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블루오션 ‘예방치과’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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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블루오션 ‘예방치과’ 확신했다”
  • 윤은미 기자
  • 승인 2014.01.09 22: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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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이 만난 사람들]③ ‘할 말은 하는 학생’을 지지하는 ‘젊은 학장’ 강릉원주대 치과대학 박덕영 교수

 

치과계의 이색인물을 만나고 있는 본지의 기획인터뷰 ‘전민용의 만남’이 강릉원주치대 박덕영 학장을 만나고 왔다.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던 그가 당시 홀대 받던 예방치과를 선택한 이유와 예방에 대한 신념. 1997년 교단에 서기까지와 2008년 국립 치대 최연소 학장이 되기까지, 그의 일대기에 담긴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음악은 ‘다락방’, 봉사는 ‘받는 것’이라는 그는 소위 ‘럭셔리’에 무심했다. 학생들의 침묵을 금으로 삼는 요즘 교육계에서 ‘할 말 다하는 학생들’을 원하는 신세대 학장. 말썽 많은 교내 대자보 사진을 SNS에 떡 하니 올려두는 간 큰 학장.

그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떠오른 한 가지 단어는 ‘천직(天職)’. 예방치과가, 강릉원주치대가
그에겐 운명이지 않을까. 편집자

 
가만있어도 ‘절로’ 정해지는 듯하던 ‘진로’
‘다 썩은’ 아이들 입속…“예방 말곤 노답”
강화서 뒤바뀐 내 운명…“난 예방이 딱”

- 박 교수님을 보면, 늘 하나 궁금한 게 있어요. 과거에나 지금이나 예방치과 전공이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닌데 굳이 예방을 택한 이유가 뭔가요? 성적도 좋았던 걸로 아는데...

“본과 2학년 땐 조직학을 전공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흘러 졸업할 때가 되니 그 ‘진로’라는 게 내가 가만히 있어도 ‘절로’ 결정되는 게 있더라고요. 이를테면 ‘성적’ 같은 여건에 대충 맞춰서 “너 그럴거지?”하는 타인의 시선에 떠밀리게 되는 거죠. 그렇게 교정과를 선택했다가 잘 안됐고, 공보의를 다녀와서 다시 교정과에 지원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강화도로 공보의를 갔다가 생각이 바뀐 거예요. 예방치과를 전공해야겠다고”(웃음)

- 공보의 시절이 특별했나봐요?

“아뇨. 전혀. 착실한 공보의도, 그렇다고 땡땡이도 아니었어요. 평범하게 2년을 보내고 3년차가 됐을 때였어요. 주민들이 감자나 고구마를 갖다 주면 ‘아, 내가 공보의 생활을 잘 하고 있구나’ 했었죠. 거기(강화)에 연대 의료원이 있는데, 우연히 거기서 치과검진 제안을 받았어요. 근방엔 초등학교가 하나 있었는데, 학생 검진을 맡게 됐죠. 거기서 아이들 입안을 들여다보고 기절할 뻔 했어요. 심각했거든요. 내가 그동안 가까이 학교를 두고도, 공보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면서 ‘착각하고 살았구나’ 충격을 받았어요”

- 남은 1년이 바빴겠군요.

“그날부터 방과 후마다 보건지소로 아이들을 불렀어요. 그땐 요령도 없이 하루 20~30명씩 불러서 오후 꼬박 아이들을 보고 매일 7~8시를 넘겨서 진료를 끝냈어요. 그렇게 딱 일주일을 보내고, 허리가 나갔죠.(웃음) 아직 내가 계획했던 인원의 티끌도 못 봤는데 말이죠. 이런 상황에서 내가 교정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회의가 들었죠. 그렇다면 교정을 잘하는 것보다 예방을 잘하는 게 의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그 해 정월에 교정과 시험을 보기로 돼 있었지만, 결국 학교에 남기로 했죠”

- 결정에 어려움은 없었나요?

“사실 와이프의 허락을 받기가 가장 힘들었어요”(웃음)

- 사모님도 치과의사시죠?

“신림동에 개원하고 있어요. 전형적인 1인 치과 시스템이죠. 그곳에서 오래 해왔고, 환자 평도 좋았는데 갈수록 개원환경이 어려워져서 불경기는 피해가지 못했죠. 돈이 다가 아니라는 마음으로 하자고 격려하고 있어요”

“서울치대 최장수 조교로 ‘강릉치대’ 막차 탔다”
강릉-서울 ‘편도 4시간’…“열정 쏟은 건치 그립다”
‘충치예방→치주치료’ 예방 패러다임 변화할 때

- 교수 남편을 둔 와이프 입장에선 가정에 애로사항도 많았을텐데요.

