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늘고 길게 치의로서 기쁨 주는 삶 살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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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늘고 길게 치의로서 기쁨 주는 삶 살고파”
  • 안은선 기자
  • 승인 2015.12.30 17: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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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이 만난 사람들 ⑪]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정성훈 전 공동대표…진료 봉사를 통해 찾은 치과의사로서의 정체성

치과계 이색 인물을 만나고 있는 본지의 기획 인터뷰 ‘전민용이 만난 사람들’ 이번엔 쌍용차 해고노동자를 위한 ‘와락진료 봉사’를 듬직하게 지키고 있는 건치 정성훈 원장을 만났다.

정성훈 원장은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82학번으로, 민주화 투쟁의 한 복판을 거쳐 건치 창립멤버로 조직을 세워나가는 일에 몸담았다. 당시 운동권 특성상 ‘치과의사’란 직업을 갖고 일반 시민처럼 살아간다는 것이 죄스러워, 치과의사로서의 삶에 대한 확신도 열정도 부족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가게 된 베트남평화의료연대(이하 평연) 봉사활동에서 그는 치과의사로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오랫동안 단순히 생계수단으로만 생각해 오던 치과의사란 직업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 것.

이를 계기로 젊은 시절 민주화 투쟁에 헌신했던 것처럼,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향해 열정을 쏟고 있다.

와락진료, 개성공단진료, 평연 등 봉사활동을 통해 치과의사로서 작은 행복을 누리고 있는 정성훈 원장의 삶을 살짝 들여다봤다. -편집자

▲ 본지 전민용 대표 이사가 정성훈 원장을 만났다

해고노동자에 힘되고자 시작한 와락진료
이제는 오히려 내가 배우는 게 더 많아
지난한 싸움 길에 맞잡은 손 되고파

세월호 이슈에 쌍차가 밀린 듯한 느낌이에요. 여러 다른 이슈들도 많고 해서…

"올해 1월에 금속노조 김정욱 사무국장과 이창근 정책기획실장이 굴뚝 농성을 시작한지 33일만에 겨우 마힌드라 회장을 만나게 됐어요. 트위터로 서로 메시지를 주고 받아서 그렇게 됐다고 하는데. 사실 마힌드라 회장을 만난 이후에도 달라진 게 없어요. 사망한 노동자 유가족들에 대한 지원금 1억원은 지급됐고, 그외에 개선된 것은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해고 노동자들에 대한 복직은 아직인가요?

"마힌드라 회장이 김정욱, 이창근씨를 만나서 형식적인 대화만 주고 받고 끝났어요. 해고자 복직에 관한 얘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사측의 논리는 “티볼리 잘 팔리면 복직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다”였어요. 문제는 티볼리는 잘 나가는 데 다른 게 안팔려서 문제였죠. 사측은 복직은 시켜주겠지만 ‘언제’ 시켜주겠단 구체적인 대답은 하지 않았어요. 결국 복직은 없단 얘기죠."

상황이 별로 변한 게 없네요. 그렇다면 화제를 바꿔서, 와락진료한지는 얼마나 됐어요?

"4년차에 접어들었어요. 2012년부터 시작했으니까."

와락 진료팀은 따로 모임을 하거나 그런가요?

"워낙 거리도 멀고, 서울에도 별다른 지원팀이 있는 것은 아니라서요. 건치 오나영 차장이 연락해서 시간되는 사람들이 오고, 연락되는 사람이 없으면 제가 직접 나서서 그때그때 진료팀을 꾸리기도 해요.(웃음) 고정인원이 없는 게 좀 아쉽죠."

와락진료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요?

"얼마 전부터 건치에서 와락진료 후원계좌를 만들어서 도움을 주고 있어요. 그게 상당히 도움이 돼요. 이동진료버스 대절비가 한번에 50만원이거든요… 50명의 건치 회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보내주는 정성으로 진료를 하고 있죠. 광전건치는 특히 적극적이에요. 1년에 지부자체에서 팀을 꾸려서 3,4번씩은 오니까."

