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섭 “참된 리더는 살아온 행보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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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섭 “참된 리더는 살아온 행보로 말한다”
  • 강민홍 기자
  • 승인 2014.04.13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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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이 만난 사람들]⑤ 대한치과의사협회 최남섭 29대 협회장 후보…“진정한 리더는 판사이묘인 거전보과는 하지 않는다”

 

4월 10일 목요일 점심시간 교대역 부근 최남섭 후보의 치과에서 부랴부랴 그를 만났다. 최남섭 후보나 본지나 서로가 다급해 졌기 때문이다. 결국 최 후보는 지방 선거인단을 만날 스케줄을 취소하고, 전 대표는 점심시간을 전후한 환자 예약시간을 변경하고 간신히 만날 수 있었다.

 

타고난 조직 체질! ‘회무는 천성’

전민용(이하 전) : 자칫 기획 자체가 무산될 뻔 했어요. 많이 바쁘시죠?

최남섭(이하 최) : 선거란 게 다 그렇죠 뭐. 계속 약속을 차일피일 미뤄서 정말 미안하게 됐습니다. 선거운동 하기도 바쁜데, 남은 임기 부회장 회무까지 신경 쓰려니 시간 빼기가 만만치 않았어요. 양해 구합니다.

전 : 자! 어릴 적 얘기부터 해보죠. 운동을 매우 좋아했다고 들었어요.

최 : 음...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큰 어려움 없이 학창시절을 보냈어요. 부친이 축구선수 출신이어서 인지 초등학교 시절부터 운동에 소질이 있는 편이어서 친구들과 어울려 밖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어요. 초등학교 때는 야구선수 생활도 3년 정도 했죠.

 
야구부도 하나의 조직사회니까, 어렸을 때부터 조직사회를 알게 됐고, 선후배들과 잘 어울리는 법도 알게 됐던 것같아요. 유년기부터 야구부 등을 하다보니 조직 생활을 일찍부터 경험해서인지 저는 조직생활에서 많은 즐거움을 얻았어요.

제 지금 키가 중학교 때 키인데, 중·고 시절에도 중간 이상의 체격조건도 갖춘 데다 리더쉽도 인정받아 학생회, 서클 활동 등을 활발히 했죠.

전 : 야구부 포지션은 뭐였나요?

최 : 유격수 였어요. 타격실력도 꽤 있어서 주로 3번타자를 맡았죠. 전 중학교에 야구부 특기생으로 가고 싶었지만, 아버님이 반대하셨어요. 그리고 용산중학교에 입학했는데, 그 학교에는 야구부가 없어서 중단할 수밖에 없었죠.

전 : 운동을 그렇게 좋아하고, 각종 활동도 많이 했는데, 공부는 잘 하셨네요?(웃음)

최 : 아무리 놀아도 해야 할 학업만큼은 꼭 하자가 제 신조에요. 누구한테 과외를 받아본 적은 한번도 없어요. 아. 딱 한번 있는데, 박사학위 논문 제출 자격시험 볼 때였어요. 제2외국어 시험을 보더라구요. 고등학교 때 불어와 독어를 배우기는 했는데 막상 10년이 지난 후에 다시 하려니 안되더다구요.

마침 프랑스에 유학 갔다 온 처제가 있어서 한달정도 과외를 받았죠. 그 때 박사학위 때문에 같이 과외수업을 받은 사람이 바로 김철수 후보였어요.(웃음)

전 : 치과대학에 입학하게 된 계기는요?

최 : 사실 전 치과의사가 될 생각이 없었어요. 전공도 문과를 선택했죠. 법대를 가고 싶어서요. 수학적인 사고를 하는 것보다는 인문학 쪽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조직사회를 경험하다 보니까, 내가 남들하고 어울리는 직업을 갖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법대를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법대를 못갔고, 다른 과를 다니다 여러 진로에 대한 고민 끝에 문리대에 속해 있던 치의예과를 들어갔어요.

문과에서 이과로 전환해서 배워보지도 못한 물리와 화학 등을 예과 때 공부하느라 애를 먹었죠, 화학은 F학점을 받아서 겨울방학 때 고등학생들 다니는 단과반에 다니기도 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한 선배들이 꽤 있더군요.(웃음)

 
전 : 본과 때는요? 축구부 하셨죠?