“워낙 착해요.(웃음) 애로사항은 엄청났죠. 제가 아마 서울대 ‘최장수 조교’일거예요.(웃음) 5년을 조교로 있었으니까요. 그 사이 후배 조교가 둘이나 생겼고, 더는 민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장 치과대학은 길이 보이질 않아서 치위생과로 지원했는데 떨어졌어요. 이유는 ‘금방 떠날 사람’이라는 거였죠. 상실감에 빠져 탁 내려놓을 즈음에 강릉대에서 전화가 왔어요. 그 때 강릉대가 한꺼번에 교수 10명을 뽑았는데, 마지막 한 자리가 비면서 막차 타듯이 들어가게 됐어요”

- 그 땐 강릉대까지 오가는데도 한참 걸렸죠?

“꼬불꼬불 대관령 길을 타고 4시간씩 내려갔으니 정말 힘들었죠. 지금 나이라면 못했을 거예요. 갓길도, 휴게소도 없는 그 길에 차를 몰고 다니다 죽을 뻔도 했어요. 건치 회의에 참석할 때만 해도 강릉 가는 막차가 11시 반이었어요. 늘 간신히 막차를 타거나 출발하는 버스를 몸으로 막고 타기도 했죠. 그 와중에도 가장 화가 나는 건 자고가리라 마음을 먹으면 꼭 12시에 다들 집에 간다는 거예요.(웃음) 그 땐 터미널 근처에 숙박업소도 없고, 2~3시간 신문지 덮고 노숙도 해봤죠.(웃음)”

 
- 편도 4시간으로 건치를 오가다니 열정이 대단했네요.(웃음)

“재밌었어요. 그 땐 기획을 하면 뭔가 이뤄진다는 게 즐거웠죠. 하면 된다는 걸 건치에서 목도했어요. 얼마나 신이 났던지. 보건복지부에 전담부서도 생겼죠. 법을 만드는데도 관여하고, 수불사업 성과는 쭉쭉 올라가고, 새로운 구강보건사업이 막 생겨나기 시작할 때였어요. 좋은 시절이었죠. 오히려 요즘이 (정책적으로) 섭섭한 시기에요”

- 그때 비해 일하는 사람도 줄고, 심리적으로도 위축되기도 했고, 사업 방향이 좁아지긴 했어요. 전문의제도는 방어적인 사업이 됐고, 건치 구강보건정책연구회만 해도 ‘보험 확대’ 외엔 딱히 행보가 보이질 않아요. 과거에 정책연구회 회장도 하셨는데, 조언을 좀 해주시죠. 지금 우리는 어떤 사업을 해야 할까요?

“과거보다 전선이 많이 다양화되고 그만큼 복잡해졌기 때문에 상황이 좀 달라졌어요. 다만, 임상적인 역량을 더 강화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너무 공중보건적인 정책에 치우쳐왔지 않나 싶어요. 물론 소득도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예방엔 소홀했죠. 예방과 관련된 새로운 비젼이 필요한 시기예요”

- 예방이 제2의 블루오션이 될 수 있을까요?

“그건 이미 공보의 말기에 예방을 택할 때부터 확신했어요. 1980년대부터 2003년이 넘어서면 치과의사 수가 2만 명이 넘을 거라고 예측됐잖아요. 상당히 어려운 시대가 올 거란 걸 알고 있었죠. 그런데 2003년에도 치과는 여전히 멀쩡했죠. 아니 잘살았어요. 이유는 임플란트였어요. 그 후로 임플란트가 딱 10년을 버텼죠. 그 10년 동안 돌파구를 찾았다면 좀 더 나은 오늘을 맞았을 텐데, 공중보건적인 것에 올인하며 살다보니 늦어졌죠. 이제 남은 정년까지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을 해볼까 해요. 내 스스로의 과제죠”(웃음)

- 임상 예방이라면, 흔히 충치예방을 얘기하는데, 치주병은 어떤가요?