요즘 와락진료소에 치료받으러 오시는 분들은 어떤가요?

"초창기 첫해 진료는… 그때는 해고노동자들 숫자도 많았고, 희망퇴직자들도 많고 그래서 진료인원이 많았어요. 하루에 50명씩…막… 그땐 건치 지부에서 많이들 와서 대대적으로 진료하고 그랬죠. 와락진료소 2층에 이동용 스케일러 설치하고…이동버스에서 진료하고, 애를 먹었는데… 이제는 싸움이 오래되기도 했고.. 치료받으실 분들은 다 받아서 보통 20명 정도 오시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 꾸준히 봉사활동을 하는 것 같아요.

"다른 일 하기가 더 힘들어서요.(웃음) 처음 와락진료 시작한다고 했을 때 김인섭 선생님이 ‘진료는 하지마~’라고 하시더라구요."

왜요?

"일전에, 건치 초장기에 도시빈민진료도 해봤지만, 이걸 유지해 나가는 게 만만치 않기 때문이란 걸 알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갑자기 생각났는데, 진료 방식을 전에 전교조 해고 사태 때 진료지원 나갔던 방식이 좋은 것 같아요. 치료가 필요한 전교조 선생님과 가까운 건치회원 치과를 연결해 주고, 치료계획이 잡히면 건치회원은 재능기부를, 노조에선 치료비 일부를 대는 방식으로요….그런데 쌍차 노조가 이런 식으로 운영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지… 싸움이 오래되다 보니… 아무튼 이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사회기금을 모아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은 것 같고.. 이런 여러 가지를 김인섭 선생님은 고려하셨던 것 같아요."

그러게요. 요즘은 무슨 일이 터졌다하면 기본 장기전인 것 같아요. 게다가 해결도 쉽지 않고. 그러다 보니 약자들만 더 힘들어지고…

"따지고 보면 강자들은 그런 일을 저질러도 고통스러워지지 않거든요. 정말 우리나라의 상벌체계가 많이 무너진 것 같아요."

와락진료가 오래되다보니 지루할 법도 한데, 이걸 계속하게 하는 동력? 동기 같은 게 있다면 뭘까요?

"지루하진 않아요. 지난한 싸움을 하고 있는 건 오히려 노조분들이죠. 요즘 아시다시피, 와락진료는 와락 사무실이 아니라, 쌍차 노조 사무실로 가요. 노조에서 계속 천막 농성하면서 외롭고 지루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어요. 그러는 중에 우리라도 가면 노조 사무실이 활기를 띠어요. 참 그 사람들도 힘들 텐데도 우리를 그렇게 환하게 맞아줄 수가 없어요. 우연찮게 치과진료 하고 사무실을 딱 들어갔는데, 한 분이 ‘치과 치료 받고 나니까 힘이 나네!’라고 하시는데… 우리야 고작해야 스케일링이나 떼워주는 것 정도인데 나의 작은 행동이 저분들에게는 기쁨이 되는구나 하는…. 갈 때마다 제가 배우는 게 더 많아요. 그런 것 때문에 계속 가게 되는 것 같아요."

와락진료하면서 사람 구하기가 많이 힘든 것 같은데, 좀 더 건치에서 이런 부분은 지원해 줬으면 하는 게 있어요?

"이미 후원도 해주고 있기 때문에 더 요구할 것도 없어요. 다만, 제가 고정적으로 가서 검진하고 진료하는 데 최소한 치과의사 2명이 한달에 1번은 필요해요. 건치 지부별로 돌아가면서 와 주면 좋을 것 같아요. 진료원이 안구해질까 노심초사 안 해도 되고. 작년까지는 경기도치위생사협회에서 많이 도와주셨는데, 그 기간이 끝났어요. 건치에서 나서서 치위생과와 협약 맺을 수 있도록 해 주면 좋을 것 같아요."

