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12%, 진료 중 성적 수치심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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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12%, 진료 중 성적 수치심 느꼈다
  • 이두찬 기자
  • 승인 2014.04.09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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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위, 의료기관 성희롱 실태조사 결과 ‘대응 제도’ 절실… 공익재단 공감 “의료진에 대한 적절한 교육 방안 필요” 강조

 

6개월 전 종양으로 자궁적출수술을 받은 A씨는 다시는 병원에 가고 싶지 않다. 정기 검진을 위해 유방 초음파검사를 받던 중 발견된 "종양을 떼내야 하느냐"고 묻자 의사는 "필요 없다. '아래'도 수술한 사람이 '위'도 하고 싶으냐"며 불쾌감을 느끼게 했다. 의사는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자 "너무 황홀해서 그러시냐"고 되묻기까지 했다.

또한 배가 아파 병원에 간 B씨는 "설사를 해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청진기를 브래지어 안쪽에 갖다 대면서 '남자친구와 성관계를 해보았냐, 너는 그런 것 하면 안 된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며 매우 불쾌해 했다.

민간 성폭력상담소가 접수된 상담 사례 중 일부다. 병원 진료 과정에서 불필요한 성적 접촉이나 언어적 성희롱을 당했다는 내용이다. 성인 여성 10명 중 1명 정도는 이 같은 '성적 불쾌감'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성희롱을 경험했다는 여성들은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필요한 의료행위인지 여부를 파악 못해 쉽게 문제제기를 하지 못했다고 입을 모았다. 전문가들은 성희롱 예방 매뉴얼이나 가이드라인 등을 마련하는 게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지난 7일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이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의 의뢰로 작성한 '진료과정 성희롱 예방기준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최근 5년간 의료기관을 이용한 성인 여성 1000명 중 11.8%(118명)가 성적 불쾌감이나 수치심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성희롱을 경험했다고 답한 118명(중복응답 포함 255건)의 사례를 분석한 결과, 제대로 가려지지 않은 공간에서 진찰·검사를 위해 옷을 벗거나 갈아입어 수치심을 느꼈다는 답이 46건으로 가장 많았다.

또한 ▲의료인이 외모나 신체 등에 대해 성적인 표현을 했다(30건) ▲진료와 관계없는 사람이 듣는 상황에서 성생활 등을 물었다(25건), ▲진료와 상관없이 성적으로 신체를 만지거나 접촉했다(23건)는 대답이 뒤를 이었다.

 

이러한 성희롱은 의료기관 규모가 작은 의료기관에서 더욱 빈번히 일어났다. 피해 사례는 100병상 미만 병원급(51.7%), 10병상 미만 의원급(50.8%), 100병상 이상 종합병원급(24.6%), 상급종합병원급(11.9%) 순이었다. 보고서는 "대형의료기관에서는 성희롱 예방교육이 비교적 주기적으로 이뤄지고 문제된 의료진에 대한 규제나 환자 권리보장 방안이 마련돼 있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진료과목으로는 내과(50.8%) 산부인과(45.8%) 정형외과(24.6%) 한의원(21.2%) 치과(20.3%) 순으로 많았다.

실제로 인권위 등의 차별시정기구에 '의료기관에서 성희롱을 경험했다'는 진정이 접수되기도 했다. 주로 설명이 없는 상태에서 신체를 접촉하거나 옷을 벗으라고 요구했다는 내용이었다.

"허리 통증 교정 치료를 하면서 의사가 피해자의 팬티를 엉덩이까지 내리고 엉덩이를 주무르는 등 성적 수치심을 줬다." (2008년)

"복부 방사선 촬영 도중, 영상의학과 방사선사가 브래지어를 벗으라고 하면서 뒤에서 갑자기 브래지어 끈을 풀었다." (2009년)

"가벼운 감기로 청진기 진찰 중 내과 의사가 아무런 사전 설명이나 동의 없이 옷 안에서 브래지어를 들고 가슴에 청진기를 갖다 대어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 (2011년)

현직 의사들 역시 '실제로 성희롱이 일어나기도 한다'고 증언했다. 한 의료진은 공감과의 면접조사 과정에서 "건강검진 하는 사람들이나 초음파하는 남자 의사들은 간혹 젊은 여성이 오면 일부러 촉진해보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성적 불쾌감을 경험하더라도 아무 행동을 하지 않거나(52.5%), 해당 의료기관에 다시 가지 않는 등(31.4%)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병원 직원에 이의를 제기하거나(6.8%), 병원 책임자에게 조치를 요구하는 경우(4.2%)는 극히 드물었다. 그 이유는 진료 과정의 일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46.9%), 적극 대응한다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아서(30.2%) 등이 꼽혔다.

연구진은 보고서에서 "성희롱을 예방하기 위해 대응 매뉴얼이나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는 게 시급하다"고 말했다. 또 "의료기관에서도 신체접촉이 불가피할 때는 미리 환자에게 설명하고, 간호사 등이 동반한 상태에서 진료를 진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의료진이 대학 교육 과정 때부터 성희롱 예방 교육을 받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도 강조했다.

성희롱이 발생했을 때 대응하는 절차를 강화하는 것도 필수라고 연구진은 언급했다. 이들은 "현재 우리나라는 성희롱 구제를 인권위만 담당하는 반면, 영국·프랑스 등은 의료단체가 자체 조사를 실시해 징계를 하는 경우가 많다"며 "성희롱 대응 제도나 절차를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건강세상네트워크 김준현 연구위원은 "의료행위는 밀폐된 진료실에서 이루어지고 신체 접촉도 많기 때문에 성적 수치심을 느낄 여지가 많지만 지금까지 의료계에서는 이를 당연시 해왔다"며 "병원 내에서 윤리 규정과 교육을 강화하고 지방자치단체나 보건소 차원에서 환자를 보호하기 위한 상담 창구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인권위는 이번 실태조사와 관련해 오는 17일 오후 2시 토론회를 개최한다. 토론회에는 대한의사협회, 대한한의사협회, 보건당국 등의 관계자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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