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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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休)
  • 이은경
  • 승인 2014.09.22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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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 이은경 논설위원

 

 

1. 대한민국 노동자들은 OECD 국가 평균에 비해 1년에 2달 더 많이 일을 한다.

2. 한국의 아동 청소년들은 핀란드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학력을 자랑  하지만 핀란드 학생보다 학습시간이 정확히 2배 더 길다.

3. 한국에서 은퇴이후에도 일하는 비율은 OECD 평균에 비해 남성은 2.3배, 여성은 2.4배 많다.

4.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은 2013년 하루 평균 5.6시간 자는데 이는 2009년에 비해 한 시간이나 줄었고 미국소아과학회에서 권장하는 수면시간인 8.5~9.2시간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리스트는 끝이 없다. ▲현 직장 외 투 잡을 뛰는 비율 ▲학업 외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비율 ▲정규수업 외 사교육을 받는 비율 ▲직장 외 다른 교육(학업, 자기개발, 사교육 등)을 받는 비율 ▲직장이나 학교까지 걸리는 엄청난 이동시간 등등

우리는 4當5落(4시간 자면 합격, 5시간 자면 불합격) 세대였는데 요즘 아이들의 수면시간은 더 줄었다.

에디슨은 하루에 3-4시간만 잤으며 새벽 4시 출근을 요구했다고 한다. 직원들이 숨어서 자거나 졸자, 자지 못하게 감시하는 사람을 따로 고용할 정도였다. 프로테스탄트적 노동 윤리와 포드주의 생산공정, 테일러식 공학적 경영이 정착되던 시기의 일화이다. 근면하게 일하고 쉬는 시간을 줄여라. 잠과 휴식은 게으름이며 죄악이다!

우리나라는? 성공을 위한 자기개발서에는 외국 학교 화장실에서 불을 켜고 공부했다든가, 밥먹는 시간을 줄여가며 하루 20시간 책상 앞에서 공부했다는 이야기가 넘쳐난다.

동아시아 유교적 배경에 자본주의적 노동 윤리가 결합되고, 개인의 근면 성실만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역사적 경험까지 결합된 우리사회 근면 이데올로기는 게으름을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죄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우리는 근면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있다.

하지만 휴식에 대한 과학적 연구 결과는 전혀 다른 결론으로 이끈다.

잠의 진화론

인간의 수면은 Non-rapid eye movement(NREM) 수면과  Rapid eye movement(REM) 수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척추동물은 각성과 휴식의 사이클만, 어류와 양서류는 REM수면도, NREM수면도 없는 반면, 조류, 포유류는 REM, NREM 수면 모두를 갖고 있다.

뇌가 발달하고 정신적 활동이 클수록 REM, NREM수면(그 중에서도 깊이 잠드는 서파수면)이 반복되며 잠이 주는 영향력도 커진다. 흔히 깊은 수면이라고 하는 NREM 수면에서는 신체적 회복이, 높은 에너지소비와 높은 뇌파 활동 등 육체적으로는 각성상태인 REM 수면에서는 정신적 회복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하지만 그 실제 메커니즘은 훨씬 더 복잡한데 꿈을 꾸는 REM 수면에서는 기억의 재배치와 장기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서파수면이라고 하는 깊은 수면기간동안에는 면역계 기능조절, 고갈된 에너지 보충, 체온 조절과 보전(머리를 식히는 역할), 근골격계의 피로회복 등이 벌어진다.

누군가는 REM 수면과 서파수면 기간을 뇌의 “디스크 정리 및 조각 모음”같다고도 비유한다. 영‧유아의 경우, 잠자는 시간은 길지만 대부분은 REM 수면으로 이루어져 신생아 뇌세포의 시냅스 연결과 신경계의 안정이 이 기간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꿈을 꿀 때의 뇌파는 매우 활성화되어 각성시 경험했던 다양한 정보의 조각들을 재배치해, 장기적으로 저장할 것과 버릴 것을 나누는 기능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꿈을 통해 인간은 경험을 시뮬레이션하고 자기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잠과 꿈에 대해 밝혀지는 과학적 사실들은 꿈과 각성상태의 활동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밝혀준다.

