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세와 근대의 흔적을 살펴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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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중세와 근대의 흔적을 살펴보다
  • 김광수
  • 승인 2016.09.26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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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수의 중국기행⑪] 무한- 보통사, 황학루

김광수 원장은 무한에 도착해 보통사와 황학루를 둘러본다. 그곳에서 그는 송나라와 청나라 때의 중국을 가늠하며 다양한 이야기를 살핀다. 청나라 서태후에 얽힌 이야기와 송나라의 영웅 악비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김 원장은 역사 속 인물을 대하는 중국인들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본다.

-편집자-

간밤에 무한(武漢)에 도착했다. 우선 무한은 지명이 너무 헷갈린다. 한줄로 표시하면 이렇다.

무한(武漢) = 한구(漢口) + 무창(武昌) + 한양(漢陽)

한구와 한양에서 漢자가 들어갔고, 무창의 武자가 들어갔다. 우리나라에도 있다. 마산+ 창원+ 진해 = “마창진”이다. 다만, 마창진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창원이라는 이름이 승리했다. 그러나 지금도 마산 사람들이 그 이름에 대해서 불만이 많은 것을 목도했다.

세 도시 중에서는 한양이 가장 작다. 그래서 漢陽이 밀린 느낌이고(나는 한양학원에서 밥 벌어먹고 살고 있다), 그냥 한구와 무창이 합쳐진 것으로 사람들은 이해한다. 무창은 만만치 않은 도시이다. 그 경제력이나, 생산성이나, 인구나 그런 것이 상당히 높다고 한다. 내륙 경제의 요충이다. 교통은 물론이고.

원래 한구, 무창은 양자강과 한수(漢水)가 합수되는 지점으로 교통의 요충으로 발달된 곳이다. 물론 고대에는 군사적으로도 요충이다. 그래서 무한 삼진(3鎭)이란 무한이 세 가지(군사 + 교통 + 상업)의 중심지라는 말이라고 한다. 삼국지에서도 이 지방을 차지하는 자가 중원을 지배한다고 한다.

또한 무창은 신해혁명이 일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1911년 신해혁명이 무창에서 일어나서 청나라가 망했다. 그리고 손문을 중심으로 공화정(중화민국)이 성립됐으니, 이만하면 꽤 유명한 셈이다.

그 이후로 한동안 무창은 중국 혁명의 중심이었고, 중국 개혁의 중심지였다. 태허(太虛-타이쉬)스님의 중국불교 개혁운동도 1921년 무창에 불교대학, 즉 무창불학원을 건립하고, 여기 졸업생과 제자들이 중국불교 개혁의 주역이 되었던 것이다.

▲태허가 무창에서 발행하던 해조음. 중국 불교개혁의 중심이었다.
▲한구, 한양, 무창 세 곳을 찾아보자.

이번에 갈 곳은 황학루, 신해혁명 기념관 그리고 동호다. 장강의 흐름은 동북방, 사진 왼쪽에서 합수되는 강이 바로 한수(漢水)다.

 
 
 

무한의 유스호스텔은 ‘path-finder’란 이름의 숙소였는데, 가장 젊은이들의 여행자 숙소다운 모습을 한 곳이었다. 빨래를 널어 말리는 마당이다. 여름에는 매일 빨아야 한다. 하루에 적어도 두 번은 땀에 푹 젖는다.

 

요것은 YH가 있는 지하철 역 간판인데, 제법 미술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보석을 별로 눈 여겨 보지 않는 내 눈에는) 무슨 보석집 간판같다. 지하철 역 이름도 특이하다. 무슨 게가 많이 잡히는 '곳' 이라는 뜻인지. 양자강가니까 민물 게겠지?

봐야 할 곳이 많기 때문에(그리고 조금 지나면 금방 더워지기 때문에) 아침에 일찍 길을 나섰다. 무한은 중국에서 가장 더운 3대 찜통 중 하나라고 한다. 그것은 무한, 남경, 중경이다. 남경은 3년 전에 다녀왔고, 중경은 2일 후에 간다. 그것도 가장 더운 날짜인, 7월 28일에... 흡사 더위와의 전쟁을 치르는 것 같다.

