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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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것들
  • 조인규
  • 승인 2016.12.16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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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맘대로 서울 성곽기행] 덕수궁과 경교장, 서울기상관측소까지

오랜 역사를 간직한 정동길에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들’과 ‘지금까지 남은 흔적’이 함께 있다.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던 건축물, 그리고 그 곁에서 오랜 기억을 지켜온 나무들까지. 이번 ‘내맘대로 서울 성곽기행’은 사라진 과거의 흔적을 추억하면서 오랜 세월 묵묵히 자리해온 것들을 만나는 산책길이다.

-편집자-

▲정동길 풍경

이화여고를 나오면서 정문을 살짝 보면, 여기가 손탁호텔이었음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있다. 손탁호텔은 서울에 세워진 최초의 호텔이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숍이 자리 잡고 있어서 커피를 대중화시킨 역사적인 곳이기도 하다. 손탁호텔은 고종이 손탁에게 하사한 것으로 당시에는 실질적인 영빈관의 역할을 했다.

손탁호텔은 주변에 모여 있던 외국 영사관의 공사관 사람들이 모여 정동클럽을 이뤘던 곳이기도 하다. 고종 재위 시기 역사에서 없어서는 안될 만큼 중요한 장소였지만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없다.

▲중명전

손탁호텔 표지석을 벗어나 이화여고 맞은 편을 보면 정동극장과 중명전이 자리하고 있다. 중명전은 덕수궁의 부속 건물이었으나 덕수궁이 외국의 영사관들에 조금 조금씩 팔려나가면서 지금과 같이 혼자 외떨어져 있게 됐다.

중명전은 처음에 수옥헌이라는 왕실 도서관으로 지어졌고 후에 서양식 붉은 벽돌조 건물로 새로 지어졌다. 1904년에 덕수궁 대화재로 모든 건물이 전소되는 바람에 고종이 정전으로 삼아 지냈던 곳이기도 하다. 바로 이 곳에서 1905년 굴욕적인 을사조약이 체결됐고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 특사를 몰래 파견하기도 했다.

중명전에 들어가려면 덕수궁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예약을 해야 하는데, 올해 말까지는 내부 보수공사와 전시물 교체를 위해 휴관한다고 한다. 덕수궁과 중명전 등은 따로 정동기행을 진행하고 여기서는 넘어가도록 한다.

▲캐나다대사관 앞 회화나무

덕수궁을 지나 정동길을 걷다 보면 캐나다 대사관이 보인다. 캐나다 대사관 앞에는 굵고 늙은 몸을 힘겹게 지탱하고 있는 500년 수령의 회화 나무 보호수 한그루가 터를 잡고 앉아 있다. 한때는 사방으로 뻗어있었을 가지들은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렸는지, 굵은 몸통에 세 가닥의 가지만이 지지대에 의지해 살아남아 있다.

캐나다 대사관은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이 나무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건물 한쪽을 안으로 오목하게 설계했다고 한다. 나무 한그루에 대한 깊은 배려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대사관 앞에는 벤치들이 잘 만들어져 있으니 앉아서 다리를 잠시 쉬어주면서 자연과의 공존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러시아 공사관 터

이 주변으로는 예쁜 카페와 식당들이 곳곳에 있으니 배도 채우고 좀 오래 쉬어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캐나다 대사관 옆으로는 옛 러시아공사관 터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언덕 위에는 옛 러시아공사관 터였음을 알려주는 탑이 마치 기념비인냥 홀로 서 있다.

러시아 공사관은 조선 말기 정동이 우리나라 외교의 중심지였을 때 가장 크고 화려한 외국 공사관이었다. 한때는 을미사변 직후 고종이 아관파천으로 피신해 있던 곳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공사관 건물은 모두 파괴됐다. 현재는 하얀 종탑만이 언덕위에 남아 과거의 빛바랜 영화를 기념하고 있다.

최근에 듣기로는 옛 러시아공사관을 복원할 계획이라는 얘기도 있다. 공사관 터 아래에는 자그마한 유럽식 정원이 꾸며져 있으니 잠시 쉬기에도 좋다. 다시 길을 나서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 중 하나로 꼽히는 정동아파트를 지나게 되고 그 옆으로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이 자리하고 있다.

▲평화의 소녀상
▲평화의 소녀상 앞에 새겨진 신영복 선생 글씨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한쪽 화단에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로하는 소녀상이 세워져 있다. 전국 지자체에 여러 소녀상이 세워졌지만 여기 소녀상은 조금 특별하다. 여러 학교 여고생들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아서 건립했기 때문이다. 또한, 소녀상에 새겨 넣은 글씨는 신영복 선생님이 쓰신 것이다.