최 : 진료서클도 하고 축구부 활동을 했는데, 거의 축구부에 올인했다고 할 수 있어요. 제가 조직생활이 몸에 배서인지 축구부에서 1학년 때부터 많은 일을 했고, 3학년 때는 주장을 맡았죠. 평상시에는 오후에 관악산까지 가서 운동을 해야 했고, 축구부에서 주말봉사진료도 가고, 방학 때는 무의촌 진료활동도 갔어요.

전 : 포지션은 뭐였나요?

최 : 링커(미드필더)였어요. 본과 4학년 때는 윙백을 맡았고.

전 : 우연인지는 모르겠는데, 대학 때 운동부를 했던 분 중 회무활동을 하는 분들이 많은 것같아요.

최 : 단결력도 있고, 조직생활을 해봤기 때문인 것같아요. 훈련이 돼 있다고 봐야 할까? 평생 살아가면서 저에게는 좋은 경험이 됐다고 생각해요.

전 군복무 3년 동안 보병사단에서 보병들과 같은 환경에서 생활했는데, 매우 행복했어요. 그 3년이 내 인생 최고의 황금기가 아니었나 할 정도로요. 사병들과 함께 몸으로 부대끼고 생활하는 것이 매우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전 : 이제 집안 얘기를 해보죠. 사모님은 어떻게 만나게 되셨나요?

최 : 군대 제대하고 치주과 수련을 받고 있었는데, 당시 와이프는 구강외과 병동의 간호사로 근무를 했었어요. 병원 내에서 오고가며 안면은 있었던 거죠. 근데, 묘하게 한 지인이 우리 장인하고 아버님하고 중간에서 서로 친한 친구 사이였어요.

서로 얘기가 오가다 ‘둘 다 서울대치과병원에서 근무한다더라. 한번 만나봐라’ 이런 얘기가 나왔나봐요. 여차저차 해서 결혼하게 됐죠. 나중에 안 사실인데,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여러 가족들이 함께 창경원에 놀러가서 찍은 사진이 있는데, 그 사진 속에 집사람도 있더군요.(웃음)

집사람은 한양대를 나왔는데, 결혼 이후 대학원을 마치고 동남보건대학에서 강의를 하다 지금은 쉬고 있어요.

전 : 자녀분은요?

최 : 딸이 둘인데, 아직 한명도 (시집을) 못보냈어요.(웃음) 둘 다 서울 소재 대학에 하나는 경제학, 하나는 경영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직장을 잘 다니고 있어요.

전 자식 교육 시킬 때 성적표를 들여다 본 적이 한번도 없었어요. 학점을 따기 위한 공부보다는 미래를 위한 공부를 하라고 가르쳤죠.

오랜 기간 회무에 매달리다 보니 집에 매일 늦게 들어오고, 얘들 교육에 신경도 제대로 못쓰고, 학원 픽업하는 것도 몇 번 못해봤어요. 그런 것들이 미안한데, 다행히 얘들이 잘 따라와 줘서 너무 고마워요.

 

달동네 치과! 진료 자체가 봉사였다

전 : 개원 얘기를 해보죠. 언제 개원하셨죠?

최 : 1985년 5월에 사당동의 달동네에 처음 개원했어요. 동네 사람들이 대부분 없는 사람들이어서 매우 힘든 개원환경이었죠. 없는 사람들이 정말 너무 많았어요. 그러다 2000년 1월 그 동네가 재개발이 되면서 서초동 현재의 치과로 이전했죠.

전 :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다면요?

최 : 아까도 말했지만, 너무 없는 사람들이 모인 동네에 개원하다 보니 정말 상태가 안좋은데, 계속 치료를 해야 하는데, 아픈 것만 해결되면 치과에 안오는 분들이 많았어요. 계속 치료 받게 하느라 참 힘들었죠. 다들 동네주민 분들인데, 치료비와 상관없이 치료해줘야 할 상황이 비일비재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를 한명 뽑으라면 개원 초년병 시절에 동네주민 한분이 나와 비슷한 연령의 한 치주환자를 소개해주셨는데, 안양에서 사시는 분이었어요. 소개로 와서 지금까지도 Re-call에 계속 응해주시고 열심히 다니고 있어요.