“앞으로는 치주병이 더 중요해질 거예요. 패러다임이 바뀐거죠. 아동치아우식증은 줄어가고 있고, 이를 더 줄이기 위해 적용해야 할 툴들이 더 있지만 치주병은 아직이에요. 치아우식증이랑 비교가 안 되게 취약하죠. 노령 인구가 급속히 늘면서 치주병환자도 늘고 있지만 잡힐 기미가 안보여요. 핵심은 치주병이 안 생기도록 예방이 병행돼야 한다는 거죠. 관리만이 답이기 때문에 치과진료의 패턴도 변화돼야 해요. 그 강력한 툴을 만들기 위해선 근거 마련이나 제도 정비와 같은 선결요건이 있겠죠. 이런 방향으로 가야합니다”

“회전법 잇솔질 바꿔야 해”…에비던스 시대
치과의사 ‘끼리’에서 벗어나 국민설득 나서야…
‘더 재밌게‧쉽게’ 초등생 수준 홍보‧노출 중요

- 저 역시 치주치료를 열심히 하는 치과의사 중 한 명입니다만,(웃음) 예방은 거의 서비스 차원에서 하지 않나요? 예방에서도 원칙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가장 효과적인 교육법이라던지 하는 것들이요.

“그건 저부터 심각하게 반성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해요. 잇솔질만 해도 그렇죠. 회전법으로 양치교육을 시키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어요. 교육현장에 있는 치과위생사들도 회전법에 대한 의심조차 없죠. 임상자료를 쌓아 에비던스를 통해 증명하는 시대가 됐는데도 말이죠. 치태조절 교육에 관한 급여 요청이 들어왔을 때만 해도 우리는 박살이 나야했어요. 치태조절교육의 효과에 대해 신의료평가기술원이 분석을 해왔는데, 글쎄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왜일까요? 천차만별 교육방식을 다 털어놓고 분석하니 그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는 거죠”

- 뭐가 가장 문제일까요?

“더 심각한 건 국민참여위원회조차도 예방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다는 거예요. 그저 스케일링만 익숙한거죠. 국민 호응도 안 따라준다는 거예요. 예방 급여화에 대한 인식이 원체 낮다는 예측은 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 어떻게 개선해야 할까요?

“이제 더는 치과의사 ‘끼리’는 안된다는 겁니다. 이건 치과계 모든 문제에 다 해당돼요. 어떻게든 정보를 꾸리고, 국민들에게 홍보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해요. 예방계뿐만 아니라 치과계는 이제 ‘어떻게 국민을 설득할 것인가’라는 새로운 아젠다에 직면했어요. 초등학교 저학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임팩트 있는 자료를 계속 노출시켜야 해요. 지금의 홍보 방식은 가끔은 오답적이고, 또 구식이죠”

- 좋은 홍보 방법이 있으세요?

“최근 의협이나 전의총의 홍보 방식을 보면 많이 달라졌다고 느껴요. 짤막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서 뿌리기도 하는데, 우리도 충분히 배울만해요. 이를테면 잇솔질도 그래요. 영화에 나온 잇솔질 장면을 모아서 옳고 그른 방법을 평가하는 동영상을 만들면 어떨까요? 좀 쉽고 재밌지 않아요?”

“‘젊은 학장’으로 3년 반 충분히 보람됐다”
몰아세우고‧달래고…“‘신세대답게’ 달라지더라”
세상이 변해도 ‘할 말은 하는 학생’이길

- 학창시절 이야기를 좀 해보죠. 2008년 처음 학장이 됐어요. 상당히 젊은 학장이었는데 어땠어요?

“당시 제가 45살이었죠. 사립대에선 2~3년 위의 선배들도 있었습니다만, 국립대에선 꽤 젊은 학장이었죠. 당시 학장은 원래 밖으로 뛰어나와야 했어요. 학내 문제는 학과장한테 맡기고, 학장은 교육부나 치과계로 많이 뛰어야 했죠. 그런데 그때 유독 학내 현안이 많던 시기였어요”

- 학장을 두 번이나 역임했어요. 보람된 점이나 아쉬운 점이 있었죠?

“2008년 당시에는 하드웨어적인 보람이 있었어요. 발전기금 모집하고, 건물을 리노베이션도 하고 열심히 했죠. 두 번째 학장이 되니까 다른 것들이 보였어요. 소프트웨어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이건 별로 티가 안나요.(웃음) 두 번째 학장 임기에는 학생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공을 들였어요”

- 학생들도 예전하고 많이 달라졌죠?

