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의사를 부탁해
상태바
‘좋은’ 의사를 부탁해
  • 김랑희
  • 승인 2014.03.13 11: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랑희 인권활동가, '불온하고 위험한 인권이야기'

 

가난한 나의 친구들이 내게 조심스레 부탁한다. 병원에 가야 하니 좋은 의사를 소개해달라고. 여기서 ‘좋은’ 의사란 실력도 실력이지만 바가지를 씌우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가난한 해고자와 활동가들은 병원에 한번 가는 것도 망설이고 망설이다 혹사당한 몸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병원을 찾게 된다.

비용이 부담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의료비를 지출할 경제상황이 충분하지 않기도 하지만 혹시나 과잉진료를 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들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 의사 혹은 병원은 비용적인 면에서 신뢰가 적다는 것이다. 의사가 권해주는 치료나 검사가 일정 정도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버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친구의 소개로 가는 의사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의사이지만 믿을 수 있다.(이 기회를 빌려 가난한 환자들을 진료하는데 신뢰를 보여준 친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미래의 가난한 환자들도 잘 부탁한다.)

사실 자신이 사는 동네에 신뢰를 쌓을 수 있는 의사가 있다면, 그런 병원을 찾는 문턱이 높지 않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나. 나는 종종 의료생협이 가까이 있는지 확인하고 의료생협에 가입하라고 권한다. 혹은 예방접종은 보건소에 가서 하라고 한다. 하지만 의료생협에 가입하거나 보건소를 찾아가기보단 명의가 어디 있는지, 특정 질환을 잘 보는 병원이 어디 있는지 묻고 찾아가기 마련이다.

이미 병원은 영리를 목적으로 운영하고 있고 진료는 전문가의 행위이니 합리적인 가격과 실력을 겸비한 의사, 병원을 찾는 일 외에는 환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일까? 온라인 공간에서 의사와 병원에 대한 품평을 공유하고 선택하는 일 외에 환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일까?

건강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다. 건강한 몸과 삶을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넘쳐나는 정보에 불편한 마음도 불쑥 올라온다. 텔레비전에 건강 관련 프로그램이 나오고, 특히 명의라고 소개되는 사람들이 등장해 각종 의학 지식과 상담이 오간다. 건강한 식생활과 라이프 스타일 등이 소개되고 건강식품과 병원광고가 곳곳에 눈에 띈다. 홈쇼핑에서 보험상품이 팔리고 보험광고가 쏟아져 나온다. 그만큼 중요하고 관심도 높다는 것이고 한편으론 상품의 가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 속에 있다 보면 내가 건강을 구매하고 있는 것인가란 착각이 들 정도다. 건강도 쇼핑이 되었다. 쇼핑이 되었다는 것은 결국 구매력 있는 소비자가 더 많은 혹은 질 좋은 건강을 살 수도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우리는 건강이나 생명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라고 ‘원칙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우리는 건강과 비용이 무관한 삶을 사는 것일까?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라는 것을 당연히 여기면서도 현실에선 마치 건강은 개인적인 문제인 양 개인이 책임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건강관리, 건강한 생활, 질병 예방, 병원에 제때 방문하여 치료받는 것, 비용에 대한 대비까지 개인의 몫이고 나빠진 건강의 해결은 전문가(의사)의 몫이 된다. 그러니 용한 전문가를 찾는 것도 개인의 능력-정보력이든, 인맥이든, 경제력이든-이 된다. 그러나 건강을 전적으로 개인이 관리・해결할 수 있는 것일까?

기술은 발전하고 병원도 늘어나고 새로운 약도 개발되었다. 우리(사회)는 좀 더 건강해졌을까? 물론 평균수명은 길어졌다. 그런데 자살률 OECD 국가 1위, 산재사망률 OECD 국가 1위, 재난적 의료비 발생률이 OECD 국가 1위인 나라가 건강한 나라일까? 죽음을 가까이에 두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최신 기계와 신약, 보험상품만 늘어나도 괜찮은 걸까?

건강을 개인이 책임져야 할 몫이라고 하면 사회가 책임져야 할 부분은 감춰버리는 효과가 나타난다. 개인의 건강과 사회와의 관계는 이미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고 사회불평등과 건강의 상관관계는 수많은 통계로 드러났다. 국제사회는 빈곤과 불평등이 건강을 악화시키고 생명을 앗아가는 것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빈곤과 불평등의 확산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가치,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만든 문제다. 실제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건강에 미친 영향은 이렇게 나타난다. 제3세계 국가(또는 개발도상국)의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도시인구는 팽창하고 있다. 빚에 몰린 국가들이 IMF와 세계은행의 강요된 구조조정프로그램을 시행하자 농산물생산자들은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어 도시로 이주하게 됐다.

도시가 더 이상 일자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지만 가난한 농부들은 가뭄, 인플레이션, 이자율 상승, 상품가격 하락 등 외부적 충격에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다.(캄보디아 영세 농민의 약 60%는 의료비 채무로 고향을 떠난다.) 도시에는 점점 이주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슬럼이 늘어간다. 슬럼은 공용화장실을 나눠 쓰고, 물이 부족하며 그나마 깨끗하지도 않다.

