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가 있는 나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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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가 있는 나라에서
  • 이서영 학생
  • 승인 2016.08.16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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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의협 의대생 캠프 참관기]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이서영 학생

고백하자면 예전에는 원폭과 그 피해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 그럼에도 히로시마 캠프에 지원한 이유는, 히로시마 원폭은 그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적인 면에서는 사회악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에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원폭 피해자들과 가족들, 그리고 이 사건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그 상처를 어떤 식으로 극복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또 의료인들은 그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도 알고 싶었다. 일본의 경우를 배우면 한국의 상황에도 대입할 수 있는 어떤 교훈이 있지는 않을까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 참석하기에 부끄러울 정도로 나는 히로시마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폭탄이 떨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피폭되어 고통 받았고 방사능은 무서운 것이다”라는 일차원적 사고에 지나지 않는 배경지식이 전부였다. 부끄럽기도 했지만 나 스스로에 대해 일견 놀라기까지 했다.

21세기 분단국가의 시민에게 ‘핵전쟁’은 익숙한 두려움이다. 그런데 이웃나라 일본에서 수십 년 전 핵전쟁이 일어났는데, 나는 왜 그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지 못했을까? 반성하는 마음에 의문까지 담아서 머릿속이 복잡했다. 다행히도 세 번의 사전 세미나를 통해서 히로시마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한 지식을 조금이나마 쌓고 히로시마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히로시마에 도착하자마자 숨이 턱 막히는 더위가 우리를 맞이했다. 8월 초 히로시마의 낮 최고기온은 34도에서 36도 정도로, 우리나라의 요즘 기온과 크게 다를 바 없었지만 왠지 햇살이 더 뜨겁게 느껴졌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도 이때처럼 더웠을 것이다. 여느 여름과 다름없이 태양이 작열하고 그늘조차 후덥지근한 날씨에, 시민들은 히로시마의 도심을 향해 출근하고 있었다. 그리고 8시 15분, 피카-돈-(일본어로 원폭이 떨어진 뒤 ‘번쩍’하는 섬광과 ‘쿵’ 하는 굉음을 칭하는 말)과 함께 수십만의 사람들이, 모든 것을 잃었다.

첫날 방문한 히로시마 공(共)립병원(공공기관이 아니라 협력해서 지은 민의련의 생협 시스템의 병원이라고 한다)의 마당에 서서 폭탄이 떨어지던 날에 대한 목격담을 들었다.

그날 아침, 지금의 병원 부지에서 올려다 보이는 하늘을 가로질러 ‘에놀라게이’라 불리는 B-29기가 지나갔다. 사람들은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짐작도 못한 채 또 폭격이 있으면 어쩌나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 B-29는 폭탄도 사람도 아닌 것이 달려있는 낙하산 세 개를 연달아 떨어뜨리고 도심 쪽으로 날아갔다. 그 낙하산에 달려 있던 것은 측정기구로 추정된다고 한다. 원폭의 영향을 측정하여 정보를 수집할 기계들. 원폭 투하는 전쟁을 끝내기 위함이 아니라 전쟁을 빌미로 자행된 실험이었다는 이야기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서 배웠던 히로시마의 한 줄짜리 역사에는 너무 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 자료관은 당시의 피해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유품들로 넘쳐난다. 발신자와 수신자 모두 안녕하지 못하게 된 안부 편지, 뼈대만 남은 세발자전거,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다 타버린 도시락, 건물의 유해까지 당시에 말 그대로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자료들을 보고 나서 고층건물들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히로시마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이곳의 과거를 믿을 수 없을 지경이다. 이렇듯 물리적인 것들은 거의 완벽하게 재건되었을지 몰라도, 전쟁이 파괴한 사람들의 삶과 그로인해 야기된 분쟁은 아직도 해결되지 못했고, 아직도 진행 중인 것 같다.

아오키 선생님은 강연에서 피폭자 2세와 3세까지 이어진 방사능 질환과 그 고통은 충분히 보상받기는커녕 사회적 차별로 이어졌으며, 미국은 가해 사실에 대해 충분히 반성하지 않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당시 히로시마에는 한국 사람들도 많이 있었는데, 피폭자라는 소수자 집단 안에서도 소수자인 재외피폭자들에 대한 소외와 차별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충격적인 것은 일본 시민들 중에는 일본의 과학기술이 미국에 뒤처졌기 때문에 폭탄을 맞았다는 의견, 미국에 맞설 힘을 길렀으면 이 사태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는 말씀이었다. 전쟁의 피해를 가장 가까이서 경험한 사람들조차 전쟁을 멈추지 않으려 한다니. 평화 공원에 갔을 때는 심지어 전쟁법 도입 여론을 조장하는 선전 방송을 크게 틀고 지나다니는 우익 단체의 버스도 보았다. ‘평화’공원에서 ‘전쟁’법이라니, 엄청난 모순의 향연이었다.

일본의 수상은 거짓 평화를 이야기하고 헌법9조 개악을 추진함에도 불구하고, 희망적인 것은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히로시마 공립병원은 꾸준히 피폭자 진료에 힘쓰고 있다. 거의 저녁마다 있었던 교류회에서 만난 많은 민의련 사람들은 약자를 위협하는 사회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고민하는 사람들이었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평화기념식 행사에서, 그리고 강가에 유등을 띄면서 평화를 기원하고 있었다.

또, 자신의 피해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발전하여 원전 문제까지 해결하기 위해 반핵단체에서 활동하시는 피폭자 할머니도 계신다. 할머니께서는 피폭자 간담회에 오셔서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힘들었던 시기에 가장 의지가 되었던 사람들이 누구냐는 질문에 가족과 의료진이라고 말씀하셨다.

부끄럽지만 사실 의대진학 이후에도 딱히 의학공부에 대한 열정이 없었는데, 할머니 같은 분들에게 진짜 도움이 되기 위해서 공부해야겠다는 동기를 부여 받았다. 히로시마에서 원폭피해와 그 실상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배웠던 것도 큰 소득이었지만, 앞으로 어떻게 공부하고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그리고 배워서 어떤 의사가 될 것인가에 대한 청사진을 그려볼 수 있는 경험이었기에 더욱 의미가 컸다.

 

이서영 학생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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