 
전 : 회무 얘기를 해보죠. 30년 회무경력이라 하셨는데, 85년도에 개원하셨잖아요?

최 : 맞아요. 만 30년. 85년에 개원하자마자 회무를 시작했어요. 개원한지 일주일 됐나? 선배 한분이 보따리를 들고 제 치과를 찾아오셨더라구요. 그 보따리를 건네며 반장을 하라는 거에요. 어떡해요? 선배가 하라는데…. 그렇게 반강제적으로 얼떨결에 시작했어요.

당시 반회 인원이 25명이었는데, 보따리 안에는 회비 납부내역 등 장부가 들어있더라구요. 당시는 컴퓨터가 보급이 안돼 있던 때라, 타자기로 일일이 쳤어요. 그리고 그 이듬해에 컴퓨터를 구입해서 다 전산화시켰죠. 이래뵈도 제가 회무의 디지털 시대를 연 장본인이에요.(웃음)

그 후 89년인가부터 동작구치과의사회 후생이사를 했는데, 1박2일 산행도 하고, 월례회 모임도 갖고, 7개구 체육대회와 월례골프대회 등 정말 많은 일들을 했어요.

그 다음 총무이사, 부회장을 하고 2001년 2월 회장으로 취임해야 하는데, 재개발 때문에 치과를 옮기면서 포기했죠. 또 1년 후 2002년 2월에는 서울시치과의사신용협동조합 이사장이 될 차례인데, 그때도 서치 부회장 하느라 양보해야 했어요.

전 : 서치신협 일은 언제부터 하셨나요?

최 : 90년 초 안정모 현 대의원총회 부의장님이 서치신협을 만드실 때 저를 추천해서 위원으로 참가해 일을 했어요. 그리고 안정모 선배가 이사장을 할 때 처음 이사로 들어갔고, 부이사장까지 했죠. 2002년 이사장을 맡을 차례였는데….

‘신의’와 ‘정도’를 지키는 게 신념

전 : 자! 이젠 본격적으로 공인 최남섭을 얘기해보죠. 구회장과 서치신협 이사장 자리를 양보했지만, 대신 2002년 서치 부회장으로 화려하게 데뷔했어요. 이수구 회장님하고는 원래 돈독한 사이셨나요?

최 : 돈독한 사이로만 치면, 같이 축구부를 했던 안성모 선배가 더 돈독했죠. 사실 이수구 선배는 학교 다닐 때 알지도 못했어요.

제가 치주과 동문회 총무 일을 할 때 몇가지 도움을 받을 일이 있었는데, 이수구 선배가 흔쾌히 도와주셨어요. 그렇게 인연을 갖고 있다가, 동작구 총무이사로 대의원 생활을 같이 하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게 됐죠. 그리고 1999년 이수구 선배가 서치 회장에 도전했을 때 캠프에서 공보담당 참모로 참여했고, 낙선 후 열린치과의사회(현 열린치과봉사회)를 함께 만들면서 지금의 인연이 만들어진 겁니다.

열린치과의사회 조직할 때 정말 좋았어요. 지금은 엄청난 적립금과 회원을 확보한 국내 최대 규모의 치과진료봉사회잖아요. 그 기초작업을 제가 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전 : 안성모 전 회장 얘기가 나왔으니, 잠깐 얘기를 해보죠. 지금은 극과 극에 서있잖아요?

최 : 한번 인간관계를 맺어서 신의가 생기면 내가 먼저 배신하거나 멀리하지 않는다는 게 제 신념이에요. 제가 먼저 떠나본 적이 한번도 없어요.

그런데 회무를 오래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적이 생기더군요. 회무 때문이 아니라 선거를 치를 때마다 적이 생겨요. 그리고 제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게 안성모 선배와의 관계에요.

