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국가, 법은 만명에게만 평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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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치국가, 법은 만명에게만 평등하다?
  • 김랑희
  • 승인 2013.02.20 11:2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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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랑희, 인권활동가

 

법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10년 전만해도 법과 내 삶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라는 의문을 갖지도 못할 정도로 법은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별 관심 없는 학문이자 법 전문가들의 영역이라고만 생각했다. 기껏해야 운전자인 나와 관계있는 법은 교통위반 관련 법 뿐이었다.

그런데 인권운동을 하면서 법은 내게 현실로 다가왔다. 내가 하는 활동 중 일부는 법을 바꿀 것을 요구하거나, 법을 만들고 바꾸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법을 헌법정신에 부합하게 하는 것, 인권적 가치를 담게 하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법들이 결국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5년 동안 목격한 사실은 유머와 풍자, 비판과 의견이 국가와 권력을 향할 때 범죄로 몰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내내 귀가 따갑게 들은 말은 ‘법치주의’이다. ‘법치주의’는 얼핏 생각하면 법을 잘 지키자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국가가 국민들에게 ‘법을 잘 준수해라’, ‘안 지키면 법대로 처벌하겠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그런데 실제 ‘법치주의’란 그런 게 아니다. 법치주의란 권력자의 자의를 법으로 통제함으로써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즉 법의 구속을 받아야하는 것은 권력자이고, 국가권력을 함부로 휘두를 수 없게 법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치국가는 헌법의 근본가치를 실현하는 법질서의 통제로 이해해야하며, 헌법의 기본원칙인 기본적 인권보장을 위해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곡된 ‘법치주의’로 범죄자가 되거나 그 혐의를 받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권력은 손쉽게 법을 동원하여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고 법원은 권력의 손을 잡았다.

나 역시 지난 5년 동안 2번 연행되었고, 3번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래서 4개의 재판을 하게 되었다. 그 중 하나의 재판을 지난 1월에 받았다. 나와 10명의 사람들이 같이 재판을 받았는데 나의 죄목은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이다. 구체적으로는 공동주거침입이다.

 

나는 왜 벌금 100만원의 폭력범이 되었나?

 

2012년 2월에 나는 인천시교육청 앞에서 학교비정규직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집회에 참여했다. 나는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는 아니지만 당시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대량해고 문제에 대해 공감하고 이런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를 지지하고 연대하는 마음으로 참여했다.

아무리 오래 일을 했어도 해마다 신학기가 다가오면 고용불안에 시달려야 하고, 해고와 채용을 반복하며 학교를 옮겨 다녀야 하는 사람들, 100만 원 남짓한 월급에 열악한 조건에서도 급식실과 행정실, 도서관, 과학실 등 학교 대부분 영역에서 일하고 있는 비정규 노동자들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혼자 두 아이를 키우는 한 여성노동자는 자신의 삶에서 이 노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하며 안정적으로 일을 할 수 있게 해달라는 호소를 했고 집회참가자들은 함께 눈물을 흘렸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 대해 아무도 책임을 지거나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무기계약직 전환을 피하기 위해 해고를 반복할 뿐이다. 학교비정규직의 교섭의 당사자인 인천시교육감에게 몇 번이나 면담을 요청했지만 대답이 없다. 해고된 노동자들의 삶에 가슴아파하고 문제를 외면하는 교육감에게 너무도 화가 난 사람들은 교육감을 만나게 해달라고 교육청으로 들어가려했다.

교육청 정문에서 우리가 마주한 사람은 의견을 귀담아듣고 적극적으로 해결을 모색하려는 책임 있는 자세를 가진 교육감이나 교육청직원이 아니라 문을 틀어막고 있는 공익근무요원들이었다. 교육청은 공익근무요원들을 시켜 우리를 문전박대했다. 우리는 교육청에 발도 들여서는 안 되는 쫓아내버려야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런 태도는 우리를 더욱 분노하고 절망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 문을 열고 교육감실을 찾아갔으나 교육감은 자리를 비웠고 대신 부교육감과 이야기하기로 하고 그곳을 나왔다. 이 과정이 11명을 폭력범으로 만들고 1700만원의 벌금폭탄이 되었다. 형식적인 법의 내용으로 보자면 위법행위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엄청난 액수의 벌금이 타당한지,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이 온전히 교육청에 들어간 사람들의 책임인지 법원에 묻기로 하고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판사님은 우리 얘기를 들어줄까?

