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찬 그녀' 지하철에서 성추행범을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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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찬 그녀' 지하철에서 성추행범을 잡다
  • 이우리
  • 승인 2006.03.19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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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지하철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대학에 다닐 때니까 벌써 10년이 넘은 이야기 같다. 90년대 초반, 한 중년의 아줌마가 지하철에 탔더란다. 그런데 요즘(아니, 당시) 젊은 것들, 보는 눈도 아랑곳없이 둘이 껴안고 선 채로 진한 키스를 나누더라나? 미친년 놈들, 투덜거리며 앉았다 내릴 곳이 되어 내렸는데, 백주대낮에 지하철에서 진한 키스를 나누던 그 아가씨가 아줌마를 따라 내리더란다.

그런데 그 아가씨,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펑펑’ 눈물을 쏟는 게 아닌가? 아니, 지 좋아서 벌건 대낮에 남들 아랑곳없이 뽀뽀를 해댈 땐 언제고, 이제 와서 펑펑 눈물을 흘리고 야단이야? 괘씸한 생각에 그 아줌마 참지 못하고 물었단다. “참내, 왜 울우?” 그랬더니 그 아가씨, 앙칼지게 그 아줌마를 쏘아보며 내뱉었다는 한 마디...

“그럼 그 남자가 시퍼런 칼을 옆구리에 대고 있는데 어떻게 해요?”

헉, 후배 녀석이 누군가에게 들었다면서 술자리에서 들려준 그 이야기에 얼마나 놀랬던지... 너무나 갑작스러운 반전에 술잔만 들이키며 “세상 정말 무서워졌다”는 헛헛한 생각에 빠져들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누군가 당시 세태를 반영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오늘 지하철에서 ‘당찬 그녀’를 만났다

어젯밤 술이 좀 과했던가? 지하철 안에서 운 좋게 자리를 잡고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려온다. “야, 이 개XX야!” 젊은 여자 목소리였다. 이건 또 뭐야? 아침부터... 나는 또 당돌한 젊은 여자하고 까랑까랑한 할아버지가 자리다툼이라도 붙었나보다 하고 짜증 섞인 표정으로 눈을 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하긴 아무리 막 나가는 젊은 처자라 하더라도 그렇게 연세 많은 할아버지께 마구 막말을 해댈 수는 없는 노릇일 터였다. 그럼 또 뭐야, 하면서 어리둥절해 있는데 갑자기 한 남자가 후다닥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이 XX가 어디를 쓰다듬어?”하는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에 이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30대 후반의 중년남자가 당황한 채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다. 보통사람들에 비해서는 한 시간이나 늦은 출근시간 때문에 지하철은 비교적 한산한 편이다. 순간 그 남자가 뒤로 돌아서는가 싶더니 잽싸게 튀어 달아나기 시작한다.

“저 XX 잡어”하면서 그 여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쫓기 시작한다. “성추행이다!” “잡아, 잡아!” 심지어는 “도둑놈이다!”하는 소리까지 들린다. 모두가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다. 한 걸음에 내달려 여기저기서 낚아채려는 사람들을 비집고 다음 칸까지 도망간 그 남자는 주위 사람들의 제지로 뒤 쫒아간 그 여자에게 붙잡혀 되돌아 왔다.

‘당찬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조용히 끌려오고 있는 30대 그 남자의 낭패한 표정. 그리고 보무도 당당히 그 남자의 머리채를 그러잡고 되돌아오고 있는 2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당찬 그녀’의 침착한 모습. ‘당찬 그녀’는 의자에 놓아두었던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어디론가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지하철은 그새 OO역에 정차하고 있었다.

“지금 지하철 안인데 성추행범을 현장에서 붙잡았거든요. 지금 OO역이니까 다음 역에서 만나요.” 통화내용으로 추측해보건 데 아마도 112에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그 침착한 모습이라니... 그런데 OO역에서 지하철 문이 열리자 누군가 밖을 내다보더니 누가 있다고 소리를 친다.

잠시 후 웬 사람들의 모습이 문 앞으로 나타난다. 그 순간 그 30대 남자가 다시 한 번 몸을 뒤채며 둘러싸인 사람들 속에서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내 옆의 60대 노인까지 합세하여 달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더 이상의 도망은 요원하기만 하다. 그렇게 잠시 몸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와중에 지하철수사대 소속인 듯 해 보이는 사람이 어느새 카메라를 꺼내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그렇게 그 남자는 그 사람들에게 넘겨졌다. 그리고 범인이 그 사람들에게 ‘확실히’ 넘겨진 것을 확인하고 난 ‘당찬 그녀’는 그제야 뒤돌아서 여태 ‘사건의 현장’인 의자에 놓여 있던 자신의 가방을 챙겨들고, 그 범인을 따라나선다.

더 많은 ‘당찬 그녀’를 보고 싶다

채 5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속에 순식간에 벌어졌던 ‘생생한 사건의 현장’이었다.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 무슨 일인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또 순식간에 마무리되어 버린. 그러나 그 짧은 시간 속에서 ‘당찬 그녀’가 지하철 안 사람들 모두에게 보여주었던 그 침착하고 당당한 모습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지체 없이 소리를 지르고, 또 지체 없이 용의자를 뒤쫓고, 당당하게 그 놈을 붙잡아 와서는 또한 지체 없이 전화로 신고를 하고, 자신이 꼭 해야 할 일이 있었을 텐데도 지체 없이 그 남자의 처벌을 위해 가방을 들고 당당히 내려서는...

벌건 백주의 대낮에도 은밀하게 벌어지곤 하는 성추행과 성폭력으로 온 나라가 얼룩져 있는 지금. 이를 근절하기 위한 여성들의 당당한 대응은 현재 우리나라의 사회 여건으로 볼 때 더더욱 필요하다고 할 수가 있다. 잘못된 사회인식으로 인해 피해여성들을 백안시하기까지 하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당찬 그녀’의 망설임 없는 신속한 대응은 정말로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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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2006-03-20 16:41:35
그녀에게 박수를 칩니다.
그녀가 많아질 수록 사회가 좋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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