사실 2002년 이수구 선배의 재출마를 가장 강력히 권유한 장본인이 안성모 선배였어요. 저도 어쩌다 부회장으로 서치 회무를 맡게 됐는데, 한번 선거를 치르니 그 다음부터는 선거 때만 되면 빠질 수가 없더라구요. 2005년 이수구 선배가 서치를 마치고 협회장에 도전하려 할 때 제가 말렸어요. 다음에 하시라고. 그래서 부회장으로 간 거에요.

그런데 그 다음에 안성모 선배가 또 나오겠다는 거에요. 나이도 많은 선배가 한번 양보했으면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물론 친한 후배가 중립을 지켜주길 바랬겠죠. 서운했겠죠. 하지만 당시 제가 그런 입장을 취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요?

 
전 : 잠시 딴 길로 샜는데, 본래 얘기로 돌아오죠. 이수구 후보 바이스로 출마하게 된 계기는요?

최 : 한마디로 안 선배의 이수구 재출마 부채질에 동참한 죄(?)로 낚인 거죠.(웃음)

이수구 선배는 열린치과의사회에 올인하고 있었고, 치과계 정치는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있었어요. 그런데 안성모, 윤두중 선배 등이 저를 통해서 적극 설득을 했고, 결국 재출마를 결심하게 된 거죠.

제가 서초동으로 치과를 옮기고 얼마 안됐을 때였어요. 제 치과 쪽으로 찾아와서 “너는 나보고 출마하라고 해놓고 안도와줄 거나?”고 하시길래 당연히 도와드리겠다고 했죠. 그런데 바이스를 하라는 거에요. 서치신협 이사장을 맡아야 해서 안됩니다 하고 거절했죠. 그런데 며칠 후 “자네가 안도와주면 나도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게 됐죠. 그리고 홍성태 선생은 내 후배인데, 부이사장도 안거치고 바로 이사장의 행운을 거머쥐었죠.(웃음)

회무로 맺은 ‘폭넓은 인간관계’ 큰 보람

전 : 2002년 서치 부회장 입문부터 지금까지 탄탄대로였어요. 두 번의 서치 부회장, SIDEX 조직위원장, 서치 회장, 치협 수석부회장까지 무려 12년동안요. 그동안 어떤 성과들이 있었나요?

최 : 여러 사업적인 성과도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전국 어디를 가나 웬만한 치과의사들은 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가 됐다는 게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해요. 내가 회무를 하지 않았다면, 치과의사로서 그런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회무와 연관돼 맺은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그게 보람이고 행복입니다.

회무 성과를 얘기하자면, 가장 크게 생각하는 게 SIDEX에요. 전 90년대 초부터 해외 유명 치과기자재전시회를 다니면서 많은 공부를 했고, 국내에서도 이런 국제 규모의 기자재 전시회가 열렸으면 좋겠다고 꿈꾸어 왔어요.

그런데 서치에 몸담으며 해외 유명전시회에 다니면서 수집한 많은 자료와 경험을 실행할 수 있게 됐다는 것 자체가 가슴 벅찬 감동이었고, SIDEX를 지금의 수준으로 발전시킨 것이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해요.

이 밖에도 서치 부회장 6년, 회장 3년 동안 국내 최초의 장애인치과병원 설립, 노숙인 비젼 트레이닝센터 건립, 처음으로 방송을 통한 치과 공익 광고, 종합학술대회 시 최초의 실시간 동영상 강의 등등. 치과계를 선도해가는 많은 일들을 4,500여 회원과 임직원과 함께 만들어 간 것이 큰 성과라 생각해요.

SIDEX로 ‘한국치과산업 도약’ 견인

 
전 : 서치 임원이 아니었는데, 1회 SIDEX 때도 조직위원 활동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최 : 이수구 선배가 낙선하고 열심히 열린치과의사회 창립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홍예표 선배가 찾아왔어요, 신영순 집행부에서 국제치과전시회를 만들려고 하는데, 수소문을 해보니 제가 관심도 많고 자료도 많이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는 거에요.

직전 선거에서 반대편에 있던 인사라 (신영순 집행부에서) 직접 찾아오긴 그렇고 대신 홍예표 선배가 찾아온 거죠. 선거를 떠나 흔쾌히 도와드리겠다고 했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국제치과기자재전시회를 개최하는 것이 제 꿈이었거든요. 바로 신영순 회장이 전화해서 ‘최선생 다시 봤어. 고맙다’고 하시더라구요.

