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주의에 갇힌 메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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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주의에 갇힌 메르스
  • 르몽드디플로마티크
  • 승인 2015.07.20 11:02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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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디플로] 르몽드디플로 마티크 2015년 7월 82호

본지는 세계적 지성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이하 르몽드)'와 잠시 중단됐던 기사제휴를 이달 부터 재개한다.

르몽드는 국가나 인종 간의 협소한 이해관계를 초월해 휴머니즘, 문화다양성, 시민사회 연대 등 인류 보편의 가치를 중시한다는 편집기조아래, 보건복지계의 산적된 현안에도 새로운 화두를 던지고 있어 주목을 받아왔다.

이에 본지는 독자들에게 보다 다양한 컨텐츠를 제공하기 위해 르몽드에 게재된 보건의료 관련 기사를 매월 1~2회 게재할 방침이다. - 편집자 주 

 

남자는 세계를 묘사하는 임무를 스스로에게 부과했다. 그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지방, 왕국, 산맥, 만(灣), 배, 섬, 물고기, 방, 도구, 별, 말, 사람들로 공간을 채웠다. 죽기 직전, 그는 그 끈기 있는 선들의 미로가 자신의 얼굴을 따라 그린 것임을 깨달았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인간이 처음 배운 언어가 짐승의 발자국이라면 첫 번째 인식 도구는 자신의 몸이다. 플라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몸에 대한 대상화는 모든 사회조직을 정체(政體, body politic), 생명체(유기체, organization)로 생각게 하는 토대가 되었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이 그토록 자주 인용되고 고전으로 받들어지는 이유는, 관념인 국가를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국가는 실체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관계, 제도, 이미지이기 때문에 비유 없이는 존재 증명이 불가능하다. 국가 안보 언설은 국가가 권력(인구, 주권)을 ‘가진’ 실체(영토)로서 하나의 통일체로 존재하며, 국제사회는 이러한 단일 몸들이 경합하는 무정부 공간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상상의 공동체’인 국가를 실체로서 제시하는데 인간의 몸처럼 완전한 은유는 없다. 그래서, 아놀드 하비(Arnold Harvey)의 주장대로, 은유(말)는 곧 폭력이 된다.

그래서 ‘비정상’적인 몸, 약한 몸, 전염병 공포는 언제나 국가안보의 위기를 설명하는 데 유용했다. 앞서 말한 대로 <리바이어던>의 논리는 여전히 막강하다. “국가는 유기체다. 화폐는 국가의 혈액, 식민지는 국가가 출산한 자녀, 주권자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회충처럼 신체를 괴롭히는 자, 피정복민은 종기, 안일함은 기면증, 폭동은 폐병, 국가를 개혁하려고 불복종하는 사람들은 국가를 파괴하는 것.” 이처럼 국가를 유기체인 인체에 비유하면, 국가 권력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인체를 절단하는 행위와 다름없게 된다. 모든 국가의 외부는 전쟁 중이고 언제 침략할지 모르는 적을 생각할 때, 국론 분열과 같은 힘의 공백을 노출시키는 행위는 있을 수 없으며 국가안보는 최우선 가치가 된다.

의사가 질병과의 전쟁을 수행하듯 국가는 자기 몸에 해가 되는 부위를 외과술로 제거하거나 화학약품으로 통제해야 하는 임무를 띠게 된다. 이처럼 정치철학에서 질병은 사회적 무질서를 은유하였고 외과술은 전쟁을 포함한 국가의 통치 기술을 의미해왔다. 질병에 대한 면역력을 키우는 것이 국민 생활의 일상적인 군사화를 정상화하는 진리가 된 것이다. 이는 특히 근대 의학의 발달과 관련이 깊다. “암과의 전쟁”처럼 현대 의학에서 군사적 은유가 등장한 것은 몸의 침략자는 질병 그 자체가 아니라 질병을 일으키는 미생물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면서부터이다. 미생물은 외부로부터 ‘침입해온다.’ 이는 질병이 외부 조직의 침입이며 신체는 면역적 방어, 몸 내부의 군사작전을 통해 이에 반응한다는 인식을 가능하게 했다. 익숙한 논리다. 이에 대한 비판 중 가장 유명한 책은 아마도 수잔 손태그의 <은유로서의 질병>일 것이다. 많은 페미니스트 국제정치학자들이 이 은유 구조를 분석하여 안보 논리의 허구를 증명해왔다.

▲ ⓒ세상의 여자 (배달래, 1991)

메르스, 그것은 내부에 있었다

그러므로 국가안보의 위기를 전염병에 비유, 군사주의적 표현으로 “(방역 체계가) 뚫렸다”는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 메르스 말고도 들어오는 바이러스는 많다. 메르스 자체가 ‘침입’이 아니다. 세계가 놀란 한국의 메르스. 최초 환자는 의료진의 도움 없이 돌아다녔고 의사는 병의 실체를 모른 채 감염되어 사경을 헤매고 있다. 요지는, 메르스는 내부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메르스를 국가안보와 연결시키는 언설은 거의 없었다. 이는 사스 논란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한국사회는 서구처럼 전염병과 안보 담론의 결합이 약한 편이다. 우리의 안보 담론은 질병 메타포보다는 보다 직접적인 피식민 경험의 설움, 분단, 색깔론, 정상국가 건설의 다급함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때문에 그만큼 위력적이기도 했다.

