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미학과 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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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미학과 도덕…
  • 박한종 논설위원
  • 승인 2014.09.02 10:3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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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 박한종 논설위원

 

 
표절마저도 예술 표현의 흔한 방식이 되었다. 상업화된 음악에서의 표절은 샘플링이란 변명으로도 등장하고 영화에서는 명장에 대한 존경의 표시라는 오마주 명칭까지 주어진다. 그래도 이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용어는 패러디- 풍자라 할 것이다.
 
패러디의 사전적 의미는 다른 사람의 작품이나 행위를 풍자적으로 모방하는 것이다. 특히나 현대에는 개그 프로그램에 많이 사용되고 있지만, 사실 웃음에 동원된 풍자의 역사는 깊다. 우리네 마당놀이에서 말뚝이, 취발이 등이 등장하여 양반과 노승의 탐욕과 위선의 행태를 드러내는 수법이 바로 풍자라 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런 풍자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기에 미학은 이 풍자를 소중한 자산으로 가지고 왔을까? 삶에서 응어리져왔던 분노의 원인을 백일하에 노출시킴으로서 현실에 대한 인식을 고양시켰다는 측면도 그럴 듯하고, 오히려 이것 때문에 분노가 폭발하여 객관적 현실이 개혁되기보다 일거에 해소해버리게 된다는 해석도 그럴 듯하다. 무엇이 옳은지를 떠나 분명한 것은 허무적 포기와 자조의 정서가 현실에 대한 분노를 대신한다면 그런 풍자조차 가능하지 못하리란 것이다.
 
다른 한편 ‘도덕적 판단이나 학습에서 예술과 미학이 과연 어떠한 역할을 할 것이냐’는 많은 것을 생각을 하게하는 주제이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칸트일 것이다. 칸트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란 순수이성의 문제와 ‘무엇을 하여야하는가’하는 실천이성의 문제를 이어 이 둘을 연결시키려고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라는 판단력의 문제를 제기하지만, 판단력 비판을 통해 정작 풍성해진 것은 상상력이라는 미학의 문제 제기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도덕적 판단력과 미학적 판단력을 보탠다면 양자의 관계는 더 가까워 진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도덕적 판단은 어떤 추상적 규칙이나 원리로 출발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라는 모토에 따른 개별적인 판단 내지 지혜, 즉 프로게네스에 기초한 것이다. 또한 미학적 판단의 기초가 되는 것은 모방 즉 미메시스일터인데, 이는 있는(있었던) 사실이 아니라 개연성과 필연성이 결합된, 있을만한 이야기를 제작하거나 수용하면서 연민과 동정 등을 통해 감정의 정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복잡하고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 도덕과 예술 모두 어떤 공리적 규칙에 근거한다고 보긴 어렵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은 설득적이다. 물론 도덕의 주-객관적 목표는 행복과 선이고 예술의 그것은 쾌락과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양자를 그리 멀다 볼 일은 아니다. 행복과 쾌락의 경우는 말 할 것도 없고 선과 아름다움 역시 그러하다. 아리스토텔리스는 ‘시학’에서 추함 그 자체는 추할뿐이지만, 그 추함을 그럴 듯하게 모방함으로서 얻어진 작품은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선 추함 그 자체, 그 실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럴 듯한 추함을 그럴 듯하게 보여줌으로서 그 추함의 필연적 측면마저 보여주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아름다움은 선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 몰래 치킨먹는 퍼포먼스 보이는 애국단체 회원들 (출처 :  뉴데일리)
 
이야기가 돌아가긴 했다. 세월호 유가족의 40여일의 목숨의 단식이 있었고, 그것을 이어 여러 시민들이 단식 농성을 하고 있는 바로 그 공간에서 보수진영 인사들이 노인, 주부, 학생을 가리지 않고 폭언과 악의에 찬 짓거리를 풍자적 퍼포먼스라는 핑계로 자행하고 있다 한다. 이런 행태에 미학과 도덕의 문제를 들이밀기엔 너무 고상하단 느낌이 없지 않다(풍자가 예술이라면 그것은 풍자를 통해 아픈 사람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그러한 것이지 권력의 편에서 권력의 외면과 탄압에 숟가락을 얹는 것일 수는 없을 게다).
 
그러나 일베적 행태가 단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이번 세월호 특별법 제정 물결에서 보인 일베적 행태는 더 이상 온라인에 숨거나 자기편끼리 모여서 부적절한 불만해소를 즐기는 것에서 현실로 나와 연대의 손을 내어줘야 할 아픈 약자들과 소수자들에게 대한 공공연한 적대와 모욕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미학적 미메시스를 거친 예술적 풍자가 아니라 추함 자체일 뿐이다. 더구나 이들의 행태가 물리적 폭력과 연결되지 않았을 뿐이지만, 그걸 핑계로 추악하고 추잡한 서푼짜리 배설의 쾌락을 이들이 더욱 조장하고 있다는 점은 심각하다 하겠다. 승화되지 못한 퍼포먼스와 집단적인 물리적 악행의 가림막은 두텁지 않다.

 

 

 박한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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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욱 2014-09-03 14:44:28
좋은 글 읽고 이런저런 생각도 하고 지금 놓여있는 세상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주 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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