저만큼 관심이 많고 자료도 많이 가지고 있는 나성식 선배와 같이 조직위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막상 부딪쳤어요. 전 코엑스에서 하자고 했는데, 신영순 회장은 적자나면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적당히 하자. 제발 좀 벌리지 말고 안전감 있게 하자고 만류했죠. 결국 전시회 규모가 그나마 크게 나오는 힐튼호텔에서 125개 부스 규모로 시작을 했어요.

전 : 처음이었으니까 그런 우려는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보여지는데요?

최 : 음... 우리는 컨벤션 문화에 대한 마인드가 너무 없었달까? 세계치과의사연맹 총회(FDI)에만 가봐도 그렇고, 컨벤션 문화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한국 치과계가 커 가려면 컨벤션 문화에 이해도를 높여야 했는데 즉, 치과계와 치과산업계가 동반성장하지 않으면 한계가 있었는데, 그 당시에만 해도 국산이란 게 있었나요? 거의 대부분 외산이었지.

이후 이수구 회장은 ‘SIDEX를 더 멋지게 해봐라’고 해서 제가 말단 부회장이었는데도, 조직위원장을 맡게 됐고, 그때부터 규모나 퀄리티를 높여나갈 수 있었어요.

전 : 일부에서는 서울나이트도 그렇고 꼭 그렇게 귀족처럼 해야 하느냐는 인식도 있어요.

최 : 해외 전시회를 가잖아요? 딜러들에게 커피 한잔 안줘요. SIDEX가 해외 유명전시회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선 차별화된 경쟁력이 있어야 했어요. 그래서 해외 딜러, 업체관계자 등의 유치를 위해 서울나이트를 만든 겁니다. 우리끼리 스테이크 썰려고 만든 게 아니에요.

또 많은 분들이 SIDEX 그러면 서치가 돈 벌려고 하는 것아니냐고 생각하는데, SIDEX가 우리나라 치과계 발전에 얼마나 막대한 기여를 했는지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치과산업이 언제부터 지금과 같은 면모를 갖출 수 있었나요?

SIDEX 이전에는 재고물건 파는 장이었지, 전시회가 아니었어요. 지금은 국내 업체나 해외 업체나 SIDEX에 맞춰서 런칭 홍보를 하지 않으면 상당히 지장이 있게끔 구조가 만들어 졌어요. 오스템이나 바텍, 스피덴트 등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클 수 있었던 것도 SIDEX의 효과를 몇 백 % 받았기 때문이라고 단언합니다.

‘판사이묘’는 리더가 버려야할 덕목

전 : 이제 협회장 29대 선거 국면으로 넘어가죠. 우선 자신의 회무철학을 밝혀주세요.

최 : 아까도 얘기했지만, 한번 신의를 쌓으면 절대로 먼저 배신하지 않는다는 게 저의 신념이라는 것을 가장 강조하고 싶습니다.

또한 시늉만 하고 책임질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거나 문제는 키워서 해결해 주는 ‘거전보과’를 소신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 꽤 많아요. 그리고 그런 분들이 역량이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고, 그걸 이용해서 자신의 공적을 교묘히 부풀리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전 집단의 리더는 일을 처리하는 두가지 묘법(판사이묘)을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게 제 소신입니다.

전 : 치과계가 매우 어렵습니다. 후배들의 위기 탈출을 위한 해법은요?

최 : 대한민국에서 누구보다도 뛰어난 두뇌와 능력을 갖춘 후배들의 사회적 위상을 찾아주고 싶다는 생각 뿐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인력과잉 공급, 과잉투자, 과당 경쟁의 악순환 고리를 하루 빨리 끊어야 합니다.

구조적인 문제를 풀 수 있는 전담기구가 있어야 하는데, 취업을 할 수 있는 필드의 여건을 개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후배들이 언제 어디서든 취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다 사교육에 의존하고 있잖아요. (월급) 몇 푼 받지도 못하는데…,

경영정책위원회가 지금까지는 개원의들에게 포커스를 맞췄는데, 이제는 젊은 층에 맞춰야 합니다. 정보 공유가 전혀 안되는데 이를 시스템화하고, 교육 프로그램도 임플란트나 교정에 초점을 맞추면 안됩니다. 엔도와 치주치료만 잘해도 어디서든 취업할 수 있고 개원할 수 있어요. 경영정책위원회 산하에 전담기구를 두고 그러한 프로그램들을 상설화해 지원을 할 생각입니다.

