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게임의 룰 바꾸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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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위! 게임의 룰 바꾸면 가능하다”
  • 강민홍 기자
  • 승인 2014.12.09 13: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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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이 만난 사람들]⑩ (주)오스템임플란트 최규옥 대표이사

 

대한민국은 모든 면에서 후발주자다. 자동차도 그렇고, 전자, 조선 등 모든 분야가 그렇다. 하지만 삼성, 현대, LG 등 세계 글로벌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최상의 기업들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가 또한 대한민국이다.

이런 공식은 치과계에서도 통한다. 늦게 출발했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임상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 IT 강국과 빗대 보자면, 세계 어느 나라보다 시술이 많이 행해지고, 최고 수준의 시술 능력과 기술력, 기업들을 보유하고 있는 임플란트 강국이다.

치과인이라면 누구나 대한민국이 임플란트 강국이라는 사실을 당연히 받아들인다. 그런데 치과인 뇌리 깊숙이 박혀 있는 ‘대한민국=임플란트 강국’이란 공식이 아주 오래 된 일인 것같지만 실상은 10년도 채 안된 얘기다.

우리가 ‘대한민국=임플란트 강국’이란 공식을 무의식적으로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인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오스템’이란 단어를 빼놓고는 설명하기 힘들 듯하다.

본지가 2013년 11월 18일 ‘전민용이 만난 사람들’을 시작한 이후 1년여가 지났고, 이제 열 번째 인터뷰이를 만날 차례가 왔다. 그리고 그 열 번째 인터뷰이로 (주)오스템임플란트 최규옥 대표이사를 지난달 12일 가산동 부근 일식당에서 만났다.   편집자

 

오스템 설립 목적 “고수의 능력 공유”

전민용(파란색) : 반갑습니다. 죄송한데 나이가? 저보다 많으시죠?(전민용 대표는 서울 치대 82학번이다.)

최규옥(검정색) : 원래는 78학번 이에요. 경제학을 전공하다 졸업 안 하고 다시 시험을 봐서 서울 치대에 85학번으로 재입학했죠. 졸업도 85학번들과 같이 했어요.

최규옥 그러면 사업가로만 생각하는데, 치과도 했었죠?

치과는 1992년부터 진료를 시작했고, 2004년까지 진료를 했어요. 개설은 혼자 했지만, 항상 옆에 누가 있었죠. 페이닥터 등. 치과 규모를 조금 크게 했었는데, 사업을 안했으면 아마 치과를 좀 더 크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치과의사로 살 때와 사업가로 살 때, 어느 때가 더 좋아요?

치과할 때는 9시에 출근하는데, 지금은 일이 끝이 없어요. 피곤한 정도로 치면 개원의가 훨씬 덜 피곤하죠. 그런데 일을 벌이다 보면 계속 욕심이 나요. 끝이 없죠. 그런데 그렇게 살다보니까 이젠 적응이 되요. 그냥 팔자라 생각하죠.

일이 끝이 없는 게 아니라 일부러 만드시는 거 아니에요?

처음부터 10층짜리 건물을 다 지어놓고 하면 편한데, 1층부터 계속 층수를 늘려가니까, 계속 공사 중이니까 쉴 수가 없는 거죠. 중소기업은 몇 백 억 매출목표만 달성하면 끝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전 그렇게 보지 않아요. 계속 늘려 나가는 것. 그게 기업가 정신이 아닐까요?

결론적으로 피곤하지만, 머릿속에는 하고 싶은 일들이 있으니까? 성취감이나 보람은 더 있어요.

머릿 속에 하고 싶은 일이 뭔가요?

첫째는 내 임플란트가 전세계 1위가 됐으면 좋겠고, 둘째는 내가 만든 소프트웨어를 전 세계적으로 다 쓰게 하고 싶어요.

한 예로 3D 프린트로 기공물을 만드려면, 모델을 만들고, 구강 내 상태를 만들고, 3차원 모델을 만드는데, 지금까진 자기 경험이 중요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고수의 경험을 담아서 자신이 활용만 하면 되는 시대가 열리게 돼요.

고수가 되려면 오랜 시간동안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는데, 지금은 이 시행착오를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 것인가가 고민의 핵심이죠. 앞으로도 새내기는 끊임없이 나오지만, 고수들은 늙고 죽거든요.

디지털의 초점은 의사가 한 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의사가 의도한대로 높은 수준에서 되게 하는 것. 이것이 목표라 할 수 있죠.