귀원사는 내일 보기로 하고, 오늘은 비교적 지하철로 쉽게 갈 수 있는 보통사부터 가보기로 했다. 송대의 불교사원, 보통사(寶通寺, 바오퉁스)에 대한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관심 없으신 분은 건너뛰시라)

1,500여년의 역사를 가진 이 사찰은 무창 홍산(洪山) 남록에 자리한 송대에 건축된 불교사원이다. 오래된 역사답게 많은 문물고적이 원내에 있는데, 송대의 현종(玄鐘), 원대의 보탑(寶塔)과 명대의 석사(石獅) 등이 그것이다.

송대의 현종은 높이 약 24m의 전체에 불교 경전의 문장이 쓰여 있고, 만근종(万斤鐘)이라고도 불리는데 호북성에 남아 있는 불교 문물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철기다. 명대의 석사자는 높이 20m 정도의 강남 제일의 석조물로 웅장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조형물로 평가되고 있다. 또 7층 높이의 보탑은 계단으로 오를 수 있게 해 놓았으며,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장관이다.

 
▲아침 7시, 아침 햇살이 관음보살님 부조에 기울어져 비친다.
▲미륵전
▲장경루, 그 아래는 옥불전.
▲보통사는 보배 보(寶)자를 쓰는구나.
▲만불전. 윗층은 비로전인 듯하다.

이 산이 홍산이다. 무창 시내에 있는 것이 홍산이다. 서울에 있는 것이 남산이듯이. 그런데 이 홍산의 바로 뒷편은 동호(東湖)이다. 항주의 서호와 짝을 이루는 것이 동호이다. 동호 쪽에서 배로 홍산을 바라보는 것이 멋있을 것이다.

▲홍산 보탑이다.
▲목어(木魚)

목어(木魚)다. ‘유마수단 립미난소’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무슨 뜻인가? 유마의 손에는 쌀알갱이가 떨어질 날이 없다? 유마만 쫓아다니면 밥 굶을 걱정은 없다는 뜻인가?

▲‘자희태후와 홍산 차대?’

자희태후는 청나라의 마지막 태후인 서태후이다. 흔히 청나라를 망하게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배다른 자식인 광서제를 독살하고 자신의 아들을 황제에 앉히고 섭정을 할 만큼 악독했다.

심지어 서태후는 서양 세력의 침략을 막아내자고 모금한 돈으로 해군을 육성하려고 했는데, 그 돈을 모두 자신의 궁궐이 있는 북경의 이화원을 중수하는데 써버렸다. 청나라가 쓰러지는 날까지 이화원에서 경극을 즐기느라고 돈을 쓰기도 했다 한다.

그런데, 그와는 다른 시각도 있는 듯하다. 광서제가 병으로 죽었다는 표현도 있고, 혹은 특히 여자라서 다른 황제보다 사사건건 나쁘게 기록됐다는 주장도 있다. 당나라의 측천무후처럼(하기야 측천무후는 자신이 낳은 자식을 바로 질식시켜 죽였다지. 그 살인을 황후에게 뒤집어씌우고 자신이 황후가 되기 위해....) 말이다.

서태후가 서양인들에게 쫒겨서 서안 쪽으로 피신할 때, 허운(虛雲) 스님이 호위를 해서 가신 일이 있었는데, 허운스님의 표현에는 자희태후를 상당히 존중하는 표현을 썼다. 그저 황후에 대한 예의에서 그랬을까. 아니면 국민에게 단지 그녀가 황후라는 이유로 함부로 비난하지 못하는 그런 순진한 마음이 있어서인가?

(다른 예로 불자들 중에는 단지 그들이 스님이라는 이유로 스님들에 대한 흉이나 나쁜 이야기들을 꾹 참고 그저 좋게만 보려고 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그들의 순진성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또한 그 때문에 불교의 개혁이 저해되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이곳은 홍산 차의 본고장으로서, 홍산차를 정기적으로 자희태후께 바치던 곳이라는 표지이다. 이 홍산 차는 BC 3000년 하(夏)나라 당시부터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여기 보통사의 홍산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니 재미있는 간판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저멀리 건물 꼭대기의 빨간 글자를 보면, 무과(武鍋)라는 글자가 보인다. 무과? 무한의 찜통? 무한이 얼마나 찜통더위면 건물 꼭대기에 저렇게 간판까지 만들었을까... 이제 황학루로 이동한다.