개성공단, 평연… 소외된 이웃 위한 봉사의 삶
통일되면 진료버스 10대 몰고 올라가
북한 어린이에 치과 치료 하는 꿈 꿔

개성공단 진료를 나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

"2005년부터 2006년까지… 한 10달 정도 개성공단 진료를 나갔어요. 월요일 날 들어가서 금요일 오후에 나오는 스캐쥴이었죠. 그때 개성공단에 진료실이 만들어지는 중이어서 10개월 중에 6개월은 사실 공사기간이고, 실제로 진료를 한 기간은 4개월이에요."

북한 분들도 진료 했었나요?

"개성공단 진료소는 남측진료소는 치과, 내과, 엑스레이실, 약실 이렇게 있고, 북측 진료소는 산부인과 내과 이렇게, 그리고 남과 북이 함께 사용하는 공동실로 구성돼 있었어요. 개성공단 진료니까 북측 노동자들을 볼 수 있겠구나 기대했는데, 남측 근로자와 북측 근로자가 드나들 수 있는 문이 따로 있었어요. 남측 근로자들만 매번 봤죠."

그래도 참 특이한 경험을 하셨네요. 개성공단이라는 그 공간자체가 특수하니까.

"그렇죠."

일주일에 5일을 개성공단에서 생활하신건데, 진료 끝나고 저녁엔 주로 뭐하고 지냈어요?

"술마셨죠. (웃음) 개성공단이 100만평인데, 공장을 제외하고 그 안에 진료소, 개성공단관리위원회, 한전 KT , 소방소, 편의점, 식당 이렇게 있었어요. 식사는 오로지 개성공단 내에 식당에서만 할 수 있었어요. 식권가지고 가서 먹고. 처음엔 저녁에 할일이 없어서 개성공단 주변을 산책하거나, 벤치에서 책을 읽었어요. 그러다가 매일 보다보니 식당 주방장이랑 친해졌죠. 그 친구가 제가 산책하고 있으면 와서는 “선생님 새로운 메뉴를 개발했어요. 맛보러 오세요”해서 가서보면, 술이랑 먹기 좋은 안주인 거에요. 거기 있는 동안 5키로가 쪘어요. 매일 하나씩 그 친구가 요리를 개발하는 통에(웃음)"

재밌었겠어요.

"특이한 경험이었어요. 치과의사라는 직업 특성도 그렇고, 보통 만나면 치과의사 친구나 동창들인데, 거기선 요리사, 편의점 점장이랑 격이 없이 지냈죠. 친구처럼요. 언제 그럴 수 있겠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개성공단 진료하면서 아쉬운 점은 뭐였어요?

"북한 근로자들을 진료할 수 없었던 것? 북한 근로자들을 볼 수는 있지만 교류는 할 수 없었어요. 진료소 창문에서 퇴근하는 모습 보면, 우리와 다를 게 없고…특히 정주영 회장이 소떼 몰고 올라가는 것 보면서 저도 통일이 되면 이동진료버스 10대를 몰고 북한 각 도를 돌면서 아이들 치과진료를 하는 상상을 했어요.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와~멋진데요? 다른 일은 없었나요?

"뭣보다 북측 아가씨들을 보고 많이 놀랐어요."

왜요?

"다들 너무 이뻐서요. 깜짝 놀랄 정도였어요. 식당에서 식권 받는 아가씨가 너무 예뻐서…첨엔 남한 근로잔가? 했는데 알고 보니 부산 아시안게임 싱크로나이즈 북한 대표였어요. 뭐 사실 개성공단에서 재밌었던 일 많았어요."

좀 들려주시죠?

"민감한 사안이라… 뒷이야기가 궁금하시면 절 찾아오세요. 술 들고."

치과의사로서 정체성 찾게해 준 '평연'
내 작은 행위가 누군가에 즐거움 되니
가늘고 길게, 기쁨주는 치과의사로 살고파

앞으로는 뭘 하면서 살고 싶으세요?

"가늘고 길게, 치과의사로 살고 싶어요."