거리 곳곳에 쓰레기가 쌓여 넘친다. 더러운 물과 비위생적인 환경은 질병을 만들고 가난한 사람들의 병원비는 소득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깨끗한 물을 마시기 위해서는 민간 식수 판매업자에게 비싼 요금을 내야만 한다. 슬럼에 사는 이들에게는 자신의 건강, 주거, 식수를 책임져주는 국가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 공공성, 주거 공공성, 의료 공공성의 자리에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채워졌다.

이렇게 국민건강에 취약하고 무책임한 사회의 문제는 가난한 나라들에서만 있는 일일까? 한국사회에서도 IMF 이후 세계화, 공공부문 개혁, 효율성 등의 말들이 사용되면 꾸준히 시장의 논리가 공공성을 대체하게 되었다. 몇 가지 일들을 돌아보자.

노무현 정부 때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은 의료급여 환자의 진료비 오용·남용을 줄이겠다며 환자들한테 본인 부담금을 물리고 의료기관 이용을 제한하는 한편, 파스 등을 지급 대상에서 제외하는 내용 등을 내놓았다. 의료급여 환자의 진료비 오·남용 근거로 한 사람이 1년에 파스를 5,000개도 넘게 사용했다며 혈세를 잡아먹는 도둑 취급을 했다.

의료급여 환자들이 왜 파스로만 고통을 버티는지 그 원인을 살펴보아야 할 장관은 재정절감과 효율성을 들먹이며 가난한 환자들의 비참한 의료현실을 도덕적 해이로 뒤바꿔버렸다. 이런 입장이 결국은 지난해 진주의료원의 문을 닫게 만드는 결과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얼마 전 송파구 세 모녀의 죽음도 빈곤과 질병과 의료비, 주거 등 촘촘하지 못한 사회적 안전망이 원인이다. 박씨 남편은 12년 전 방광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의 긴 투병생활은 빚을 남겼다. 세 식구는 예전보다 더 열악한 주택으로 이사해야 했지만, 식당일로 생계를 꾸리는 박씨에게 월세는 감당하기엔 벅찬 액수였다.

가계의 소득을 책임지던 박씨가 팔을 다쳐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당뇨와 고혈압 환자인 큰딸과 편의점에서 간간이 아르바이트하는 작은딸은 신용불량자로 안정적인 경제활동을 하기 쉽지 않았다. 아픈 딸은 병원비가 없어 치료를 받을 수도 없고 최저생계비, 산재보험, 실업급여 그 어떤 사회보장제도에도 세 모녀는 자격기준이 되지 못했다.

세 모녀가 소득이 끊기며 생활고에 시달리다 극단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사회를 반성해야 할 대통령은 제대로 알지 못해서, 제도를 활용하지 못해서라며 가난한 이를 탓한다. 질병과 노동력 상실로 발생한 빈곤이 결국 자살로 이어지는데도 해결책을 고민하지 않는 잔혹한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오늘도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고 있다.

1948년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는 ‘건강’을 “다만 질병이 없거나 허약하지 않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정신적 및 사회적으로 완전히 안녕한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정의는 ‘건강’의 문제를 개인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 살펴봐야 할 문제로 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건강할 권리’는 ‘사회권’으로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건강할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건강’을 결정하는 다양한 요소들 모두에서 권리를 확보해야 한다. 실질적인 공공의료를 실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개인과 사회는 자신의 건강과 관련된 문제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또한, 건강은 의료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안전한 물, 적절한 위생, 안전한 음식, 영양, 주거, 건강한 환경, 건강 관련 교육과 정보, 성교육과 출산에 관련된 교육, 차별받지 않을 권리 등이 그것이다. 성(gender), 빈곤, 사회적 배제 등은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들이다. 건강권은 의료만이 아니라 이들 요소를 포괄해야 한다.

지난 월요일 의사협회는 의료 영리화를 반대하며 파업을 진행했다. 건강과 의료는 이미 여러 가지 상품의 모습으로 우리 삶에 있지만, 의료공공성을 포기하자는데 찬성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래서 한 포털에서 진행한 설문결과로 의사협회의 파업 지지율이 87%나 되는 것이다.

의사들이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위해 의료공공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시작했으니 좀 더 부탁을 해야겠다. 앞으로 의료제도의 문제와 더불어 건강을 위협하는 사회적 문제들에 관해서도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내주었으면 한다. 정부는 환자를 인질로 파업을 벌인다지만 의료공공성의 파괴는 국민의 삶 전체를 인질로 삼고 있다. 정부는 새로 추진하는 제도를 마치 의사들과 정부가 협상하면 되는 것으로 축소하려는 듯하다.

의료공공성의 문제는 의사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의 호들갑과 엄포에도 국민들이 지지를 보내는 것은 그것이 우리 모두의 문제, 삶과 사회 전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질문으로 돌아와서 환자 또는 국민이 할 수 있는 것은 ‘좋은’ 의사를 잘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의사가 더 많아지도록 의사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