오스템의 이름은 뼈의 OSSEO와 디지털 시스템의 SISTEM을 합쳐서 만든 거에요. 임플란트 등 뼈에 관한 기술 뿐 아니라 디지털 시스템까지 잘 개발해서 고수의 능력을 공유하자는 게 설립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죠.

 
의대 가려다…적응 힘들었던 치대 생활

그런 욕심은 어디서 연유한 걸까요?

팔자 소관이 아닐까 생각해요.(웃음) 어떤 걸 보면 그냥 생각이 들어요. 일부러 생각하는 게 아니고 그냥 생각이 들어요.

어려서부터도 그랬나요?

그런 기질이 좀 있었던 것같아요. 고등학교 때까지는 공부를 잘 했어요. 물고기 잡으러 가고 새 잡으로 산에 가고…. 별로 공부는 많이 안했는데 잘 하더라구요. 시골인 천안에서 다녀서 그랬나 봐요.(웃음)

치과의사는 되고 싶어서 된 건가요?

원래는 (우리 때는 다들 그랬겠지만) 저도 법대에 들어가서 판사나 검사가 되려고 했어요. 처음에 서울대 떨어지고 후기로 대학에 갔다가 곧장 군대에 갔는데, 군대에서 쫄병이 자기 동생 의대 얘기를 해주는데, 그게 재밌을 것같더라구요. 그래서 의대에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죠.

군대에서 7월에 제대했으니 시험 볼 때까지 4개월밖에 안남았는데, 전 문과였거든요. 그래서 수학을 엄청 열심히 했어요. 그래도 시간이 짧아서인지 점수가 어중간하게 나왔고,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그냥 의대에 넣었는데 떨어졌죠.

1지망 의대, 2지망 치대. 그래서 치대에 갔어요. 솔직히 치대가 뭔지도 몰랐고, 갈 생각도 전혀 없었어요.

그럼 치대 적응하기 쉽지 않았을 것같네요.

그렇죠 뭐. 치대 다니면서 성적이 안좋았어요. 잘 외워지지도 않고, 이걸 왜 해야 하지 하는 생각도 들고, 전 지금도 의아한 게, 외워야 할 것이 있고, 찾아보면 될 것이 있는데, 찾아보면 될 것을 굳이 외우라고 하니까…. 적응을 못하겠더라구요. 물론 27살에 예과를 갔으니 기억력도 나빠지고….

학생운동을 했다고 들었어요.

제가 무슨요. 87년 대선 직전에, 아마 기말고사 즈음이었을 거에요. 공정선거감시 투쟁한다고 하길래 따라 나가봤죠. 그때 혜성이가 경찰에 끌려가길래 (못 끌고 가게) 붙잡았다가 대신 제가 끌려갔죠. 나중에 보니까 혜성이도 결국 끌려왔더군요. 구류 4일 살고 나온 게 다예요.

김혜성, 김신구, 소종섭 등등 운동권 친구들하고 다 친하게 지냈어요. 하여튼 그 때 집에 (빨간) 책들이 좀 있었는데, 풀려나서 집에 와보니까 책이 싹 없어졌더라고요. 자취방에서 같이 자고 했던 그 친구들이 싹 치워놨더라고요.(웃음)

 
뒤늦게 맡은 애물단지 ‘수민종합치재’

자! 본격적으로 오스템 얘기를 해보죠. 처음에 사업을 혼자 시작한 건가요?

투자에 관한 얘기 같은데, 혼자 했어요. 그때만 해도 가능성이 안보이는 상황이었으니깐. 다른 사람한테 돈 내라고 하기 힘들었죠.

95년에 (보험청구)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다가, 96년도에 ‘이런 식으로 하면 안되겠다. 회사를 만들어야 겠다’고 마음먹고 96년 말에 회사 설립을 추진하다, 날짜가 늦어져서 97년 1월 8일에 등록을 했어요. 회사는 이미 만들어서 직원들도 있었고, 아무 생각 없이 등록한 건데, 그 날이 창립기념일이 돼버렸네요.(웃음)

처음부터 임플란트를 하신 게 아니네요?

99년 말에 한참 벤처 바람이 불어서 여기저기서 투자하겠다고 전화가 왔는데, 다 거부했어요. 고등학교·대학 동문인 한 후배가 투자하는 회사에 근무했었는데, ‘형 그런 식으로 하면 안되요. 투자를 받아서 형이 하려는 것을 더 당겨서 해야 해요’ 계속 얘기를 해서 ‘그럼 투자를 한번 받아볼까’ 생각을 했는데, 막상 투자를 받으려니 ‘뭘 할까’가 고민되더라고요.

