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금/파-검 드레스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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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금/파-검 드레스 논쟁…
  • 박한종 논설위원
  • 승인 2015.03.10 13:3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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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 박한종 논설위원

 

어느 줄 무늬 드레스의 색상이 흰색-금색이냐 파랑-검정이냐를 놓고 전세계 sns가 한바탕 소동을 빚었다. 결론은 같은 색상이라도 전체의 조명과 개인의 색감각의 수용성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내려졌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지각에서 비롯된 모든 것을 참과 거짓으로 나눌 것이 아니라 그 상대성을 받아들이자는 상대주의의 토대가 될 수 있느냐 좀 더 고민해야 한다.

상대주의에 대한 긍정적 면모를 보자. 우리의 지각은 현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일 수 없다. 눈(雪)을 수십 가지로 분류한다는 이누이트인들의 지각은(아니라는 이야기도 있긴 하다) 기껏 대여섯 가지 정도 눈에 대한 표현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지각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지각을 제한하는 것은 문화적인 것뿐만이 아니다. 우리 시각이 가시광선에 제한적인 것은 생물학적 진화의 획득물이며, 다른 생물체인 경우 자외선이나 적외선에 더 민감하게 지각하기도 한다.

그러한 점에서 어떤 대상이 고유의 파장을 가진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색 지각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란 주장은 합당하다. 더 나아가 엄밀하게 말하자면 어떤 경우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른 색 지각을 가진 사람들이 아무런 장애 없이 상호 작용을 할 수 있다(한 사람이 사실은 파랑과 빨강을 거꾸로 지각한다 해도, 그 사람이나 다른 사람 모두 이것을 인지조차 못할 것이다). 물론 대부분 그 차이는 드러나고 거기서 갈등이 생기기도 하는데, 그런 점에서 상대주의는 참과 거짓을 가르는 태도보다 오히려 화합적이다.

그러나 상대주의 역시 극단화된 모습을 보일 수 있다. 아마도 그 기준은 양자의 차이의 설명에서 대칭성을 얼마나 강조하는가 함에 있다. 이런 설명이란 것은 과거 과학적 논쟁에서 이긴 이론(a)과 파탄난 이론(b)을 설명하면서 서로 다른 잣대를 대어선 안 되며 그러므로 a쪽 입장에서 b쪽을 보듯, b 쪽 입장에서 a쪽을 봐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많은 경우, 차이는 서로 대등한 가치나 역량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치나 역량, 특히 역량의 비균등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 차이는 상대적이긴 하지만 대칭적이지는 않다. 역량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상대성은 앞의 눈(雪)의 예를 다시 볼 수 있게 한다. 이누이트인의 눈에 대한 지각은 우리의 눈에 대한 지각을 설명할 수 있을 개연성이 높으나, 역의 경우는 생각할 수 없다. 즉 이누이트의 눈에 대한 지각 역량이 우리 보다 더 확장되어 있기에 이런 비대칭이 발생하는 것일게다.

어찌되었든 상대성이 역량에 관계되는 측면 역시 존재한다면 우리는 상대주의의 대칭성의 원리에 빠져 그 차이를 유지하는 것보다는 어떤 경우는 부족한 역량을 어떻게 극복해야하는가가 중요한 측면이 될 수도 있다. 장애자들의 이동권의 문제에서 가장 선명할 수 있겠다. 장애자들의 이동 역량은 일반인들의 그것에 비해 떨어진다(대중적 교통수단에 의한 경우조차). 이 때 중요한 것은 장애인의 이동권의 역량을 확장하도록 제도(관습과 법률뿐만 아니라 기계적 차원까지도 포함해서)를 바꾸는 것이다.

그 차이를 보존할 것이냐 극복할 것이냐의 결정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보편성일 것이다. 이때 보편성이란 종적으로 구분된 양자를 가로지르는 유적인 어떤 것을 통해서 양자의 구별을 없애되 그 방향은 양자의 역량을 끌어 올려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상대주의는 오히려 대칭성의 원리에 대한 제한이 요구된다 하겠다.

줄 무늬 원피스 색깔 논쟁으로 논의가 번쇄한 감도 있으나, 우리는 이 문제를 쉽게 외면하지 못한다. 지난겨울 독서 콘서트에서의 우익 소년의 도시락 폭탄 테러와 최근 주한 미국 대사에 대한 식칼 테러의 문제에도 환기되기 때문이다. 서로가 외눈박이가 되어선 내 쪽은 울분의 (잘못된) 표현으로 그 책임을 상대에게 있다면서도 내가 당하면 그 배후에 도사린 악랄한 집단을 찾아 처벌해야한다는 비대칭적 논리를 대칭적으로 보여주는 주장들은 말할 것도 없겠다.

그러나 대칭적 논리로 양자 모두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테러일 뿐이며 상대방의 차이를 존중해야한다는 논리 역시 상대주의의 함정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문제이지 않을까? 어떤 테러는 좋고 어떤 테러는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테러는 모두 금지되어야 할 것이되, 그것을 빌미로 테러가 대상으로 삼는 여러 주장마저 모두 대칭으로 묶는 상대주의적 태도는 지양되어야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여러 주장이 그저 그런 이야기들이 아니라면 그저 그런 다양성으로 수용하기보다는 우리 삶의 역량, 삶의 가치를 끌어올리는 보편성의 방향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 속에서 여러 주장들의 내용들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박한종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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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 2015-03-12 10:31:07
집단 또는 공동체가 합의할 수 있는 공통의 가치나 신념체계를 가능한 만들어가자는 뜻인가요? 샌델의 주장과도 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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