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말, 증오의 시간, 추방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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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말, 증오의 시간, 추방의 사회
  • 김랑희
  • 승인 2014.12.26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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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랑희 인권활동가, '불온하고 위험한 인권이야기'

 

날씨가 춥다. 바람이 매섭고 눈발이 흩날린다. 바람이 불고 해가 가려져 있으면 실제 기온보다 더 춥게 느껴 일기예보에서는 체감온도를 덧붙여 알려준다. 대한민국의 12월은 사회적 체감온도까지 보태져 기온은 더 내려가고 있다. 일기예보보다 급속하게 얼어붙고 있는 12월이다.
 
12월의 첫 시작은 박원순 시장과 성소수자 혐오세력들이었다.

11월 28일, 서울시는 시민들이 4개월 동안 6차례의 논의를 거쳐 완성된 ‘서울시민 인권헌장’에 대해 차별금지 조항에 ‘성적지향, 성별정체성’이라는 문구를 포함할 지를 두고 표결을 통해 통과한 것을 ‘전원 합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헌장 선포를 거부했다.

서울시의 태도가 문제가 된 와중에 12월 1일 박원순 시장은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임원과 가진 간담회에서 ‘성전환자에 대한 보편적인 차별은 금지되어야 하지만, 동성애는 확실히 지지하지 않는다’는 발언을 했고, 12월 6일 성소수자들은 시청 점거 농성을 시작했다.

12월 10일 서울시가 거부한 ‘서울시민 인권헌장’을 시민위원회가 제정을 확인하며 축하 행사를 열었지만 끝내 서울시는 예정했던 인권헌장을 선포하지 않았다. 그리고 박원순 시장은 사과인 듯 사과 아닌 사과 같지 않은 사과를 전했고 농성은 시장과의 면담 이후 구체적인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을 약속받고 정리했다.

그렇게 성소수자들의 농성이 정리되고 이틀째가 되는 새벽, 해고노동자 둘이 70M 굴뚝에 올랐다. 굴뚝에서 아침을 맞은 그들은 지난 11월 고등법원에서의 부당해고 판결이 대법원에서 파기환송 되어 눈물을 흘리던 쌍용자동차 해고자다.

일터를 잃은 6년 동안 동료를 잃어야 했던 그들이 이제는 죽음을 끝내고 동료들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제발 도와달라고, 회사와 대화를 하고 싶다며 굴뚝 위로 오른 그날, 26번째 동료의 죽음을 굴뚝에서 들어야했다.

굴뚝에 오른 동료가 걱정되어 굴뚝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서 천막을 치고 따뜻한 밥이라도 전달하려고 했던 동료 두 명은 경찰에 연행되었고, 회사는 밥 한 끼 올리는 것도, 추운 날씨가 걱정돼 방한용품을 올리는 것도 ‘호텔처럼 지내려는 거냐’며 허락하지 않았다. 굴뚝에 오른 이후 하염없이 떨어지는 기온과 눈보라가 이어지는데 회사는 두 사람을 감시하는 것 외에 어떤 대화도 시도하지 않고 있다.

굴뚝 위 노동자들의 끼니 걱정, 건강 걱정을 하면서 역시 거리에서 투쟁을 이어가는 노동자들의 걱정이 한참이던 12월 19일에 헌재는 당선 2년째 되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선물을 바치듯 진보당을 해산시켜버렸다. 그것도 8:1이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더불어 진보당 소속의 국회의원들은 의원자격을 상실했다.

대한민국 겨울왕국의 완성이자 시작을 알리는 서곡 같은 판결이었다.

 

 

한 달 새 벌어진 일들이 서로 다른 일 같지만 따로따로일 수 없어 보인다. 목소리를 낼 수 없거나 그 소리가 너무 작아서 귀를 기울여야만 들리는 목소리가 힘겹게 외치고 있을 때, 큰 스피커가 주어진 ‘말’이 작은 목소리를 덮어버렸다.

권위에 찬 말은 사회를 뒤흔들고, 보호받고 존중받아야 할 사회구성원을 세상 밖으로 밀어내고, 가치를 뒤집어 버렸다. 그 ‘말’들은 폭력이 되고 증오를 키우고 공포로 밀어 넣는다.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세력은 그 세를 과시하며 사회적 혼란과 공포를 조장하는 문구로 광고를 하기 시작하더니 차별금지법을 무산시키고 성소수자들이 표현과 의견을 피력하는 곳마다 나타나 증오의 말들을 쏟아냈다. 그들의 말은 성소수자의 삶과 존재를 부정하면서 모욕하고 비난한다. 그들의 삶을 사회의 악으로 매도하면서 사라져야 할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비난과 저주의 말을 오롯이 견뎌내는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지키는 것은 그들의 곁에서 함께 있는 것, 그리고 혐오의 말들이 잘못된 것임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시민 인권헌장은 의미가 있다.

법적 구속력이 없다고 해도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인권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하는 것, 그래서 차별하고 혐오하는 것이 잘못된 행위임을 인식하게 하는 것, 혐오를 드러내는 것은 권리로서 보장받는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약속하는 것이다.

