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동窓> 삼성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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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동窓> 삼성의 나라
  • 인터넷참여연대
  • 승인 2005.04.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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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20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삼성그룹의 지주회사인 삼성에버랜드의 등기이사직을 사임했다. 나아가 이건희 회장은 삼성전자를 뺀 모든 계열사의 이사직을 사임할 계획이라고 한다. 삼성그룹에서 모종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삼성그룹이 우리 경제에, 곧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한 만큼 우리는 마땅히 삼성그룹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삼성그룹의 운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히 ‘총수’인 이건희 회장이다. 그러니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감시’할 필요가 있다.

사실 삼성그룹이라는 말보다는 삼성재벌이라는 말이 우리에게는 훨씬 더 익숙하다. ‘재벌’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의 뜻은 ‘돈 많은 집안’이라는 뜻이지만, 좀더 정확하게는 ‘거대회사를 소유하고 운영하는 특정 가족’을 뜻한다. 그런데 ‘벌’(閥)이라는 한자어가 시사하듯이 이 말의 뜻은 그다지 좋은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칠 伐’과 ‘문 門’이라는 글자가 합쳐서 만들어졌다. 여기서 ‘문 門’이라는 글자는 가문을 뜻한다. ‘閥’이라는 글자는 어떤 가문이 문 앞에서 다른 가문의 진입을 쳐서 막는 것을 뜻한다. 독점적인, 곧 배타적인 방식으로 특권을 누리는 가문이 바로 ‘閥’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재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많은 돈으로 특권을 누리는 가문’을 뜻한다. 바로 이 때문에 재벌은 군벌이나 학벌이나 정벌과 같은 다른 모든 '벌족'들과 마찬가지로 시대착오적인 개혁대상이다.

재벌의 문제는 전근대적 특권의 향유에 그치지 않는다. 재벌의 존재는 민주주의의 문제와 직결된다. 민주주의는 전근대적 특권체제의 청산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벌이라는 특권가문의 존재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재벌은 특권을 지키기 위해,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를 위협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먼저 그들은 적극적으로 정경유착의 구조를 만들어 활용한다. 16대 대선의 불법정치자금 수사에서 그 일단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듯이 재벌은 천문학적인 규모의 돈을 정치인에게 상납했다. 물론 그 중에서 가장 많은 돈을 바친 것은 삼성재벌이었다. 삼성은 152억원을 바쳤다고 주장했으나, 두 배가 훨씬 넘는 372억원을 바친 것으로 드러났다. 이렇게 막대한 돈을 비자금으로 조성해서 정치권에 바칠 수 있는 것이 재벌이며, 그 중에서도 최대 재벌인 삼성재벌의 능력은 단연 두드러진다. 정경유착을 없애기 위해서는 재벌을 척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재벌은 ‘승자독식의 사회’를 추구한다. 몇 해 전에 삼성전자는 ‘아무도 2등은 기억해주지 않습니다’는 문구의 광고를 상당한 기간 동안 연속으로 내보냈던 적이 있다. 좋게 보자면, 1등을 추구한다는 자신감을 보여준 광고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1등이 되기 위해서 재벌은 먼저 ‘모든 자원의 독식’을 추구한다. 그 핵심은 인력과 자금이라는 두가지 자원이다. 과정의 문제를 철저히 은폐하고 1등의 결과만을 내세우는 것이 야누스적인 재벌의 실체인 것이다. 나아가 ‘승자독식의 사회’라는 것 자체가 반인간적이며 반사회적인 사회이다. 이런 사회를 공공연히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라고 주장하면서 삼성재벌은 자신의 반인간적이고 반사회적인 정체성을 유감없이 드러냈던 것인지도 모른다. 덧붙여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재용 상무는 도대체 무엇에서 1등을 해서 삼성재벌의 후계자가 되었는가? 온갖 편법을 동원해서 전근대적 세습에 성공한 삼성재벌이 1등 운운하는 것은 그 자체로 기막힌 역설이고 비웃음거리일 수밖에 없다.