하여튼 주위 친구들, 친척들이 제 개미투자자가 됐고, 수민종합치재를 인수하게 된 거에요. 처음에는 두 번에-하나로를 개발했죠. 그거 말고 다른 것들도 했었는데, 다른 것들은 다 잘라버리고, 두 번에만 하다가 수민종합치재를 맡게 됐죠

수민종합치재는 어떻게 연결된 건가요?

수민종합치재에 다니던 사람에게 전화가 왔어요. 그 친구가 원래는 수민종합치재에 있기 전에 소프트웨어 회사에 다녀서 (우리도 두 번에 소프트웨어 회사니까) 안면이 있는 친구였는데, 대뜸 전화해서 ‘부산에 오실 일 있냐’고 물어보더라고요.

부산에서 만나니 수민종합치재로 데려가 사장을 소개시켜주더라고요. 사장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임플란트를 만들어서 파는데, 파는 게 너무 어렵다’는 거에요. 그래서 ‘일부를 팔아줄 수 있냐’고 하길래 그렇게 하겠다고 했죠.

그래서 임플란트 장사를 시작했는데, 제 (임플란트 판매) 수완이 좋아서인지, 조금 있다가 전화가 와서 'OEM으로 만들어주겠다‘고 하고, 또 얼마 후에 ’그러지 말고 우리 회사를 사가라‘고 하더라고요. 원래는 임플란트를 하려고 투자를 받은 게 아니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임플란트 사업을 하게 됐어요.(웃음)

 
회사를 인수할 정도면 투자받은 돈이 많았나 보네요.

아니에요. 처음에 매우 어려웠어요. 투자 받은 돈은 이만큼인데, 덩치가 큰 회사를 인수하려니…. 처음에는 부분인수를 하고 나중에 합병을 했죠. 그런데 지금은 임플란트만 남고 소프트웨어는 뒷 처지가 됐어요.

어찌 됐든, 국내 최초 임플란트 제조업체를 이끌게 되신 게 자의반 타의반이었군요?

제일의료기라는 회사가 92년에 설립됐고, 94년에 첫 임플란트 제품을 출시했더라고요. 그런데 망했고, 수민종합치재가 97년 말에 인수했죠. 그리고 내가 2000년 11월에 인수했으니, 국내 최초 임플란트 제조사가 맞아요. 나는 세 번째 사장님이고.

세계경제위기 때 200명 감원 ‘가슴 아파’

이제부턴 성장과정을 들어보죠. 인수할 때 어땠나요?

매출액이 10억여 원 정도 됐는데, 솔직히 형편 없었죠. 당시에는 카피 수준인데다가 직원은 10여 명, 자동선반 3대 있었고…. 한번은 임플란트를 심었는데, 보철물을 끼우려 하니까 구멍이 없는 거에요. 그런데 구멍 뚫는 방법을 몰라서 헤맸던 기억이 나요. 빠른 시일 내에 급성장했다고 볼 수 있죠.

2000년 11월에 인수했으니, 지금 만 14년이 됐군요. 현재 오스템은 얼마나 급성장 했나요? 짧게 자랑을 해주시죠.

2014년 10월 현재 자본금 71억 원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했고, 최근 1천억을 생산할 수 있는 신사옥을 건립했어요. 전세계 21개국에 현지법인을 운영 중이고, 미국은 33개, 중국은 37개 지점을 운영 중이며, 유럽과 중동, 아시아, 남미 등 63개국에 수출하고 있습니다.

R&D를 바탕으로 한 앞선 기술력, 고객 중심의 기업철학, 우수한 품질 3대 핵심가치를 중심으로 임플란트, 교육, 치과기자재, 치과 IT 4개 분야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고요.

임플란트 산업을 선도하는 대한민국 치과계 대표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해 2025년 매출 1조3천억 원을 달성해 전세계 치과계 글로벌 1위기업으로 거듭나는 것이 목표입니다.

현재 오스템 직원이 1,600명 정도인데, 2023년까지는 5,500명을 만들려고 해요. 그러려면 1년에 몇 백 명씩 뽑아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 고민이 돼요.

 
구직자들에겐 꽤 인기 있는 기업 아닌가요?

한국에서 인기가 있는 건 맞아요. 구직자 관심기업 5위를 했으니까. 근데 중요한 건 국내가 아니라 해외인데, 해외에선 인기가 그다지 많지 않아요.

앞으로 중국에서 1천명. 미국에서 1천명을 뽑아야 하는데, 숫자야 얼추 맞추겠지만, 수준 높은 인재를 뽑기가 만만치 않네요. 물론 한국에서 우수한 인재를 파견할 수도 있는데, 한계가 있으니…

현재의 오스템이 있기까지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아요. 오스템 망한다는 얘기를 저만 해도 5번은 들었으니까?

