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다치과의원, 10년만에 자리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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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치과의원, 10년만에 자리잡다
  • 이주연
  • 승인 2005.09.26 00: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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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치의학 120년,『역사가 보인다』③

조선 최초로 일본인 치과의사 노다 오오지(野田應治 :1871-1930) 한국에 처음으로 개원한 치과의사 노다 오오지는 러일전쟁 종군(1904-1905). 일본인 초등학교 교의(1909-1911), 경성치과의사회 회장(1915-) 등의 활동을 통해 치과의사로서의 대외적 역할과 조직적 권익 확보에 힘썼다.

그가 제물포에 개원하게 된 것(1893)은 개항 후 26년이 지나서였다.

개항기 인천공립병원(1886) 후루시로(古城管堂,원장)의 조수였던 노다 오오지는 일본의 상권확대에 힘입어 조선 최초의 치과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다까야마(高山)치과의학원(동경)에 입학해 치과의사 면허를 받은 후 1890년 6월30일 제물포에서 처음으로 개원했다.

이로써 조선에 처음으로 ‘치과의사’라는 직업과 근대적 치과치료가 소개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치과의료의 유입은 일반의료 부분과 달리 정부 차원의 지원 없이 민간 치과의료시장 개척에서 시작됐다.

노다 오오지는 제물포에 거류하는 일본인들(4천여 명)을 주 대상으로 개원했지만, 환자수가 적어 진료 실적이 부진했다. 그러자 노다는 서울 남대문(1894.4)으로 의원을 이전했다. 당시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500여 명에 불과했지만, 노다는 일본의 정치적 우세를 확신했던 것 같다.

그 해 조선은 전봉준․손화중이 이끄는 동학군들이 전라도 일대에서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고 있었고, 이를 진압하겠다는 명목으로 청․일전쟁이 발발한 시기였다.

청․일전쟁 당시 노다 치과의원에 한국인들의 투석이 잦았음에도 노다는 “대한부인의 접수는 부의(婦醫)가 한다”는 신문광고를 통해 한국인 환자를 확보하는데도 성의를 보였다. 4개월 만에 일본인 거주지인 진고개(현재의 충무로)로 이전한 후에도 노다는 몇 년간 개원 유지가 어려워 걸어서 남부지역을 가거나, 말이나 배편을 이용해 인천으로 출장을 다녀야 했다.

한편 개화파들의 갑오정권(1894.6-1896.2)은 갑오경장(1894)을 계기로 의료제도와 기구를 근대적으로 개혁했다. 중앙기구로 위생국을 설치(1894.6.28)해 서울 도시계획사업과 청․일전쟁으로 유행한 콜레라 퇴치사업을 진행했다.

당시 노다는 조선친위대 병졸모집에 구강검사를 나가 한국인 100명(18-30세) 중 ‘충치를 가진 사람은 17명이고 결손치를 가진 사람은 11명, 매독에 의한 이상치를 가진 사람은 3명’이라는 결과(1896)를 얻었다.

갑오정권이 아관파천으로 무너지자 대한제국(1897.10.12)이 선포됐는데, 대한제국은 의학부분에서는 동서병립(東西竝立)을 개진했다. 동서병립이란 한의학이 조선의 풍토와 체질에 유효하다는 입장 하에 서양의학의 교육, 면허, 병원형식을 절충하고자 한 것이다.

그 결과 의학교와 내부병원(광제원,1899)의 관제가 공포되고 의사규칙이 반포(1900)됐다. 그러나 서양식 의사는 물론 치과의사에 대한 법령도 제정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노다는 구강위생계몽과 검진, 치과치료에 전력을 다해 ‘해가 갈수록 환자수가 점증’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노다 치과의원 입구에는 ‘고무총의치(틀니), 금니, 도치를 배열한 표본상’이 걸려 있었는데, 이는 ‘명치초년 동경의 입치사를 떠올리게 하는 광경’으로, 다소 비속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보철물 표본 전시는 한국인들이 서양 근대 치과치료가 어떤 것인지 직접 눈으로 보고 이해할 수 있어 실용적이었다.

노다의 치과진료 범위는 보철, 보존, 구강외과 전반이었다. 총의치(틀니)는 고무로 제작했고, 충치의 수복에는 아말감충전과 금박충전을 했다. 국소마취는 푸로카인제를 직접 만들어 사용했는데, 혈관수축제의 작용으로 ‘푸로카인 쇼크’가 간혹 발생되는 부작용도 있었다.

환자로는 일본인, 조선인 상류층, 외국인이 두루 있었다. 한국인들은 금이 노출되는 것을 싫어하고, 틀니를 한 사실도 감추고 싶어 해 틀니 고리로 백금을 사용했다. 하지만 한국인들에게 치아보철의 효용성은 널리 퍼져나가 개원 10년만에 노다의 월수입은 당시 쌀 200가마에 해당하는 600~700원에 달하게 되었다.

하지만 노다 치과의원을 위협하는 골칫거리가 있었으니 그것은 인접한 곳에 ‘치과시술소’를 낸 입치업자 고모리(1902)의 개업이었다. 결국 노다는 ‘개업 10주년(1903)’기념으로 “6개월간 치과치료비 3할을 감해주고 병사 및 15세 미만자는 반액으로 할인해 준다”는 광고를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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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rugi 2005-09-27 14:43:04
그러고 보니까 내가 野田應治가 조선에 최초의 치과를 개원하고 꼭 100년만에 개원한거였네요...
그런데 "그가 제물포에 개원하게 된 것(1893)"
"1890년 6월30일 제물포에서 처음으로 개원"
"노다는 ‘개업 10주년(1903)'기념"로 헷갈리네요... 교정이 필요할 듯^^

dirtymind 2005-09-29 12:00:25
노다는 서울 남대문(1894.4)으로 의원을 이전했다 니까요, 남대문 개업10주년은 맞네요. ^^ 서울에는 노다가 치과를 개업하고 있고, 전라도에는 녹두장군이 승승장구하고... 막, 현실감이 느껴지네요. 재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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