발의 추동, 1인 시위, 호주제 폐지 홍보대사로 유명한 권해효, 김미화씨의 적극적 활동을 이끌어내는 등 99년부터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왔다. 특히 지난 연말에는 남성의원 153명을 추동해 호주제 연내 폐지를 촉구하도록 하여 국회 법사위가 올해 2월 임시국회에서 호주제를 폐지하기로 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 모든 활동과 성과들이 단체들의 노력만으로 된 것은 아니다. 캠페인, 소송, 서명운동이 있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참여해준 시민들, 매월 호주제 폐지운동을 위한 활동에 보태라고 성금을 보내주시는 후원자들, 그리고 말은 없지만 묵묵히 지지해준 많은 시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정말로 공이 국회로 넘어갔다. 위헌소송 결과를 보고 하자, 대안에 대한 검토를 하고 하자는 등의 핑계로 이제껏 미루어온 민법개정안, 미룰 이유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아름다운 봄 3월이 오기 전에 국회는 차별의 역사, 반민주의 역사인 호주제를 겨울 한파에 묻어버리길 기원해본다.

정책부장 이구경숙      ⓒ 한국여성단체연합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