“학생이 변한 게 아니라 세상이 변했죠. 예전엔 치대를 졸업하면 잘살았지만, 지금은 치과의사의 사회적 입지가 많이 좁아졌죠. 치과의사들이 다시 고쳐나가려면, 사회적으로 생각도 좀 많이 하고 리더십도 키워야 해요. 그래서 시도한 게 학생회를 바꾸는 거였어요. 학생회장을 불러놓고, 때론 윽박지르고, 때론 회유하면서 엄청나게 충돌했어요. 학생회 회무를 회무답게 하는 것, 축제문화를 바꾸는 것, 그런 것들을 끊임없이 요구했어요”

- 결과는요? 학생들이 달라졌나요?

“학생회 자체행사가 틀을 더 갖추고 감사 직책도 개설하면서 회무를 개선해냈어요. 축제에서도 즐기기만 하는 '놀이'보다 사회적 사고나 의미적 요소를 키우기 위한 시도를 해내더군요. 예를 들면, 토론회 같은 거요. 주제는 가볍게 시작했지만, 찬반 토론을 하면서 승자를 가리는 식으로 토론회가 진행되면서 학생들이 주눅 들지 않고 말할 수 있었죠. 요즘 학생들은 ‘말하기’를 두려워하잖아요. 할 말을 할 수 있길 바랬어요”

“치대도 치전원도 정해진 답은 없다는 것”
치대 정원 마스터키 ‘복지부 소관’
정책 활성화…정책연구소 ‘독립성 보장’부터

- 요즘 치과대학이 4+4와 6년제 두 부류로 나뉘었죠? 장단점이 있을 텐데 어떤가요.

“치전원의 존속 문제로 시끄러울 때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어요. 그 전까진 치대생과 치전원생에 대한 선입견도 있었죠. 치전원생들이 ‘돈’이라고 답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예요. 치전원은 ‘얼마나 오래 일 할 수 있는가’를, 치대생이 ‘돈’을 꼽았거든요. 치전원을 치과대학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꽤나 당황했을 거예요. 저에게도 선입견이 있다는 걸, 그리고 세상에 정답은 없단 걸 깨달았죠”

- 치대와 치전원의 각 졸업생들의 면허를 달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어요.

“가지 수가 많은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치전원에 애초부터 반대했지만, 모두가 치과대학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지금정도 비율이라면 괜찮죠. 다만, 치과대학으로 좀 더 많이 넘어 온 게 다행이라는 생각은 들어요. 나이가 좀 더 어리고, 학기도 길고 이런 장점들이 있죠. 인문학 같은 새로운 커리큘럼을 시도하기도 더 유리하구요”

- 얼마 전 한 국제심포지움에서 일본의 치과대학 정원 축소 사례가 소개됐는데요. 획기적으로 정원을 줄일 수 있었던 이유가 국립대의 비율이 높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왔어요. 우리나라는 사정이 좀 다른가요?

“우리 역시 국립대가 6곳, 사립대가 5곳인데 결코 비율이 나쁘진 않죠. 정원은 줄이려고 한다면 언제든지 줄일 수 있어요. 우린 복지부가 정원을 쥐고 있기 때문에 복지부가 결정하면 사립대라해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죠. 대학에 달린 문제가 아니란거죠”

- 장기적인 컨트롤타워가 없는 게 문제군요. 대학이 학문뿐만 아니라 치과의사의 미래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요. 연구소를 별도로 만든다던지.

“그걸 잘 못 뚫어내는 것 같아요. 연구펀드를 모두 바이오나 첨단 분야로 몰아주고 있으니 치과로 올 수 있는 게 없죠. 그나마 투자받기 유리한 곳이 치과의료정책연구소니, 치과계에선 정말 중요한 역할이에요. 지금 상황에선 정책연구소가 어떻게든 임기에 따라 바뀌는 협회장의 생각보다, 더 꾸준하고도 획기적인 역할을 하는 게 압권일 것 같습니다. 더 장기적이고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서 연구하는 거죠”

- 치과의료정책연구소를 독립기관으로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런 우려에서 시작되는 거 같습니다.

음악은 힐링이자 ‘나만의 다락방’
봉사는 주는 게 아니라 받는 것
“치과계 유디 외에 주변 정비할 때”

- 박 교수님 개인사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죠. 음악을 하신다구요?(웃음)

“‘애틱식스’라는 밴드를 하고 있어요. 멤버가 전부 서울사람이라 한 달에 한 번쯤 연습을 하죠. 공연도 일 년에 한 번은 하려고 노력해요. 올해도 5월에 제주 서울치대동창회 골프대회에서 공연을 하기로 했어요”

- 밴드는 치과의사들이 구성원인가요?