 

재판을 받으러가면서 긴장되는 건 법정이 주는 무게감보다는 어떤 판사를 만나게 될까하는 점이다. 판사의 결정은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행위의 의미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정은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호소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의 재판을 맡은 판사는 우리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줄지, 문전박대한 교육청처럼 외면할지 긴장된 마음으로 법정에 들어섰다.

판사는 젊은 여성이었다. 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젊으시니 고리타분하게 생각하지 않고 진취적인 사고를 할까? 여성이니 여성노동자들의 삶에 좀 더 관심을 보일까?’ 피고석에 앉은 우리에게 맨 처음 건넨 말은 나의 기대를 무너뜨린다.

“공동주거침입이 100만원 벌금이면 적절한데 왜 재판을 청구하셨죠?” 조합원 한분이 이 말에 대꾸한다.

“우린 월급이 100만원도 안됩니다.” 판사는 이 말에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얘기한다.

“벌금은 월급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는 웬만하면 재판청구를 취하하고 벌금을 내라고 한다. 여러 명이 항상 모두 참석해야하는데 재판이 제대로 진행되겠느냐는 우려는 우리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피고인이 다 출석하지 못해 재판이 지연되는 것이 판사입장에서는 짜증나고 귀찮은 일이라는 것이다. 판사가 우리의 얘기를 들어줄 것 같지 않아서 슬슬 걱정인 된다.

변호사가 열심히 설명을 한다. 재판은 오늘 종결하기로 하고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대량해고와 집회당시의 상황, 왜 이런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판사는 경청을 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니 판사가 조금씩 마음과 귀를 열고 이해하려 애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피고들은 최후진술을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정성껏 했다. 판사가 우리들의 이야기를 꼭 들어주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판결문에 담긴 고민

 

2주 뒤 드디어 판결의 시간이 왔다. 100만원의 벌금은 30만원으로 조정되었고 게다가 선고유예를 내렸다. 처음 판사와의 대면을 생각하면 믿어지지 않는 판결이다. 판결문은 짧았지만 판사가 많은 생각을 했으리라 추측한다. 피고인들의 상황을 이해하려 했을 것이고, 그들에게 이 벌금이 어떤 의미인가를 고민했을 것이다. 법전으로만 판단했다면 검사의 구형을 그대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판사는 처음의 태도와는 달리 해고자들의 절박한 상황을 고려했다. 그들의 삶과 고통을 이해해준 판사가 너무 고마웠다.

판사가 단지 법전에 따라 기계적으로 모든 상황을 똑같이 판결하면 되는 직업일 뿐이라면 법정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곳이 되지 못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단지 귀로 들리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다. 말하는 사람들의 처지, 감정을 존중하며 이해하는 것이다. 법정에 그런 ‘귀 기울임’이 있을 때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호소할 수 있는 곳이 될 것이다(그럼에도 재판비용은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가장 인권적인 헌법이라고 평가받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헌법재판소 초대재판관인 알비 삭스는 많은 판결문에서 형식적인 법논리가 아닌 사회적 맥락 속에서 살아있는 법적 정의를 보여주었다.

인간존엄성과 자유와 평등을 기초로 한 공생을 위한 민주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법적 판결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삶에 대해 판결하는 것보다 더 공적인 활동이 몇 가지나 되겠는가? 우리에게 급여를 주는 정부에 통제력을 행사하는 것보다 더 공적으로 중요한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따라서 우리 판사들은, 대중이 우리를 개성도 없고 얼굴도 없는 하찮은 존재로 여기는 것을 우리의 미덕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판결에 책임을 져야 하고, 우리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법에 대한 권위와 복종만을 강요받는 사회가 아니라 법으로써 인간임을 존중받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로 변화할 것이라는 기대는 알비 삭스와 같은 판사들이 늘어날 때 가능할 것이다. 
 

김랑희 인권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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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동 2013-02-21 09:17:07
인권과 법에 대해 쉽고 명확하게 잘 얘기해주신 것 같습니다...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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