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과 ‘꾸준함’이 무기인 서경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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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과 ‘꾸준함’이 무기인 서경건치
  • 안은선 기자
  • 승인 2015.12.04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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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건치 서울‧경기지부 기획 ①] 건치의 절반! 다양한 회원 높은 역량으로 지역사회와 연대하다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서울‧경기지부(이하 서경건치)는 건치의 탄생과 함께했다. 서경건치는 건치의 근간이 된 청년치과의사회(이하 청치)의 서울‧경기‧인천 지회와 연세민주치과의사회(이하 민치)의 서울‧경기‧인천 사랑방 모임이 지금의 서경건치가 됐다.

1988년 11월부터 3차례에 걸친 통합논의, 1989년 3월부터 3차례에 걸쳐 지부 준비위원회가 결성됐고, 이어 4월 8일 청치‧민치 통합 준비 수련회에서 의견조정을 거쳐 그 해 4월 9일 전국비주대표자회의에 보고해 인준을 받아 4월 26일 정식으로 서경건치가 출범했다.

초대 집행부는 이석우 회장, 손효현 부회장, 성열수 총무, 김동욱‧김영철 교육연구부장, 백정훈‧편집홍보부장, 김창집 진료부장으로 구성됐다.

1989년 7월 기준으로 서경건치지회는 강동지회, 강남지회, 관동지회, 강서지회, 북동지회, 북서지회, 경서지회, 경동지회, 경남지회, 수원지회, 공보의지회로 총 12개에 달했다. 이어 1993년과 1994년 사이에는 경기남부, 김포, 강화, 강동, 은평‧서대문 지회 창립 등으로 지회가 17개까지 늘어났다.

아울러 ‘지회 활성화를 위한 워크샵’을 개최, 공동작업을 통해 지회지침서를 완성해 배포하는 등 서경회원을 지회단위로 포괄해 내기 위한 작업들도 성과를 거뒀다.

서경건치는 건치 전 회원의 절반을 차지하는 최다 규모다. 사람이 많은 만큼 중앙 사업 및 활동에 대한 연대와 지원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건치 설립 초기부터 서경건치는 자신의 역할을 ‘중앙에 대한 보조적 역할’로 설정하고 조직화 사업에 힘써왔다.

다양한 회원, 다양한 사업

그리고 지역사업의 기반이 되는 지회활성화를 한 축으로 하고, 대중사업의 일환으로 문화국을 신설해 다양한 교실을 운영하는 두 개의 기본 사업을 가지로 잡고 사업을 펼쳤다.

“서경지부의 핵심은 사업은 조직사업이며, 지회는 지부사업의 중심이다. 지회 내용을 다양화하여 많은 회원들의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대다수 회원들을 지회로 모일 수 있게 해야 한다”

서경건치의 초기 사업은 다른 지부와 마찬가지로 소진료실을 중심으로 한 지역진료활동이 주를 이뤘으며, 지부내 8개 진료소의 진료 활동 및 지역 활동의 참여와 지원, 보건의료문제 및 건강권 확보를 위한 연구 성과를 도출하는 데 힘썼다.

건치중앙이 주도하는 수돗물불소화사업에도 연대해 진행했으며, 1992년 4월 불소용액양치사업단을 발족해 서울길동초등학교, 강화대월초등학교, 김포초등학교, 인천 공부방‧탁아소 등에서 시범사업을 시작해 서경건치의 일상 사업으로 자리 잡았다.

또 환경운동연합‧그린피스 등과 연대해 쓰레기 핵발전소와 핵무기, 병원쓰레기 처리 등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했으며, 이외에 대외사업으로 전교조진료후원, 장기수진료후원 사업, 쌀 등 기초농산물 수입개방저지를 위한 서울지역 대책위 참가 등을 수행하며 다양한 회원 수 만큼 다방면에 걸친 활동을 전개해 왔다.

아울러 서경건치는 1기 시작과 동시에 강좌를 진행했다. 신규 치과의사들을 위한 개원교실‧임상교실을 개최해 호응을 얻는가하면, 교육, 공해, 통일, 국회의원 선거 문제 등을 기획해 진행했다. 매회 30명~50명의 회원이 참가해 성황리에 진행됐다.

또 매년 ‘건치여름한마당’을 열고 치과대학생들과 적극적으로 접촉해 건치를 알려나가는 일에 힘썼다. 이를 통해 많은 학생들이 졸업 후 입회하는 등의 성과가 있었다.

서경건치의 활동내용을 회원들에게 충분히 알리기 위해서 초기에는 ‘서경소식’을 비롯한 활자매체, 뉴스레터 등을 이용하다 최근에는 페이스북 등 SNS를 이용해 회원과의 소통을 위한 노력들을 중점적으로 해나가고 있다.