특히 인간은 외부 위협이 있는 상황에서도 깊고 긴 수면 사이클을 유지해왔다. 이는 깊은 잠이 가능할 정도의 사회적 안전망과 잠을 통해 얻는 신체적, 정신적 이득이 상호 시너지를 내어 인간종과 인간사회 발달을 동시에 가능케 해왔음을 짐작케 한다. 즉, 잘 자왔기 때문에 이렇게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빈둥거리는 것은 어떨까?

인간의 뇌파는 빈둥거릴 때 활성화되는 default mode network; DMN 영역이 있다. 엄밀히 말하면 뇌가 과업을 수행하지 않고 편안할 상태일 때 기초 최소조건(default)처럼 활성화되어있는 영역이다.

이 영역은 쉴 때 활성화 되고 오히려 업무를 수행할 때 비활성화된다. 초기에는 fMRI나 뇌파측정 과정상 잡음으로 여겨졌으나 이후 자폐증. 조현증(정신분열증)과 같은 정신장애와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환자의 DMN영역이 위축되어 있는 것이 밝혀졌다.

이후 휴식기간 활성화되는 뇌 영역과 이 영역이 담당하는 기능, 그리고 이부위의 손상이나 위축이 초래하는 장애에 대한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DMN 영역은 인지·행동·반응 등 업무를 수행해야 할 때 바로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스탠바이 역할, 집중력·창의력·연상능력 등을 강화하는 역할, 상대방을 공감할 수 있는 공감 능력 등에 작용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앞서 말한 대로 자폐, 치매, 조현병, 주의력결핍 과잉행동 장애 환자들에게는 이 영역에 문제가 발견된다. 아직 이런 정신 질환이나 능력부족과 DMN영역의 손상 메커니즘, 인과관계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상관관계는 명확해 보인다.

태아·양육 시절의 과도한 자극이 쉼을 방해하고 충분히 쉬지 못한 아이들에게 정신과적 문제가 많이 발생하는 연구결과들이 나오는 요즘, 과도한 각성과 자극이 오히려 DMN영역의 손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의학적 측면 외에도 충분한 뇌의 휴식, 즉 빈둥거림은 과업수행을 비롯한 각성시기 다양한 기능에 크게 기여한다.

쉬지 못하고, 자지 못하는 한국인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이 학생들의 9시 등교를 내걸었다. 많은 논란이 있지만 주된 논쟁은 학력저하에 맞춰져있다. 하지만 연구된 바에 따르면 청소년기의 수면일주기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것으로 변화한다.

여기에 각종 사회문화적 조건이 결합되기 때문에 애들을 늦게 등교시키는 것이 청소년기의 수면박탈을 방지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한다. 등교시간을 늦췄을 때 사고방지, 수면시간 증가. 신체적·인지적 결과 호전 등의 결과가 많이 나오기도 했다.

인류는 아동노동의 금지, 40시간 노동, 담배나 술 등 위해물질 제한, 몸에 좋지 않은 식품 제한 등 건강위협요인에 기초한 사회적 규약을 도입해왔다. 모두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밝히고 제도적으로 개선하는 정책과정이었다. 잠과 휴식에 대한 접근 역시 이런 관점에 기초해야 한다.

아동청소년기 수면박탈은 위험한 장시간 노동, 위해물질, 불량식품, 술‧담배 등에 비견되는 건강위험요인이다. 깊고 충분한 수면과 빈둥거리는 시간, 이를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제도화 역시 건강과 건강에 기초한 역량이 발휘되는 생산성 기여의 필수조건이다. 최저휴식권과 수면권의 보장을 제도화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나?

 

 

 이은경 (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 정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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