의료영리화! 감옥 갈 각오로 막겠다

전 : 자, 이제 주요 정책에 대한 얘기를 해봅시다. 전문의제에서부터 선거제도, 불법기업형 사무장 치과 척결, 인력수급 등등 수많은 현안이 있는데, 짤막짤막하게 입장을 밝혀주세요.

최 : 먼저 전문의제도 개선은 1차 의료기관 전문의 표방금지 등 비수련 일반개원의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에 최우선을 두고 정책을 추진할 겁니다. 기존 전문의들에게는 치과계 전체를 위해 양보를 부탁할 거구요. 제발, 전문의제를 정치적으로 악용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선거제도는 현 집행부가 대의원총회에 직선제를 제1안으로 상정을 했고, 62년만에 개선을 한 한 장본인입니다. 직선제를 계속 추진할 겁니다.

불법네트워크 척결은 1인1개소법 세부규정 완비, 윤리위원회 권한 강화, 불법의료기관 폐쇄 조항, 사무장에게도 환수조치 등 여러 법령을 제정 및 완비하고, 그 법령을 근거로 ‘사무장 병원 대응 협의체’ 구성 등 관리·감독의 일차적 책임이 있는 정부가 직접 나서도록 투쟁해 나갈 겁니다.

특히, 의료영리자법인은 곧 기업형 사무장 병원입니다. 영리자회사가 허용되면, 거대자본이 유입되고, 의료기관 체인화가 가속화돼 동네치과는 몰락할 것이 자명해요. 지금 의료영리화 전면화 국면은 절대절명의 위기입니다. 죽을 각오로, 감옥에 갈 각오로 투쟁해 나갈 겁니다.

대정부·국회 영향력 강화가 치과계의 또 하나의 과제입니다. 협회는 장기적으로 편향돼서는 절대 안된다고 생각해요. 때로는 여당, 때로는 야당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회원을 결집시킬 수 있는 집행부가 구성돼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고, 국민의 편에서 볼 수 있어야 궁극적으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울러 인적 네트워크 구성도 매우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인력수급인데요. 복지부의 올해 업무보고에 의하면 2010년 이미 치과의사 400~500명 과잉배출, 2020년이 되면 치과의사 4~5천명 과잉배출이라고 나와 있어요. 2014년 복지부 구강생활건강과의 2대 업무 중 하나가 ‘인력 과잉 조절’이구요. 통합캠프 공약에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는데, 10% 감축 반드시 이뤄낼 수 있습니다.

이 밖에 제반 정책사업들은 내가 좋아지는 공약 ‘형통’ 다가오는 공약 ‘소통’ 든든한 공약 ‘관통’ 3통 공약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해 놓았습니다.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전 : 마지막으로 김철수와 이상훈 후보를 평가해 주세요?

최 : 김철수 후보는 능력 있는 후배고, 사람을 대할 때 친밀감이 뛰어난 사람이에요. 같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데 이번 선거과정에서 보니까 왜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지, 왜 비판 위주로 접근하는지 그게 안타까워요. 제가 봐왔던 김철수가 아니거든요. 남은 기간이라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서 ‘내가 뭘 어떻게 하겠다. 내가 평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소신을 밝혔으면 좋겠어요.

이상훈 후보는 평소에 만나서 얘기해보면 선배들에게 깍듯하고, 치과계를 걱정하는 애정과 열정도 높이 살만해요.

반면 협회장이라는 자리를 생각했다면 조금 더 깊이 있는 공부를 해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 열정과 순수함 등은 인정하지만, 아직 깊이가 부족하다는 느낌? 다음번쯤 되면 깊이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 : 짧은 시간이나마 열정적으로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몰랐던 뒷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데, 조금은 아쉽네요. 아무쪼록 29대 협회장 선거에서 좋은 결과 얻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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