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폭 역사의 전환점과 이름 없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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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폭 역사의 전환점과 이름 없는 사람들
  • 안은선 기자
  • 승인 2017.08.22 18: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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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의료인대표단, 2017년 나가사키 원수폭금지세계대회 참가 및 민의련 교류 참관기

 

▲원수폭금지세계대회 개막식에서 한국 의료인 대표단 일동

전일본민주의료기관연합회(회장 후지스에 마모루 이하 민의련)의 초청으로 13명의 한국 보건의료단체 대표단은 지난 6일부터 11일까지 ‘2017년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나가사키를 찾았다.

대표단에는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이하 건치) 청년학생위원회 정석순 위원장, 정진미 사무차장,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이하 인의협) 이보라 사무국장, 강아름 간사, 김경일‧문정주 회원, 대구‧경북 인의협 김신애 문화국장, 김선주 사무팀장, 부산‧경남 인의협 정문용 회원, 녹색병원 김민지 수련의, 인의협에서 모집한 경희대학교 의과대학 이병권 학생, 계명대학교 의과대학 김성록 학생,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이세림 학생 등 13명이다.

대표단은 ▲2017 원수폭금지세계대회 개‧폐회식 ▲민의련 교류회 ▲사세보 견학 ▲민의련 소속 토마치 후쿠시무라 요양원, 카미토마치 병원 견학 ▲피폭자 간담회 ▲군함도 견학 ▲평화기념관 및 원폭자료관 방문 등의 일정을 소화했다.

조선인 추도비 그리고 이름 없는 일본인들

첫째 날인 지난 6일, 한국 대표단은 나가사키 히라노마치에 위치한 국립 나가사키 원폭사망자 추도 평화 기념관과 원폭자료관을 방문, 피폭 자료와 피폭의 참상을 고발하는 사진, 원폭 투하의 경위와 핵무기 개발의 역사 등을 둘러봤다.

▲원폭자료관에서 폭심지가 있는 곳으로 이어지는 한 구석에 자리한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무엇보다 이날 한국 대표단의 발길을 붙잡은 것은 평화공원 한 구석, 눈에 띄지 않은 곳에 세워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였다. 히로시마의 그것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작아 대표단의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추도비는 오카 마사하루 선생이 중심이 된 ‘나가사키 재일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란 단체에 의해 지난 1979년 8월 9일에 세워졌다.

추도비 설명판에는 “1945년 미군의 원자폭탄 투하로 약 2만 명의 조선인들이 피폭 당했고 그 중 1만여 명이 폭사했다. 우리들 이름 없는 일본사람들이 얼마간의 돈을 모아 이곳 나가사키에서 비참한 생애를 보낸 1만여 명의 조선 사람을 위해 이 추도비를 건설했다. 지난 시기 일본이 조선을 무력으로 위협해 식민지로 만들고 그 민족을 강제로 끌고 와 학대‧혹사하며 강제노동 끝에 비참하게도 원폭에 의해 죽게 한 전쟁 책임을 그들에게 사과함과 동시에 이 세상에서 핵무기의 완전 철폐와 조선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염원해 마지 않는다”고 새겨져 있었다.

한편,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지난 9일 오전 7시 30분 이 곳 추도비 앞에서는 ‘나가사키 재일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 주최로 조기 추도집회가 열렸고, 한국 대표단도 집회에 참여했다. 이 집회는 “속죄하는 마음은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이뤄가야 한다”는 오카 선생의 뜻에 따라 추도비가 세워진 1979년 이래 작은 규모로 진행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집회에서 발언에 나선 시바타 토시아키 평화활동가는 “오늘 같이 세계 각지에서 자주적으로 모인 여러분들이 이 작은 비를 중심으로 조선인 원폭 희생자를 추도하는 이 순간을 공유하는 사실은 매우 희귀한 일”이라며 “일본의 과거 침략과 전쟁에 대한 깊고 정확한 역사 인식을 토대로 이름도 없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지는 속죄의 의지야 말로 언뜻 고립돼 작게 보일지라도 거꾸로 가는 역사를 마주했을 때 견고한 방파제와 같은 연대가 되리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쟁자 추도 조기집회 (ⓒ김선주)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쟁자 추도 조기집회 (ⓒ김선주)

한국 대표단은 이어 8일 오전에 ‘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을 방문했다. 이곳에서는 일본의 침략 전쟁과 조선인‧중국인 등에 강제노동, 군함도, 위안부 등 참담한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참고로 오카 마사하루는 목사이자 인권운동가로 ‘나가사키 재일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의 대표로 활동했으며, 일본정부가 숨기고 있었던 나가사키 조선인 피폭자 보상문제를 수면위로 끌어올려 직접 피해 실태를 조사했다. 아울러 그는 일본의 가해 책임을 분명히 밝히기 위한 추도비 건립, 관련 서적 저술 등 왕성한 활동을 펼친 인물이다.

원폭 투하 후 나가사키의 재건을 위해 나가사키 시민들이 『나가사키의 종』으로 잘 알려진 나가이 타카시 박사를 중심으로 뭉쳤다면, 잊혀질 뻔 한 재일 조선인을 위해 이름 없는 일본인들은 오카 마사하루를 중심으로 조용히 속죄 활동을 계속해 나가고 있었다.

▲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 자료관
▲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 자료관 내부에서는 일제의 민족성말살을 위한 황국신민화정책에 관한 내용이 전시돼 있다.