그것밖에 안들으셨어요?(웃음)

가장 위기는 언제였나요?

너무 많아서 다 잊어버렸어요. 그런데 시기적으로 보면 2001년과 2002년 이 때가 제일 어려웠던 것같아요. 매출로 들어온 돈하고 비용이 안 맞아서…. 매출이 2003년에 300억을 넘어서니까 좀 풀리더군요.

또 어려웠던 때는 2007년 상장한 후에 세계 경제위기가 오면서 였어요. 그때 200여 명 감원하고, 임원부터 10% 감봉하고…. ‘방만 경영’이니 하며 욕도 많이 먹었고, ‘나쁜 사장’이 돼버렸죠. 앞으로는 이런 일이 절대 발생하지 말아야 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어요.

회사가 어려웠을 때 집에서는요?

당연히 싫어했죠. 초창기 어려웠다가, 파산 직전에 이르렀다가….

AIC! 세계 최대 임상교육기관 만들 터

4대 사업 분야 안에 교육 사업이 포함됐던데? 교육사업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신 거 같아요.

원래는 이걸(교육) 해보자고 사업을 시작한 거에요. 처음에 두 번에 뿐 아니라 인터넷으로 정보사이트를 만들었죠. 그런데 수익이 안되더라고요. 덴트포토도 열심히 하고 오랜 세월동안 해서 최근 광고가 붙는 거지, 처음에는 고생 많이 했을 거에요.

두 번에는 왜 개발한 거에요?

처음 개원하면서 건강보험 청구 소프트웨어를 샀는데, 매우 불편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회사가 금방 망해 버리네요? 그래서 딴 프로그램으로 바꾸면 또 그 회사가 망해버리고…. 그래서 ‘내가 망하지 않는 소프트웨어 회사를 직접 만들고, 그 프로그램을 교육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졸업을 앞두고 수련받을 생각을 하니까 마땅치가 않더라고요. 나이도 많고, TO도 적고, 성적도 좋아야 하고. 그래서 뭘 할까 생각했는데, 특별히 할 것은 없고…, 졸업을 해서 보니까 할 수 있는 게 없더군요.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어요. 교정 연수회, 보철 연수회 다니고, 총의치 연수회도 다니고, 엔도도 배우고… 그러면서 느낀 게 ‘대학 나와서도 해야 할 것이 매우 많구나. 대학에서는 학생들 가르치기도 바쁜데, 누군가 교육을 해줘야 겠구나’ 였어요.

대학에서는 해줄 수가 없으니까. 내가 그런 걸 해주는 구조를 만들어야 겠다고 마음을 먹은 거죠. 그래서 당장 필요한 것, 정보에 관한 것, 소프트웨어 개발에 나서게 된 거고….

 
소프트웨어 개발은 계속 하고 있나요?

두 번에 하나로 보험청구 프로그램 뿐 아니라 교정진단프로그램, 지금은 영상진단, CT에 들어가는 프로그램, 그 것 외에 치과에서 사용되는 프로그램은 다 개발하려고 하고 있죠.

두 번에 하나로는 14년동안 적자였고, 임플란트 수익으로 메워오다가 이제야 겨우 적자를 면하는 상황이 됐어요. 하지만 다시 50명을 더 채용해서 투자를 하려고요. 오스템이 해외 21개국에 현지법인을 세웠는데, 그 나라에서 사용되고 있는 소프트웨어도 다 파악해서 다 우리 걸로 바꿀 생각이에요.

교육 프로그램도 개발하고 계시죠?

덴올이라고 전자주문시스템과 덴풀이라고 전자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운영하고 있고, 현재는 모바일로 접속할 수 있는 시스템까지 개발했어요.

오스템에서 AIC, 화상교육, 핸즈온 코스, 화상수요세미나 등등 다양한 교육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지금은 진료에 대한 교육 뿐 아니라 제품사용법에 대한 교육까지 진행하고 있어요.

해외 각국에서 오스템 미팅을 진행하고 계신데, 유저도 많이 늘었죠?

제가 자부하고 싶은 게, 대한민국에서 임플란트 하고 있는 치과의사 중 AIC에서 배운 치과의사가 제일 많다는 점이에요. 중국도 AIC에서 배운 치과의사가 제일 많아요. 아마 절반 이상 될걸요?