정성훈 원장도, 대표적인 386세대잖아요. 세월이 20년 이상 흘렀는데, 어떻게 잘 살아온 것 같으세요?

"우여곡절도 많았고, 가정적으로나 직업적으로나 부침이 심했었죠. 평연가서 처음으로 치과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생겼어요."

평연가서요? 그 이야기 좀 해주세요.

"전민용 선생도 알다시피, 우리 또래 운동권이라면… 제 나이에 졸업하는 게 비겁하게 여겨질 수 있는 그런 것 중에 하나였지 않냐. 졸업을 하고 직장을 갖는 것 자체가.. 뭐랄까 노동운동하는 선후배들에게 빚을 지는 느낌이었죠. 치과의사란 직업이 부르주아 아니냐. 어린 마음에 그런 마음의 빚 같은 게 있었어요."

생각해보면 확실히 80년대 학번들이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이 많은 것 같아요. 저도 기억나는 게 선배들 졸업할 때 축하하는 분위기가 아니었거든요. 특유의 그 분위기가 있었어요.

"맞아요. 그땐 그랬었죠."

다시 돌아와서, 평연은 어떻게 해서 가게 되신 거에요?

사실 처음엔 해외여행 한번 못해봤으니까 한번 외국 가보고 싶은 마음에서였어요. 그때가 2000년이었는데, 당시 상황이 좋지만은 않았어요. 우연히 성공회대학교에 NGO학과 2기 모집 광고를 봤어요. 그때 ‘아, 내가 살길은 이거구나!’ 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 때문에 병원도 접고…. 와이프는 난리가 났죠.

그렇겠네요. 갑자기 멀쩡히 병원 하다가 접고, 대학원에 가겠다고 하니까…

"아무튼, 다행스럽게도 와이프도 개원해서 자리를 잘 잡아서..(쩝) 무튼, 그때 입학을 앞두고 3월에 평연을 가게 됐어요. 가볍게 해외여행 가보자란 생각으로 갔는데, 도착해서는 그 무게감이 확 달라 지더라구요. 생각보다 심각했거든요."

평연 1기였죠? 정성훈 선생이

"네, 1기로 갔어요. 첫 번째 진료한 곳은 선틴연 초등학교였는데, 정말 학교가 미어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솔직히 내가 그 사람들에게 해주는 거라야 충치치료해주고 그런 정돈데… 치료를 받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좋아하는 거에요. 난 단순히 치료를 해줬을 뿐인데. 그때 든 생각이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구나’ 였어요. 그 전까지 한 번도 내가 누군가에게 ‘기쁨’을 줄 수 있을 거라곤 생각 못했었거든요."

굉장한 깨달음인데요?

"그때 치과의사가 갖는 사회적 역할이랄지 의미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오히려 진료소 활동을 찾아 나갔던 것 같아요. 마음으로 느꼈기 때문에 가게 된 거죠. 평연 다녀와서 치과의사로서의 자부심도 갖게 되고, 처한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치과의사로서의 정체성을 깨닫고 나서도 NGO학과를 계속 다녔어요?

"네. 열심히 다녔습니다. NGO학과 다니면서 결국엔 자기가 지금까지 해 온 운동에 기반을 두지 않으면 할 수 있는 폭이 좁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래도 오랫동안 치과의사로 생활을 해 왔으니까 보건의료 운동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도. 다만, 병원을 접었고, 와이프 눈치도 보이고… 그래서 처음엔 ‘장학금을 타자!’ 생각했는데, 당시 저희 과에 해고 노동자들이 너무 많았어요. 차마 그 사람들을 제치고 장학금을 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적당히 공부하고. 일주일에 2번씩 변희욱 원장님 병원에서 페이닥터로 일했죠. 거기서 받은 돈으로 학비도 하고 용돈도 쓰고 그랬어요."

학교를 또 다니면서 재밌는 일은 없었나요?

