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감부, 한대위의 치의학교 설립안을 묵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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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부, 한대위의 치의학교 설립안을 묵살하다.
  • 이주연
  • 승인 2005.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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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일전쟁은 일본이 한국에 대한 우위권을 차지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을사보호조약(1905.7)체결 이후 일본에게 ‘한국 병합’은 시간문제였다. 통감기 일본은 밖으론 만주를 둘러싼 러․미간의 외교적 문제를 해결하고 안으론 한국의 식민지화를 진행하였다.

이에 따라 대한제국의 보건의료도 식민지 보건의료체계로 개편된다. 중앙보건행정기구였던 위생국이 폐기되고 경무국 소관으로 이관되었으며, 일본인들이 보건행정과 의료기구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치과의료분야에서는 일본인 치과의사들이 10명으로 늘어나고, 다수의 입치사들이 존재했다. 이 시기 미국인 선교치과의사 한 대위(David Edward Hahn)가 내한했는데, 그는 한국인을 위한 치의학교 설립을 제안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한 대위가 선교치과의사로 활동한 것은 약 5개월간(1906.1-6)이다.

그 동안 그는 주일에는 무료진료소를 열고, 주중에는 세브란스 병원과 이화 학당, 영국교회의 고아원등과 연계하여 치과진료를 하였다. 또 교회청년회나 YMCA등의 단체를 통한 복음전도와 애국계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시기 한국 내에는 교육, 언론, 산업, 의료부분 등에서 자강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하였다. 3,000여개의 사립학교가 설립(1907-1910)되었고, 제중원 부속 의학부도 7명의 졸업생을 배출(1908)하여 의술개업인허장을 부여했다. 그러나 치의학교는 없는 상황이었다.

한 대위는 선교사직을 사퇴하고 스크랜톤 병원 옆에 치과진료소를 개설했는데, 환자가 ‘매일 기십명식 대기’할 정도로 많았다. 한 대위는 곧 자신의 치과에 치의학교를 병설하여 한국학생을 교육하고 장차 제중원과 연합하여 운영할 계획을 발표(1909)하였다.

대한매일신보 학계(學界)란에는 ‘의교창립’이란 제목으로 ‘미국 치의사 한 대위씨가 경성 남대문 내 자기 사저(私邸)의 치의학교를 창설데 차(此) 학교의셔 장차 남문외 제중원과 연합 주업 터이오(該) 원의 신 건축이 충비(充備)되면 차 학교 해원 이부(移付)고우원의 치과부를 증설 다더라’고 되어 있다.

이어 논설에서는 ‘한대위씨의 학교 창립을 축하노라’고 하고 ‘서양인이 만리 해외에서 건너와 한국의 문명을 북돋우려 한국 사람의 지식을 자라게 하여 한국형제의 진로를 장려하거든 실로 환영하며, 한 대위가 학교를 창립하면 그 효과가 제중원과 맹아학교만큼 커질 것’이라고 평하였다.

한 대위의 치의학교 설립모형은 그가 졸업한 필라델피아 치과대학의 구강외과와 보철을 망라한 3년제로, 처음에는 치의학과 단독으로 시작되었다가 차차 종합대학 및 의과대학과 연합하게 되는 미국치의학교육사의 맥락과도 어느 정도 일치한다.

그러나 한 대위의 치과의학교 설립 안은 일본 통감부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일본은 한국인 치과의사를 양성할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중원의 의학교육에 이어 치의학 교육에 있어서까지 미국에게 기선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결과 한 대위의 치의학교 설립안은 좌절되고, 한국인 치과의사들에 의해 한국 근대 치과의료체계가 형성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이주연(서울 세브란스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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