전통적인 서구 이론대로 해석하면, “메르스를 안보 위협에 비유, 공포와 혼란을 조장하여 국민을 통제한다”는 논리가 가능한데, 한국인은 통제되기보다 짜증났다. 이번 사태는 기술적 무능, 게으름과 (관료주의의 폐해가 아닌) 아예 관료가 없는 사회의 실상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세월호 사건과 닮았다. 세월호 사건 때 모든 행사가 자발적으로 취소되고 소비심리는 위축되었다. 이는 희생된 학생들에 대한 애도의 측면도 있지만, 다른 사고와 달리 청소년의 어이없는 죽음은 ‘어른인 국가’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어쨌든 당시 국가가 내놓은 유일한 대책은 “수학여행 전면 금지”였다. 세월호에 대한 서민 심리는 이중적일 밖에 없다. 슬픔에 동참하고 기억해야 한다는 인간의 윤리적 감정이 한편에 있고 그럴수록 “봄철의 행락은 줄어들고 장사는 안 되고 택시 승객은 반으로 줄고 있다”라는 생계에 대한 걱정이 다른 한 편에 있다. 애도하고 기억하다가는 굶어죽을 판이다. 윤리와 생계를 대립시키는 이들의 고통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세월호와 메르스는 국가의 기능을 질문한다.

전염병과 국가안보 논리의 연결이 느슨해진 이유는 ‘억압에서 방치’라는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의 국가 통치 방식의 변화 때문이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든 괴롭히든, 국민에게 관심이 없다. 사스키아 사센의 지적대로 이제 국가는 ‘국민의 총합’이 아니라 글로벌 자본들의 네트워크, 초국적인 공간으로서 세계 도시들의 연대체가 되었다. 국제(inter-national)아니라 글로벌인 이유다.

그들만의 안보

불감증(不感症)이라는 논리가 있다. 도덕 불감증은 모르겠으나 안보 불감증이나 안전 불감증은 느끼지 않아도 된다. 문제의 심각성을 강조함으로서 대중을 통제하려는 논리는 의외로 간단히 해체될 수 있다. 위협의 주체와 대상,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하면 된다. 국민은 동일한 상태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총기 난사를 다룬 마이클 무어의 영화 <볼링 포 콜롬바인(Bowling for Columbine, 2002)>은 총기의 위험성을 다루는 영화가 아니다. 그 반대다. 미국의 1인당 총기 소지율은 캐나다, 스위스의 그것보다 훨씬 낮다. 그러나 총기로 인한 사망률은 캐나다나 스위스의 만 배가 넘는다. 그의 주장은 총기가 ‘아니라’ 문화라는 것이다. 마이클 무어에게 영향을 준 책, 배리 글래스너의 <공포의 문화>는 현실보다 공포를 조장하는 현실이 사람들을 통제한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페미니스트의 성폭력 추방운동은 여성에게 공포감을 조성하는 행위이며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안보주의자”라고 언급해 논쟁을 일으켰다. 물론 그렇지 않다. 사회는 성폭력의 실태와 심각성에 대해 무지하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문제는 누가 말하고 누가 듣는가라는 위치성의 문제다. 성폭력의 심각성은 남성에게만 강조하면 된다. 여성들은 이미 일상적 체험으로 잘 알고 있다.

메르스의 심각성도 최고통치자부터 관계 당국의 담당자만 자각하면 된다. 국민들은  그들의 각성과 대책 속에서, 그들을 믿고 편안하게 지내면 된다. 하지만 당국은 방관하고 불안감은 대중에게만 전가되었다. 우리는 불안감과 공포가 누구의 책임이며 누구에게 강조되어야 할지 질문해야 한다. 그게 곧 정치학이여야 한다. 안보든 메르스든 위협 언설의 청자와 화자가 분명하지 않을 때, 진짜 위기가 찾아온다.

변화, 글로벌 시대의 국가안보

위 소제목은 배리 부잔의 책 제목(내용)이자 국제정치학계의 ‘새로운’ 의제지만, 여성에게는 진부한 이야기다. 안보 재개념화는 벤야민부터라고 봐야 한다. 그의 유명한 <역사철학테제>. “민중에게 비상사태는 예외가 아니라 상례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의경쟁으로 사람들은 죽어난다. 그 경쟁조차 반칙 일변도다. 지친 사람들은 전쟁보다 먹고 사는 것, 일상이 더 무섭다. 치솟는 자살률은 삶이 죽음보다 더 무서운 상황의 결과다.