선생님은 여학생들이 교수님께 직접 부탁드리자 흔쾌히 소녀상 제목글씨를 써주셨다고 한다. 아마도 비에 새겨진 신영복 선생님의 마지막 글씨이지 않을까 싶다. 회관 1층은 카페로 운영되고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정동길의 끝에 있는 경향신문사는 바로 서대문 옛 이름인 ‘돈의문’이 있던 자리다. 돈의문 터임을 알리는 조형물이 길 건너에 만들어져 있다. 지척에 경희궁과 서울역사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으나 다음에 들러보기로 하고 이번에는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경교장

돈의문 옛터 바로 앞에는 강북 삼성병원이 있다. 잠깐이나마 안으로 들어가 보면 삼성병원이 사방을 높게 빙 둘러쌓은 안으로 2층짜리 석조건물 한 채가 낯설게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은 백범 김구 선생님이 해방 후 귀국해서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집무실로 사용했던 경교장이다.

경교장은 임시정부의 마지막을 장식한 곳이다. 1948년에 김구 선생이 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기 전 선생의 방북을 반대하는 청년들이 경교장 앞을 가득 메웠다. 그때 김구 선생은 경교장의 현관 위 발코니에 나와 방북의 당위성을 역설하며 사자후를 토했다. 이후 이곳에서 선생이 안두희의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선생 서거 후 여러 차례 건물의 주인이 바뀌었다. 그러던 중 삼성병원이 인수해 병원 현관으로 사용해오던 것을 몇 년 전에야 겨우 김구선생 기념관으로 꾸며서 개방하고 있다. 건물 2층 창에는 총알 자국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경교장 옆 안내소에서 두 번째 성곽길 스템프를 찍을 수 있다.

▲월암공원
▲홍난파 가옥

 

서울 교육청을 지나면 너른 잔디밭의 월암공원이 보이면서 성곽길이 다시 모습을 나타낸다. 복원된 성곽과 옛날 성곽이 퍼즐처럼 펼쳐져 있다. 공원 잔디밭 사이를 가로질러 걷다보면 공원 끝에 푸른 담쟁이들을 가득 덮어쓴 아담하고 예쁜 붉은색 벽돌집 한 채가 있다. 홍난파 옛 집이다. 홍난파가 생의 말년을 보낸 곳으로 바로 이곳에서 그의 대표곡들이 만들어졌다.

홍난파의 옛 집은 근대 문화재로 지정됐고 홍난파 기념관으로 꾸며져 개방하고 있다. 그가 작곡한 노래들을 들으면서 그가 사용했던 피아노와 악보노트 등을 볼 수 있다. 안타까운 건 ‘봉선화’와 같은 아름다운 곡을 작곡해 민족 음악가라 불리기도 했던 홍난파가 일제의 태평양전쟁 시기에 명백한 친일행위를 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을 올렸다. 누군가를 평가하려면 ‘공’ 과 ‘과’를 분명히 살펴봐야 함을 세삼 깨닫게 되는 장소가 아닌가 싶다.

▲서울기상관측소

홍난파 옛집 성곽 위 언덕을 보면 서울기상관측소가 있다. 체력이 허락된다면 잠깐이나마 올라가 보길 추천한다.

언덕 위 새하얗게 칠해져 유난히 밝게 보이는 건물이 중앙부만 둥글게 지어졌는데 무척이나 예쁘고 인상적인 건축물이다. 역시 근대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1933년 일제 강점기에 이곳에 기상대를 옮겨오면서 기상관측을 시작한 이래 80년 넘는 시간동안 기상 데이터를 쌓아온 곳이다.

우리가 일기예보에서 “올해 서울에 첫 단풍이 들었다”라거나 “서울에 첫눈이 내렸다”라고 하는 등 기상현상이 이곳에서 관측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사실 우리나라 최초의 기상대는 인천 자유공원 끝에 자리한 인천기상대라고 한다.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소돼 모든 데이터를 잃어버렸다. 관측소 건물도 최근 몇 년 전에 새 청사를 짓기 위해 허물어버려서 더 이상 인천에는 기상관측의 역사를 고증할 만한 게 없다.

이 때문에 서울기상관측소는 수도권의 근대 기상관측의 역사를 말해주는 거의 유일한 장소가 됐다. 이곳 관측소는 역사적인 공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언덕 위에서 바라다보는 전망이 참 좋은 곳이다. 서울 서쪽의 안산과 북쪽의 인왕산이 손에 잡힐 듯 보이고 인왕산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성곽 길을 뚜렷하게 바라볼 수 있다.

▲서울기상관측소 앞 단풍나무

예전에는 관측소 앞이 탁 트여 있어서 서울의 서쪽 방향을 막힘없이 조망할 수 있었지만, 최근에 큰 아파트단지가 세워지면서 한쪽 전망을 온통 가려버린 것은 정말 아쉬운 점이다. 그럼에도 꼭 가보길 추천하는 건 기상관측소 건물과 함께 관측소 마당 끝에 자리 잡은 멋진 단풍나무 한 그루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단풍나무가 매년 서울에 단풍이 드는 시기나 단풍이 절정인 시기를 결정하는 기준목이다.

그러니 올해 서울에 단풍이 절정이라는 일기예보가 나온다면 그 때에 맞춰서 이곳에 올라와 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관측소 마당에는 단풍나무뿐 아니라 봄꽃의 첫 개화시기를 알려주는 진달래와 철쭉 등 모든 기준이 되는 꽃들도 함께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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