그런 인권헌장을 폐기하는 것도 모자라 시장은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인권도시를 만들겠다는 시장의 입에서 나온 ‘어떤 존재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 사람들은 ‘평등하게 존중받아야 할 정체성’에 예외도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겠는가.

시청농성 중 시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살아온 삶을 부정당하는 상황’이라는 표현을 했다. 삶이 부정당하는 것이 무엇인지 겪었다면 그 순간 자신이 누군가의 삶을 역시 부정했다는 것을 사과했어야 했다. 그리고 혐오의 말과 행동으로부터 시장으로서 성소수자들을 보호하지 못한 것을 반성을 했어야 했다. 인권헌장을 만들겠다는 시장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해야 할 말은 그런 말이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에 대한 해고가 부당하다는 고등법원의 판결은 오랜 시간 싸운 해고노동자들에게 힘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대법원의 판결을 간절하게 기다리며 정의의 말이 해고노동자들의 곁을 지켜주길 바랬다. 해고에 맞서 ‘함께 살자’라는 외침이 정당했음을, 동료들의 삶을 지켜내지 못한 미안함과 억울함을 위로해줄 수 있기를, 권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대신해 기업의 횡포를 막아주길 바랬다.

그러나 법관의 말은 기업인의 입에서 나온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사법부가 기업을 대변해 말을 하자 정부가 그 말을 받는다. ‘정규직에 대한 보호가 과도한 수준’이라는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말을 이어 박근혜 대통령은 "비정규직과 정규직 간 임금 격차, 노동시장의 경직성, 일부 대기업 노조의 이기주의 등은 노사 간, 노노 간 갈등을 일으켜서 사회 통합을 가로막는 대표적인 장애물"이라는 등의 말을 쏟아냈다.

‘해고는 살인’이라는 울부짖음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비정규직을 양산하면서 열악한 노동조건과 차별을 정규직의 탓으로 돌린다. 노동자의 노동과 삶을 돌봐야하는 정부의 책임을 쏙 빼놓고 노동자들이 서로를 탓하게 만들고 기업의 해고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법원과 정부의 말은 노동자의 권리, 연대의 권리를 삭제하고 불안과 고통만 남겼다. 사법부와 정부가 기업의 횡포를 감싸주니 굴뚝 농성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인도적 조치 요구에 비아냥거림으로 대꾸한다.

노동과 삶의 권리를 빼앗은 법의 말은 사상의 자유, 결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도 위태롭게 만들었다. 헌법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헌법재판소가, 특히 소수 정당을 보호한다는 위헌정당해산 심판제의 취지가 무색하게 진보당을 해산시켜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었다며 비판하는 이유는 단지 정당하나를 해산시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추방할 수 있는 사람과 말, 생각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말도 위험한 것이 되었고, 정부를 비판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붙여진 ‘종북’딱지는 추방의 증표가 되었다. 실체적 위험이 아닌 사회비판적인 생각만으로도 언제든지 국가의 위협으로 간주될 수 있다.

박 대통령은 진보당 해산 결정을 "자유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지켜낸 역사적 결정"이라고 치켜세웠고, 보수단체들은 진보당 당원 전체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검찰과 경찰은 공안대책협의회를 열어 헌재 결정에 불복하거나 집회·시위 등 집단행동이 발생하는 경우 엄정 대응 방침을 정했다. 정부에 대한 반대, 체제에 대한 비판을 하는 사람들을 추적하고, 솎아내고, 추방하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유일한 반대 의견을 낸 김이수 헌법재판관의 우려가 과장이 아니다. 김이수 재판관은 "과거 독일에서 12만5천여 명에 이르는 공산당 관련자가 수사를 받았고, 그 중 6천~7천 명이 형사처벌을 받았으며, 그 과정에서 직장에서 해고되는 등 사회 활동에 제약을 받는 문제가 발생했다"며 "이 결정으로 우리 사회에서 그러한 일이 나타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고 지적했다.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말은 세월호 유가족을 모욕하는 말로 살아나고,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비난하는 말로 살아난다. 그 말은 사회를 혼란시키는 데모꾼을 만들어냈고, 반국가적인 종북을 만들어냈다. 이 말들은 국가와 경제를 걱정하는 ‘애국자’의 이름표를 달고 도덕과 자유의 수호자를 자처한다. 정치인의 말이, 법관의 말이, 대통령의 말이 서로를 도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언론이 재생산하면서 혐오의 사회를 키운다.

혐오의 말은 공존의 언어가 아니다. 그래서 혐오의 말은 말 자체로도 폭력이지만 언제든지 누군가를 추방시키는 힘을 만들고 실제로 제거해야할 대상으로 인식되면 물리적인 폭력도 서슴지 않게 된다. ‘신은미·황선씨의 토크 콘서트’에서 인화물질이 든 양은냄비를 터뜨렸던 사건이 바로 그 예이다. 혐오는 공포를 조장하고 추방을 선동한다.

지금, 여기 꽁꽁 언 고드름보다 차가운 증오의 말이 심장을 찌른다.

뺨을 때리는 한겨울 칼바람보다 날카로운 혐오의 말이 사람을 밀어낸다. 추방의 대상을 찾아 헤매는 잔혹한 눈빛은 태양을 가리는 어두운 구름 같은 침묵을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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