"입학해서 저희 과가 한 20명 정도였는데, 모두 모여서 자기소개란 걸 했어요. 그때 39살이었거든요. 그래서 속으로 ‘내가 나이 젤 많겠는데’ 라고 생각했는데, 왠걸. 82학번이 3분의 1이었어요. (웃음)"

하긴 운동권에 똥파리들(82학번을 부르는 별칭)이 유독 많긴 했죠.(웃음)

"운동으로 시작해 운동으로 끝나는 사람들.(웃음)"

▲ 본지 전민용 대표이사가 정성훈 원장과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의'가 있는 곳에 건치선배들이 있었다
용천역 폭발사고, 인도적 의료지원에
기꺼이 자신의 것을 나눠준 선배들 '존경'

건치 공동대표도 하셨었죠? 그때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그땐 참여정부 시절이었고, 이라크 파병 놓고 한창 시끄러울 때였어요. 전술적으론 잘못됐다고 생각하는데, 그때 시민단체들은 미군이 폭격하니까 우리가 국경없는의사회처럼 의료적 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그런 게 아니라 계속해서 파병반대를 외쳤어야하는데… 그 부분은 좀 아쉽네요."

그때 일이 어떻게 진행됐었죠?

"의료적 지원을 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죠. 한겨레신문에서 팀을 꾸려서 이라크에 들어가기로 했어요. 3중 팀을 꾸리기로 했는데, 1진은 요르단에서 의약품을 사기로 했고, 2진은 그 의약품을 가지고 이라크로 들어가고 3진이 진료를 하기로 했다. 난 1진이라 먼저 들어가서 약품을 샀죠."

그 과정에서 어려운 점은 없었어요?

"어려운 일이라고 하면, 역시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일이었어요. 한겨레 쪽에서 적어도 1억은 필요할 거라고 얘기하더라구요. 그때 뭐 다른 보건의료단체들 다 모인 자리였는데, 겁도 없이 ‘건치에서 3천 만 원 하겠습니다’ 라고 해버려서 거기 있던 인의협, 건약, 보건의료노조… 다들 얼굴이 새파래지는 거예요 순간."

다들 놀랐겠네요. 덥썩 3천만원이라고 했으니…그건 그렇고 어떻게 모으셨어요?

"일단 건치 선배님들한테 다 전화를 돌렸죠.(웃음) 3천만 원 소리 듣고 선배님들도 놀라시고. 그때 ‘형님, 나중에 저 죽으면 조의금 안받을께요’ 라고 설득했어요. 그 말 때문인지 어쩐진 몰라도 100만원씩 한 선배들이 많아요. 그렇게 3천만원 마련했죠."

대단한데요? 정 선생도 그렇고 선배님들도 그렇고.

"건치 선배님들한테 정말 고마운 건, 선배님들은 어떤 일에 ‘의’가 있다고 하면 기꺼이 나눠주신다는 거에요. 북한 용천역 가스폭발 사건 때도 다들 우왕좌왕 하고 있을 때, 당시 어린이의약품지원본부 실무자였던 김진숙씨에게 필요한 거 딱 하나만 얘기해 보라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엠뷸런스 1대만 보내주세요’라고 하시더라구요. 알아보니까 엠뷸런스 1대 보내는데 1천5백만원 정도 들더라구요. 그것도 건치에서 모금해서 보냈어요. 이건 정말 건치가 단결해 이뤄낸 성과라고 생각해요. 정말로 의를 위해서라면 더 묻지도 않고 발 벗고 나서주시는 선배님들이 대단하고, 존경스러워요."

정성훈 선생만의 모금의 노하우가 있나요?

"이건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이것도 김인섭 선생님이 알려준 거긴 한데…. 앞으로 회장 하실 분들은 제게 찾아오시면 알려드리겠습니다."

*개성공단이란 특수한 공간에서의 경험에 대해 정성훈 원장님은 말씀을 아꼈다. 정말로 그 이야기가 궁금한 분은 맛있는 술 들고 찾아가 얼굴도 보고 이야기를 들을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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