“네. 동기 네 명 포함해서 모두 치과의사예요. 음악감독, 스타일링, 섭외, 동영상하고 멀티미디어까지 각자 역할 분담이 돼 있어서 멤버 모두가 대표에요. 밴드 이름은 ‘애틱식스’, 다락방여섯명이라는 뜻이에요”

 
- 언제부터 그렇게 음악을 좋아하셨어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기타를 치기 시작했는데, 밴드는 대학 때부터였어요. 치대 체육대회 때 운동장에다 무대를 펼쳐놓고 동기들과 연주를 했다가, 시작한지 5분 만에 교수님의 철거 명령을 받은 적도 있어요.(웃음) 수위아저씨도 환자 입원실에서 들을 수 있으니 하지 말라고 하셨죠. 그래도 땀 흘리고 연습한 게 있어서 선은 보여야겠다 싶어서 뒷풀이 자리로 갔어요. 거기서 판을 벌리고 연주를 시작했다가 본과 선배한테 혼났죠. 밴드를 하면, 브루주아로 욕을 먹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나중에 밴드가 저항의 상징이라고 각광받는 걸 보니 억울하더군요”(웃음)

- 박 교수님에게 음악이란?

“힐링이요. 골치 아픈 것들을 잠시 잠깐 잊는데 좋아요. 밴드이름 그대로 나만의 다락방 같은 의미죠”(웃음)

- 정말 멋있다. 문화․예술이라는 게 인간의 진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게 분명한가 봐요. 사람들은 예술이 인생의 중심이 아니라, 그저 곁가지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없었으면 인류가 진화할 수 없었던 거죠. 문화․예술이 인간의 생존에도 큰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잖아요.

- 음악 외에 하시는 일이 또 있으시죠?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고 계시는데요.

“그러고 보니 음악하고 비슷한 거 같아요. 봉사활동을 하면서 느낀 건 내가 누굴 돕기보단, 스스로 기분이 좋아진다는 거예요”

- 해외봉사도 많이 하시죠. 어디로 다녀오셨죠?

“학교에서 사회봉사센터장을 맡았던 게 계기가 돼서 해외 봉사를 시작하게 됐어요. 몽골, 캄보디아로 다녀왔는데, 동남아시아로 봉사를 갈 땐 이동식 장비나 약재를 다 가져가야 해서 어려움이 좀 있어요. 그래서 느낀 거지만, 동남아 봉사활동에서는 치료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겠단 생각이 들어요. 이를테면 충치가 잇는 부위만 수기구로 살짝 긁어내고 그 위에 그냥 때우는 방식 같은 거죠. 우리나라에선 불량한 진료지만, 거기선 그조차도 받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연구 결과상으로도 꽤 안전하다고 하구요. 생각보다 많은 진료를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 하시고 싶은 일을 하시면서 사시는 것 같아 부럽습니다. 만약에 치과의사가 되지 않았다면, 박 교수님은 지금쯤 뭘 하고 계셨을까요?

“아마도 뮤지션?”(웃음)

- (웃음) 그것도 좋네요. 마지막으로 치과계에 하시고픈 말씀이 있다면요? 혹은 건치에 바라는 이야기도 좋고요.

“건치야 늘 어려운 상황에서도 꿋꿋이 해오고 있으니까요.(웃음) 요즘 타 단체들도 세대를 이어가는 게 쉽지 않은 상황인데, 건치도 결국 신세대가 얼마나 개입을 하느냐에 많은 게 달려있겠죠. 그러려면 형식상 지금보다 훨씬 더 경쾌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즐거운 방식으로, 또 가벼운 프레임으로 바뀌지 않으면 이제 어렵다는 거죠. 강남스타일 같은 패러다임? 또 혼전동거, 하숙집 같은 가벼운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토론? 그런 것들이요. 건치에 변화가 필요하다면 그런 거죠”

- 치과계에도 한 말씀 해주신다면?

“우선 치협은 유디와 싸움을 이어가는 데는 반대할 사람이 없겠지만, 이제 그외의 것들을 정비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거 무엇이든 핵심은 이제 국민을 설득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되는 시대가 왔다는 거예요. 전략적으로 또 조직적으로 전술을 배치하고, 거기에 탄약을 제공하기 위한 브레인 그룹을 모아주는 역할을 이제 치협이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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