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협 집단휴진과 흰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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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협 집단휴진과 흰 물결
  • 채민석
  • 승인 2014.03.25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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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민석(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부장)

 

지난 10일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는 2000년 의약분업에 반대한 병의원 폐·파업 이후 14년 만에, 비록 하루에 불과했지만 집단휴진을 성사시켰다. 정부 예상과는 달리 이 날 하루 집단휴진에는 일반 개업의뿐만이 아니라 세브란스병원, 서울성모병원을 비롯한 50여 곳의 병원 전공의들도 참여해,  정부가 추진하는 의료민영화에 대해 수많은 평범한 의사들도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음을 보여줬다.

게다가 이번 달 24일부터 29일까지 계획되었던 6일 동안의 집단휴진에는 서울대병원과 서울아산병원 전공의들도 동참하겠다고 밝혔을 정도로, 의료민영화에 브레이크를 걸 동력을 의사 사회가 주도하여 키워가고 있었다.

물론 하루 집단휴진 관련 의협의 대정부 요구안에는 수가제도 개선(사실상 수가 인상), 지불자와 공급자 동수로 건정심 구조 개편(가입자 배제), 재진료를 초진료 수준으로 인상, 보건소 진료기능 폐지 등 국민건강과 전혀 관계없고 오히려 국민에게 부담을 지우게 되는 우려스러운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원격의료 철회, 투자활성화 대책 및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에서 의료분야 제외와 같은 의료민영화 반대 요구를 전면에 내걸었기 때문에, 치협 등 직능단체를 비롯하여 보건의료노조, 보건의료단체연합, 인의협, 참여연대 등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가 집단휴진에 지지를 보냈던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광범한 지지로 인해서 정부는 원격의료와 관련한 의료법의 국무회의 상정을 연기하겠다며 한 발 물러서기도 했다.

하지만 의협은 이런 의료민영화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열망에 스스로 찬 물을 끼얹어버렸다. 지난 17일 의협은 사실상 원격의료를 국회에서 논의하고, 영리자회사를 수용하며, 공급자의 이익 증대를 위한 건정심 구조 개편을 골자로 한 제2차 의정협의안을 발표했고, 24일부터 예정된 집단휴진은 결국 회원 총투표를 통해 부결되었다.

이는 사실상 정부가 추진하는 ‘투자활성화 대책’, 다시 말해 병원을 재벌들의 투자처로 내줘 결국엔 의료의 질이 악화되고 국민의료비를 상승시킬 의료민영화 정책을 의사들만의 경제적 이익과 맞바꿔버린 것이다. 심지어 협의안에는 “최근 불거진 왜곡된 의료민영화 논란에 대해서는 공동의 우려를 표명”한다며 그들을 비판적으로 지지해온 노동시민사회단체를 적대시하는 문구까지 포함되었다.

한편 지난 2월 스페인에서는 의사를 비롯한 의료인들이 긴축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마드리드 지역정부가 2012년부터 신자유주의 의료정책의 일환으로 6개 공공병원을 민영화하고 의료서비스 예산을 삭감하겠다고 밝힌데 대해 ‘마드리드의료전문인협회(AFEM)’는 5주간의 총파업을 비롯해 15개월간 병원이 아닌 거리에서 의료민영화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이에 최근 마드리드 지방 고등법원이 의료민영화 조치를 중지시키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의료인들이 주축이 된 의료민영화 저지 투쟁이 결실을 거둔 것이다. 의료인의 상징인 흰 가운을 입고 거리에 나서 의료민영화를 반대를 외쳤던 이 시위대를 사람들은 ‘흰 물결(Marea Blanca)’이라고 불렀다.

물론 스페인의 ‘흰 물결’ 시위에 나선 의사들의 조건을 우리나라에 그대로 대입시키긴 곤란하다. 스페인은 정부가 조세로 국민의료비를 충당하는 국가보건체계(NHS)를 가진 나라로, 마드리드 정부의 공공병원 민영화 조치 자체가 국가공무원 신분인 의사의 일자리 및 노동조건에 악영향을 미치게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의사는 공공병원 민영화의 당사자로서 투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의사는 그 의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이윤추구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1948년 국제의사 윤리헌장(International Code of Medical Ethics)이 무색할 정도로 의료제도에 관한 국가적 계획이나 규제가 없다시피 한 경쟁적인 의료체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한국 의사들의 이해관계는 정부의 통제(‘관치의료’)에서 벗어나거나 경영적인 측면에 방점이 찍혀있고, 이번 의정합의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의협은 의사들도 국민의 건강권이라는 공공적인 요구로 집단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얻어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그들 스스로가 처음부터 일궈낸 성과가 아니라 작년 진주의료원 폐업 반대 투쟁, ‘비상경영’에 반대하는 서울대병원 파업, 철도노조의 철도민영화 반대 파업 등 공공성을 지켜내고자 했던 일련의 사회운동에 대중들이 공감을 표시하는 와중에 생긴 여론이었다.

그동안 의료민영화 반대 여론을 의협이 주도해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의료민영화 투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이는 의료민영화 반대 선전전과 100만 서명운동을 진행하다보면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의료는 상품이 아니고, 의료민영화가 “돈 없는 사람 다 죽이는(선전전을 하다보면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이다)” 정책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의사들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이제 의료민영화로 노동조건이 악화될 병원노동자와 의료민영화에 반대하는 국민들이 주축이 되는 새로운 한국판 ‘흰 물결’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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