 

황학루는 학에 얽힌 이야기로 유명하다. ‘신씨주주(辛氏酒樓)’ 을 보면, 옛날에, 신씨부인이 산에서 술을 팔았다. 한 도사가 자주 길을 지나면서 여기 내려와서 술과 음식을 먹었는데, 돈은 한 푼도 내지 않았다. 신씨는 이를 따지지 않았다. 한번은 술을 마신 후, 도사가 신씨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에서 벽에 선학(仙鶴)을 한 마리 그려주고 신씨에게 말했다.

"이후 손님이 오면 네가 손뼉을 치면 학이 내려 춤을 추며 손님에게 술을 권할 것이다"라고 하고는 말이 끝나자마자 도사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도사의 말이 과연 맞았다. 이 작은 술집은 일시에 손님이 가득 차게 되었고, 신씨도 이로써 부자가 됐다. 10년 후, 도사가 다시 이곳을 왔는데, 그가 오면서 피리를 불자, 피리소리와 함께 흰 구름과 선학이 날아왔다. 도사는 황학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신씨는 그 신선을 기념하기 위해, 이 땅에 누각을 세우고 ‘황학루’라고 이름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누각의 모양이 학 같아서 황학루라고 지었다고 하고, 어떤 이는 황학루가 소재한 곳이 "황곡산(黃鵠山)", "황곡기(黃鵠磯)"라고 부르는데, 고증에 의하면 황곡산이 바로 황학산이라는 것으로 일정치 않다.

아무튼 역사적 사실로는 삼국시대, 오나라 손권이 촉나라 유비와의 싸움에 대비해 AD 223년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즉 이 지역이 오나라와 촉나라의 대치점이다.

 
 

 

 
 

누각 속에는 여러 시인들이 황학루에서, 혹은 황학루를 읊은 시들이 적혀 있다. 소동파도 있지만, 백거이, 이백, 육유, 왕유 등의 시들도 있다. 후면은 보수공사 중이다. 추녀들이 학이 날아가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여기에서 장강대교가 내려다보인다. 이 장강대교는 1957년 러시아의 기술 원조로 세워졌다고 한다. 1층은 기차가 다니고, 2층은 자동차와 사람이 다닌다. 걸어서 건너려면 30분이 걸린다고 한다. 장강이 그만큼 넓다는 거다(그러니까 오랫동안 무창과 한구가 각각의 도시로 커졌겠지..).  이 다리가 생기기 전까지는 장강에 도착한 기차를 분해해서 배로 이동시켰다고 한다. 그만큼 장강을 건넌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자미원
▲악비의 상이다.

때는 송나라로 넘어가서, 악비(1103-1142)는 송나라를 지킨 영웅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흠, 39살에 죽었다고.

그런데, 송나라의 국경이 여기였다고 생각하면 좀 웃기는데, 여기는 중국의 한복판이고, 그중에서도 전국 때는 초나라의 북쪽 경계이고, 삼국시대에도 오나라의 북쪽 국경이니까, 중국의 한가운데인데, 이곳이 송나라의 변방이었다는 것이 웃긴다. 그 정도로 송나라는 반쪽뿐인 나라였다는 거다. 마치 지금의 남한처럼.

그럼 악비가 누구와 싸웠느냐? 북방의 야만족하고 싸웠다는 것인데, 그 야만족이라는 것이 일종의 만주족, 혹은 요나라 금나라에 해당하는 나라들이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송나라는 약체였고, 그래서 아마도 더욱 한족이 악비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는 것인가. 사실은 그 북쪽 땅에 사는 사람들도 한족이었을 터인데.

▲악비가 죽은 나이가 36세에 불과하다..

악비의 공적을 잊지 않기 위해 이곳의 이름을 악주로 하고, 이곳 땅을 봉토로 해 악왕을 삼았다.

산을 내려가면 바로 신해혁명 당시, 청나라 관군과 싸워서 이긴 무창봉기를 지휘하던 건물이 나온다. 그 건물이 신해혁명 기념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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