또한 ‘문화기획단’이란 이름으로 운동과 문화를 결합한 사업들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풍물교실, 영화 제작기법 배우기, 문화답사기행, 맛집 탐방 등의 사업을 통해 회원간 친목도모는 물론 자연스럽게 건치의 방향성에 대해 공유하는 자리로 꾸려진다.

서경건치의 역량 드러낸 ‘장애인 구강보건 사업’

‘장애인 구강보건 사업’은 다양한 회원, 지회기반의 역량을 가진 서경건치에 딱 들어맞는 사업이었다. 서울 곳곳의 지회회원들이 지역의 소규모 장애인 시설을 발굴하고, 지역 인력들과 연결시키고, 진료 봉사를 할 수 있는, 회원 역량을 십분 발휘한 사업이었다.

‘장애인 구강보건 사업’은 1998년 8개 특수학교를 대상으로 시작했으며, 사업의 초석을 공고히 하기 위해 이 사업의 핵심을 ‘장애인’, ‘지역’, ‘진료’로 규정하고 다각도로 노력을 기울였다.

먼저 진료 사업적 측면에서는 ‘장애인 구강보건 학교’를 개최해, 건치회원 뿐 아니라 일반 치과의사, 치과위생사, 치과대학생들도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구강진료 봉사네트워크를 마련하고, 장애인 진료를 위한 기초 교육은 물론 장애인 의료복지 향상을 위한 제도의 변화까지도 염두해 보건의료제도에 대한 교육도 실시했다.

또 관련 전문가들과 간담회를 갖고 장애인 사업에 대한 방향성을 잡고 제도적 부분에 대한 논의를 통해 장애인들의 구강건강을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방편을 모색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2002년에는 매뉴얼 개발팀을 발족해 교육 및 관리를 진료에서 분리시켰다. 이는 자칫 치과의사에 의해 일방적인 진료활동으로만 흐르기 쉬운 내용을 구강건강‧예방 관리를 중심으로 장애인을 포함하는 양방향의 참여와 활동구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됐다. 뿐만 아니라 통일된 검진표와 진료차트를 통해 장애인 구강건강 실태에 대한 데이터화, 통계적 가치를 높이는 일을 했다.

아울러 지역 사회복지 단체와의 연계를 중시했는데, 지역단체는 진료자원을 조정하고 관리할 수 있는 핵심 주체로 봤기 때문이다. 서경건치는 장애인의 이동 책임, 자원 활동가 양성, 교육관리의 통로, 진료의뢰시스템 구축, 진료비 확보 등 책임감을 갖고 장애인 복지 시스템을 형성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시작부터 철저하게 확장 방향성을 잡고 시작한 장애인 구강보건 사업은 이후 아동건강주치의 사업인 ‘틔움과 키움’으로 계승 발전 됐다. 이외에도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을 지원하는 ‘와락진료’, (사)여성재단과 함께 저소득 여성가장을 대상으로 한 진료사업을 꾸준히 펼쳐나가고 있다.

중앙 사업을 보조하며 외연을 확대하다

서경건치는 서울이라는 지리적 특성에 맞게 건치중앙과 연대한 사업을 진행했다. 서경건치만의 사업을 해야한다는 내부의 요구도 있었지만, 전체 건치의 절반을 차지하는 만큼 중앙 사업 추진에 있어서도 서경건치의 역할은 중요했다.

건치중앙의 주요사업인 불소용액양치사업을 지원하고, 서울, 과천, 성남, 안양시청을 방문해 수돗물불소화 사업을 촉구하고 민원서류를 넣는 등의 지원활동을 펼쳤다. 1994년 9월에는 ‘상수도수 불화를 바라는 광명‧부천‧시흥‧인천 연대모임’을 결성해 지역 연대 차원의 상수도수 불화사업의 선례를 남겼으며, 연이어 10월에는 부천시민모임 결성과 시장면담, 인천의 불소화 촉구 시민모임 창립으로 이어지는 성과를 냈다.

2005년부터 서경건치는 건치중앙과 함께 가난한이들의건강권확보를위한연대회의에 참석해 인의협, 건강세상네트워크와 함께 지역 내 빈곤층의 의료‧복지 활성화를 위한 지역네트워크 확대를 위한 논의와 실천을 진행했다.

또 서경건치 역시 다른 지부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정치적 이슈에 맞서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하고 집회에 주도적으로 참석해 목소리를 보태왔다.