AIC의 목표는 세계 최고 최대 임상교육기관이 되는 겁니다. 실제 1년에 교육하는 비중이 제일 많아요. 요즘 많이 줄긴 했지만, 과거 디렉터와 패컬티가 400여 명이 이르렀어요. 교수는 아니지만, 교수와 비슷한 능력을 가진 디렉터가 4~50명. 그 옆 패컬티가 300여 명.

전세계로 따져도, 임플란트를 가르치는 치과의사들이 가장 많고, 실질적인 세계 임플란트 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어요. 1년에 직원 인건비 빼고 강연장 대여료, 연자비 등 교육에만 투자하는 비용만 30억이에요.

우리나라 치과의사의 80%가 임플란트를 합니다. 미국도 임플란트 시술 비중은 맥시멈 20%밖에 안되요. 그 배경에는 바로 오스템 AIC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치과의사 마인드’로 게임의 룰 바꾼다

너무 오래 시간을 뺏었네요. 몇가지만 더 물어보고 인터뷰를 정리할까 하는데, 요즘 기업의 사회적 역할 얘기가 많이 나와요. 오스템은 어떤가요?

음. 봉사는 우리가 직접 하는 것보다 봉사를 하는 단체를 지원해 왔는데, 외부에 알리면 생색낸다는 얘기가 나오니까 일부러 홍보를 안 해 왔죠. 얼마전 행사를 진행했지만, 올해까지 12년동안 치과대학에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는데, 그것도 언론에 알리기 시작한 게 3년밖에 안됐어요.

건치만 놓고 봐도 얼마전 스리랑카 봉사활동 할 때도 지원했고, 건치 남북특위 북한 지원 때도 우리 제품을 싸간 적이 있고…. 여러나라에 봉사활동을 지원하고 있어요. 단지 홍보를 안할 뿐이지.

 
홍보해도 될 것같은데요?

음. 국민들 입장에서는 나한테는 그렇게 (임플란트를) 비싸게 받으면서 무료로 해주냐는 말들이 나올 것같아요. 자전거를 선물하는 것은 괜찮지만, 그랜저를 선물하는 것은 곤란하지 않나요? 산동네에 연탄을 준다. 수재민에게 뭘 준다 이런 것은 홍보가 괜찮은데, 임플란트를 무료로 해준다는 것은 홍보하기가 좀 그래요.

과거 무료틀니나 그런 것들은 소외계층, 노인에 한정되는데, 임플란트는 전연령층이고, 비싸니까 좀 달라요.

국내에도 (임플란트) 경쟁사들이 많은데, 어떻게 평가하세요?

공정경쟁을 하면서 서로 발전을 해가는 거고, 어차피 해외시장을 놓고 경쟁을 해야 하니까. 평가라기 보단, 잘 해나가길 바랄 뿐이에요.

최근 유닛체어 시장에도 뛰어들었죠?

원래는 안하려고 했는데, 3년 전에 시작했어요. 할 수밖에 없었던 게 임플란트는 하는 의사, 안하는 의사 2종류로 나뉘는데, 체어는 100% 다 구입해야 하는 필수장비거든요.

필수품이니까 잘 만들고, 환자가 편안하고, 술자가 좋고, 고장이 적고, 신속하게 수리해 주고…. 이런 것들은 자신이 있으니까, 체어하고 파노라마, CT를 해야 되겠다 마음 먹었죠.

그런데 막상 하다보니까 ‘지금까지 이렇게 낮은 수준으로 하고 있나’ 싶더군요. 그래서 세계 수준으로 높여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어요.

(체어도) 자신 있나요?

성공하려면 일단 품질이 좋아야 하는데, 품질이 좋으려면, 설계품질이 좋아야 하고, 협력업체들 품질이 좋아야 해요. 그래서 협력업체들 수준을 높이려는 노력을 했어요. 헙력업체 제품을 수입할 때 출하검사를 해야 하는데, (기존 체어 회사들 중에는 출하검사를 제대로 하는 곳이 없더군요.) 검사를 엄격하게 하니까 고장율이 30%이상 줄었어요.

둘째는 대량생산을 통한 원가 경쟁력 맞추기인데, 현재는 손해를 보면서 팔고 있지만, 우리는 해외 21개 법인이 있으니까 향후에는 가격·수량 맞추기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세계 1위가 만만치 않을 텐데요.

내가 처음 시작할 때도 그랬어요. 자본이 없지 않느냐부터 시작해서. 나는 일반 사업가가 갖추지 못한 걸 갖고 있어요. 바로 ‘치과의사 마인드’죠. 이 장점을 살려서 게임의 룰을 바꿔야지요.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봐요.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리고, 오스템의 건승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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