반핵‧반전 위한 역사적 한 걸음

올해 한국 대표단이 나가사키를 방문하기 전인 지난 7월 7일에는 국제연합 UN에서, 반핵‧평화 운동에 새로운 결의를 다지게 하는 일이 있었다. 바로 전세계 122개국이 참여한 ‘핵무기금지조약’이 채택된 것이다.

1955년부터 ‘핵무기 없는 평화롭고 공정한 세계’를 슬로건으로 1955년부터 매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개최돼 온 ‘원수폭금지세계대회’ 참가자들 역시 이번 조약 채택을 환영했다.

비록 이번 조약에 세계 유일의 피폭국인 일본과 주요 핵무기 보유국인 미국, 북한, 러시아 등이 참여하지 않아 반쪽자리며, 9월 공개서명과 50개국 이상 비준을 거쳐야 하는 일이 남았지만, ‘피폭자와’ 핵실험 피해자‘를 명문화 하고 전세계의 핵무기 폐절을 구조화 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2017년 나가사키 원수폭금지세계대회 개막식

특히 핵무기 폐절과 피폭자 지원 등 전세계 시민사회의 그동안의 연대활동과 피폭자의 투쟁이 결실을 맺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주최 측 보고에서는 “우리가 손에 넣은 이번 조약이 퍼펙트하진 않지만 파워풀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기쁜 마음으로 결의를 다질 것”이라며 “우리는 미력하지만 무력하지 않고, 우리의 올바른 선택을 통해 다음세대를 위해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를 위해 일본 각 지역과 전세계 반핵‧평화시민 단체에서는 UN에 조약 비준을 요청하는 서명을 받고 있으며, 이번 조약에서 빠진 아베정부를 규탄키도 했다.

또 이번 대회의 해외초청자 대표 연대 발언에서 우리나라 대표단이 나와 주목을 끌었다. 한국인 피폭자 박정순 씨의 증언, 겨레하나평화연구센터 이준규 연구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한석호 사회연대위원장, ‘원수폭금지국민평화대행진’에 한국체육시민연대 청년회의 대표로 참가한 이재환 씨 등이 무대에 올랐다.

이준규 연구원은 한국의 촛불혁명의 성과와 더불어, 사드배치를 둘러싼 한국의 갈등상황, 그리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일본과의 연대를 더욱 강화할 것을 강조했다.

▲(왼쪽부터) 이세림 학생, 김성록 학생, 한국인 원폭 피해자 박정순 씨, 녹색병원 김민지 수련의, 인의협 문정주 회원 (ⓒ西澤)

민의련, 평등하지 못한 피폭피해 해결을 위해…

한편, 8일 저녁에는 한국 대표단은 ‘원수폭금지세계대회 민의련참가자교류집회’에 참가했다.

이날 교류회에서 민의련은 ‘핵무기금지조약’ 채택을 환영하며 ‘핵무기 폐절로의 거대한 한 걸음을 기록한 해 - 민의련의 역할과 앞으로를 생각한다’를 주제로 학습기획을 진행했다.

후지스에 마모루 회장은 이번 조약을 탄생시킨 원동력을 ▲피폭 사실과 건강피해를 가시화한 피폭자와 그 지지자의 존재 ▲피폭 사실에 대한 시민사회 운동과 그 행동 ▲핵무기와 억지력론을 부정하는 국가의 확산으로 보고, “민의련은 피폭 사실을 숨기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를 제한하는 것으로 보고 피폭의 건강피해를 치료하고 사회적 불이익을 보상받을 권리, 살아남은 증인으로서 핵무기금지를 호소할 권리를 위해 피폭자 편에서 편견에 맞서 함께 싸워왔다”며 “이 일은 민의련이 없었어도 의사로서 마땅히 했어야 할 일이며 앞으로의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나가사키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 참가 민의련 대교류회에서 발표하는 후지스에 회장

특히 후지스에 회장은 앞으로의 민의련의 역할을 ▲원폭이나 핵피해자의 인권을 지키는 의료 ▲저선량피폭피해 규명의 계속 발전 ▲핵무기폐절을 위해 일본정부에 금지조약 서명을 요구하는 운동 ▲아베 정부의 헌법 9조 개헌을 저지하는 운동으로 규정하고 이를 적극 추진해 나갈 것을 선언했다.

또 그는 “원자폭탄의 위력이 무차별적인데 반해, 그 피해는 차별적이었다”며 “피폭지에서, 어떤 이유로든 어디로도 도망가지 못하고 차별당하며 신체적, 정신적,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 그곳에 민의련 진료소가 있었고, 빈곤과 차별, 고령화에 맞서 건강권을 지키는 것이 민의련의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이날 대회에서는 “원폭투하 직후의 히로시마에서 의사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만 곁에 있는 것 뿐 이었다”며 평생을 피폭자와 함께 싸워 온 히다 슌타로 선생을 기리며 피폭자의료와 핵무기 폐절을 중심으로 활동해 온 민의련의 역사와 정신을 계승할 것을 다짐키도 했다.

▲민의련대교류회서 무대에 올라 인사하는 한국 의료인 대표단이 민의련으로부터 받은 피켓을 손에 들고 있다. 피켓에는 '(헌법) 9조 허물지마!' '전쟁 시킬 수 없어'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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