[미니인터뷰] 서경건치 초대회장 이석우 원장

1987년 6월 항쟁 승리 후, '올바른 민중사회 건설'이라는 가치를 계속적으로 지켜나가기 위해 연세대 치대 출신들이 주축이 된 결성한 연세민주치과의사회(이하 민치)와 서울대 치대 출신들이 중심인 청년치과의사회(이하 청치)가 뜻을 모아 결성한 것이 건치다. 민치와 청치 두 단체의 주 무대가 서울이었던 만큼 두 단체의 결합은 자연스레 서경건치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서경건치의 초창기 모습은 어땠을까? 서경건치 초대회장을 지낸 이석우 원장(이석우 치과)을 만나봤다.

▲ 이석우 원장

Q. 어떻게 해서 서경건치 초대회장을 지내게 되셨나?

A. 민치와 청치가 결합하면서, 먼저 활동을 시작한 민치에서 건치 대표를 하고, 청치는 서경지부를 맡자는 얘기가 나왔다. 그래서 건치 초대회장은 이문령 선생님이 그리고 서경건치는 얼떨결에 내가 맡게 됐다.(웃음) 역할을 나누긴 했지만 활동에 있어 사실 서경건치와 중앙의 구분이 없어 거의 공동대표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Q. 그렇다면 초창기 서경건치의 주된 활동은 무엇이었나?

A. 다른 지부들과 마찬가지로 '소진료소' 활동이었는데, 서경건치의 경우 '회원 조직' 사업이 다른 지부보다 좀 더 중요했던 것 같다. 사람을 모으는 게 가장 큰 이슈였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조직의 목적을 이루는 데 가장 필수요소가 아닌가? 노선은 달라도 '민주사회 구현'이라는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을 발굴하고, 이어주는 게 거의 모든 활동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서경건치가 결성되고 몇 년 사이에 서울‧경기‧인천지역까지 지회가 17개가 만들어졌다.

또 정치적 민주화 뿐 아니라 치과계내에서도 우리가 처음에 가졌던 목적을 이뤄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많은 치과의사들이 서경건치로 올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는 일을 했다. 가령 신규개원의를 위한 임상‧개원 세미나를 여는가 하면, 풍물교실과 영화교실과 같은 문화사업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치과의사라는 직업이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잇는가에 대해서도 밤새 회의하고 토론하면서, 환자 중심의 구강보건 정책을 모색하고 추동할 힘을 길러 치과계에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그런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었다.

이런 문화사업, 구강보건정책 연구를 통해 치과계내에서도 영향력 있는 목소리를 내는 단체로 만들어 가자는 목표를 세우고, 역시나 사람을 모으고 연결시키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Q. 서경건치 활동을 하면서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A. 사실 나는 중간에 생각이 바뀌어서 건치와 좀 멀어졌다. 변혁운동, 이념운동 보다는 개인적인 신앙 생활에 집중하고 싶었다.

서경건치가 안정을 갖기 시작하면서 들어온 후배들 증에 열성적인 사람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이재용 선생, 전동균 선생 같은 분들이다. 그렇게 열성적이고 정열적으로 건치활동에 투신하면서 생을 밀고 나가는 것을 볼 때마다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 빚진 느낌이 들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당시 이슈가 반핵이었는데, 이를 크게 키우기 위한 노력이 중간에 흐지부지된 것이 아쉽다.

▲ 이석우 원장

Q. 바깥에서 지켜본 건치는 어떤 모습인가?

A. 연극단(덴탈씨어터) 활동이라던지 치과계 여기저기 활동을 하다가 '저 친구 참 괜찮은데' 하고 보면, 건치회원인 경우가 태반이었다. 가깝게는 황지영 선생이 그랬다. (*참고로 황지영 선생은 건치 산하 구강보건정책연구회 회원이다)

몸은 (건치와) 멀어졌지만, 아직도 건치에서 공유했던 이념들이 참으로 인상 깊다. 말하자면 '인간답게 살아보자'는 것인데, 건치에서 그것을 가장 진실하게 추구했던 것 같다. 밤 늦게까지 회의하고 술 마시고 치열하게 토론하면서 개인이 어떻게 살고 싶다, 치과의사로서 어떻게 살고 싶다의 중심엔 항상 '사람'에 대한 고민이 있었던 것 같다.

Q.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A. 현재도 열심히 건치활동을 하는 후배들이 존경스럽다. 그리고 의료인이라면 누구나 '예방'이 의료의 가장 핵심인 걸 안다. 그러나 자본논리 하에서 지극히 당연한 얘기를 설득해야만 하는 시대다. 초기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건강한 사회'를 위한 고민을 해오고 있는 건치만이 치과의사 대중을 설득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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