세째, 재벌은 이른바 ‘총수’의 독단에 의해 경영된다. 총수의 취향과 관심에 따라 세계적인 거대기업의 향방이 좌우될 수 있는 것이다. 총수의 전제적 지배는 그 자체로 극히 심각한 문제이지만, 여기서 나아가 기업의 소유와 운영에 관한 인식의 왜곡을 낳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총수는 ‘주인’이고, 임원은 ‘마름’이며, 직원은 ‘머슴’이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주식회사 제도의 근간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이같은 잘못된 생각이 불행하게도 이 나라에서는 하나의 ‘상식’으로 통한다. 재벌과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는 족벌언론과 언론족벌이 이런 ‘상식’을 널리 퍼트리는 확성기의 구실을 하고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이 점에서도 삼성재벌의 능력은 가장 두드러진다.

이러한 세가지 문제는 재벌을 ‘죄벌’(罪閥) 곧 ‘죄를 많이 지은 가문’, 아니 ‘구조적으로 죄를 많이 지을 수밖에 없는 가문’으로 만드는 가장 일반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삼성재벌은 다른 재벌보다 월등히 뛰어난 두가지 문제를 더 가지고 있다.

첫째, 삼성재벌은 ‘세계 최고의 편법세습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이 기술의 개발을 위해 일년 365일 노심초사하고 있다고 한다. 그 결과 이루어진 것이 이건희의 세습이요, 이재용의 세습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 안에서 삼성이라는 왕국을 건설하고 유지하기 위해 삼성재벌은 그 설립자인 이병철 회장 때부터 최선을 다해온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30대 중에서 최대 부자는 말할 것도 없이 삼성재벌의 이재용 상무이다. 그런데 그는 3조원이 넘는 재산을 물려받으면서 세금이라고는 단돈 16억원밖에 내지 않았다. 30억원 이상을 상속받을 때에는 50%의 상속세를 내야 한다. 국민의 복리를 위해 써야 할 1조 5천억원이 이재용 상무의 금고로 들어가버린 것이다. 삼성재벌이 모든 재벌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인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둘째, 삼성재벌은 ‘세계 유일의 무노조경영 대기업’이다. 이병철 회장은 자기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노조는 허용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유지를 받들어 삼성재벌은 아직도 노조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노동조합의 결성은 노동자의 권리에서 핵심을 이룬다. 노조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노동자를 그야말로 ‘머슴’으로 여기는 것이다. 삼성재벌의 이런 태도는 극단적인 프라이버시 침해사건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얼마 전에 세상을 놀라게 한 이른바 ‘연예인 X화일 사건’은 그 좋은 예이다. 삼성재벌의 계열사인 제일기획에서 일으킨 이 사건은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삼성재벌의 문제가 연예인을 마치 가축처럼 다루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었다. 사실 이 사건보다 더 끔찍하고 엽기적인 사건은 2004년 6월에 밝혀진 삼성SDI의 ‘유령폰 사건’이다. 누군가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핸드폰을 구입하고, 그것을 이용해서 삼성SDI의 노동자들을 조직적으로 위치추적했던 것이다. 추적의 대상이 되었던 노동자들은 모두 노조를 결성하려고 애쓴 사람들이었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에버랜드에서 손을 떼겠다는 것은 이재용 상무의 세습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면서 삼성재벌의 개혁에 대한 이건희 회장의 책임을 없던 일로 하겠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삼성재벌이 주장하는 ‘총수’체제의 개혁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다. 이건희 회장이 이렇게 배짱을 퉁길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나라가 이미 ‘삼성의 나라’가 되었기 때문인가? 거의 모든 언론이 삼성재벌을 구세주로 미화하는 보도를 해대고 있고, 대다수 정치인이 삼성재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수시로 화장을 고치고 있다. 이제 삼성재벌이 직접 권력을 장악하는 일만 남은 것은 아닐까? 이미 숱한 ‘삼성맨’들이 재계는 물론이고 정계, 관계, 언계, 학계에서 지배적 위치를 굳히고 있지 않은가?

재벌은 화창한 봄날의 황사같은 존재이다. 그것이 세상을 뒤덮고 있는 한, 우리는 세상을 맑고 투명하게 볼 수 없다. 그것이 세상을 계속 뒤덮고 있는 한, 우리는 마치 세상이 언제나 그렇게 흐린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세상이 흐린 것이 아니라 황사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재벌의 개혁은 정치민주화를 넘어서 사회민주화로 나아가기 위한 핵심과제이다. 사이비 경제위기론과 총수 구세주론을 유포하여 자신의 지위를 더욱 굳히려는 삼성재벌의 개혁은 더욱 더 그렇다. 삼성재벌을 개혁하고 화창한 봄날을 즐기자.

홍성태(인터넷참여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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