우리사회 내부의 변화는 안보 담론의 ‘위기’를 가져왔다. 통치 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불안한 일이다. 안보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은 확실히 예전만 못하다. 60년 넘게 지속된 한미동맹은 미군이 점령군이든 보호자든, 동맹이라기보다 미국에 의한 관리국방, 위탁국방이다. 국군은 무능력할 수밖에 없다. 지금 국방 ‘전문가’들은 군사(軍事) 문제 전반에 걸쳐 합리성에 기반한 신자유주의 세력과 반공, 애국에 입각한 국가주의 세력이 갈등 중이다. 대표적인 이슈가 모병의 방법을 둘러싼 징병제 개혁인데, 효율적으로 보이는 지원병제 논리 역시 간단하지 않다. 지원병제는 군대를 완전히 계급 문제로 변화시킬 것이다.

게다가 ‘이유 없는’ 병역 기피자가 급증하고 있다. 예전처럼 군 복무가 남성의 시민권을 보장하지 않는 상태에서 ‘주체적 루저’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니트 세대(NEET, 교육과 고용을 스스로 포기함), 힘을 빼고 쉽게 살자는 탈력(脫力) 세대, 하류 지향 세대는 남의 일이 아니다. 3포, 5포, 7포 세대의 기본은 군대 포기다. 갈 이유가 없다. 9·11 이후 글로벌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나를 포함, 일부 평화 운동가들은 전쟁주식회사의 발호에 맞서 국가의 군대 통제를 희망한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사회에서 군대는 폭력과 훈육의 상징이었다. “군대 다녀와야 사람 된다”거나 “군대에서 폭력을 학습한다” 등의 말은 좋은 의미든 아니든 국민적 상식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윤일병’ 사건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발생하고 있다. ‘병(兵)’은 위관급 이상의 장교가 가장 두려워하는 국가안보의 걸림돌이다. 이들에게 ‘주적’은 북한이나 중·러·일이 아니라 ‘나약’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그래서 사단장 이하 전 간부의 인생을 날릴 수 있는 말없는 청년들이다. 사고가 빈번하고 민간인이 사망하는 데까지 이르자, 국방부는 주요일간지에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다시는 군대 내 이런 사고가 없도록…”하는 전형적인 글이었는데, 군 당국의 입장에서도 억울했는지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이전 시대에는 군대가 폭력 문화의 근원지처럼 여겨졌지만, 지금은 반대입니다. 사회의 폭력으로 신성한 군대가 폭력으로 물들고 있습니다.” 맞는 얘기다. 군대가 더 폭력적인가 사회가 더 폭력적인가를 묻는다면,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중2가 무서워서 북한이 쳐들어오지 못한다”는 세간의 농담은 중2라는 내부의 ‘문제’와 더불어 북한의 상태를 상징한다. 남북 간 대칭이 깨진 상태에서 북한은 적이 아니라 타자(他者)로 전락했다. 증오의 대상이기보다 혐오와 무관심, 맘 놓고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차라리 전쟁이나 났으면,” “메르스로 사람들이 다 죽어버렸으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에게 전쟁의 위협을 강조하는 것은 효과가 없다. 전쟁보다 무서운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국가안보 그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무의미하다. 평화주의 세력의 입장에서는 언제나 지는 싸움이다. 안보는 논리상으로는 절대 가치이기 때문이다. 절대 가치는 경계를 들이댈 때 의미를 상실한다. 메르스 확산이든 국가안보 위기든 요점은 “어디에서”이다. 위협의 대상과 주체, 영향력의 범위를 드러낼 때 안보는 편파적인 그들만의 가치로 전락한다. 문제는 언제나 경계다.

글·정희진
1967년 서울 출생. 서강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했다. 사회운동, 평화, 인권, 탈식민주의, ‘아시아’, 인간관계의 심리학과 정치학에 관심이 많은 정희진 씨는 위안부 누드 사건, 스와핑, 성매매 여성들의 시위 등 여러 가지 사회의 이슈에 대해 여성의 시각에서 재해석하여 글을 구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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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문 환 2015-07-30 02:18:05
니들이 뭘 알기나 해

좋은 글2 2015-07-22 17:10:26
'안보든 메르스든 위협 언설의 청자와 화자가 분명하지 않을 때, 진짜 위기가 찾아온다.'
요즘 점점더 청자와 화자, 주체와 대상이 뒤엉키고 있는것 같습니다. 대통령이 사과받으러 다니기도 하고...

좋은 글 2015-07-21 11:43:25
좋은 글입니다... 하지만 안보논리, 유기체 논리에 비해 설명이 너무 어렵습니다~~~ 차라리 전쟁이나 났으면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해하기는 어려운 글 아닐까요? '전쟁보다 무서운 것이 너무 많다'는 말도 '전쟁보다 무서운 것이 너무 &#48126;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도가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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