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그 자리에서 내가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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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자리에서 내가 해야만 했다”
  • 안은선 기자
  • 승인 2017.10.13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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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이 만난 사람들] ⑲ 길 위에 선 의사…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이보라 사무국장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승리의 물결을 따라 '올바른 민중사회 건설'이란 목표 아래 의료인들은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 위해 시민단체 건설에 나섰다.

그 해 겨울 더 평등한 사회에서 시민의 건강권이 보편적으로 지켜지길 바라는 사회를 꿈꾸는 의사 187명이 여전도 회관에 모여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이하 인의협)를 창립했다.

이어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이하 건치),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이하 청한), 노동건강연대가 연달아 창립되면서,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이란 이름으로 함께 의료인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연대활동을 펼치고 있다.

인의협은 '세상이 아프면 의사도 아파야 한다'는 창립 정신에 따라 아픈 사람을 보듬는 의사로서 사회적 책임을 지켜나가기 위해, 노숙인·쪽방촌 사람들·철탑 위의 농성자·이주노동자·낙도오지 주민·북한 어린이 등 소외계층에 대한 진료는 물론,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의료영리화 정책, 안전규제 완화 등 비인도적 정책에 앞장서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본지는 올해로 창립 30주년을 맞는 인의협의 역사와 활동을 돌아보고 기념하기 위해 기획연재를 시작한다.

그 첫 번째로 세월호 유가족 김영오 씨 주치의로 더 잘 알려진 인의협 이보라 사무국장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보라 사무국장은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백병원에서 전공의를, 혜민병원 호흡기내과 과장, 서울시동부병원에서 내과과장을 거쳐 현재는 녹색병원 호흡기 알레르기내과 과장을 맡고 있다.

그는 쿠바혁명 이후 미국의 경제봉쇄 이후 40년간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나눔과 사랑을 실천한 쿠바 의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맨발의 의사들』이란 다큐멘터리에 감동을 받아 '맨발의 보라'란 닉네임을 만들고 그렇게 살기를 다짐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보라 사무국장은 차가운 아스팔트 위의 단식 노동자들, 철탑 위 고공에서 농성을 벌이는 해고 노동자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에 돌입한 세월호 유가족들, 2016년 민중총궐기대회에서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故백남기 농민의 사인(死因)논란에 앞장서 의사로서의 소신을 밝히는 등 소외된 사람들의 주치의로 그들과 함께 서서 함께 목소리를 냈다.

최근에는 합천에서 열린 반핵평화포럼에 참석했다가 뇌손상으로 쓰러진 재일교포 반핵평화활동가인 김신명 씨를 후쿠오카까지 이송하는 일에 책임자로 동행키도 했다. 현재는 인의협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면서 학생사업인 '의대생 캠프'를 맡아 전일본민주의료기관연합회(이하 민의련)과의 국제교류에 앞장서고 있다.

이번 인터뷰는 지난달 28일 사당역 부근 한식당에서 본지 전민용 대표와 김철신 편집국장이 동석한 가운데 치과 및 의료계 이색인물을 만나는 본지의 『전민용이 만난 사람들』로 진행됐다.

-편집자

 

19번째 '전민용이 만난 사람들' 인터뷰 현장

‘인간’을 배우는 ‘의학’ 따라가며 양심껏 살고
 사회 약자 향해선 몸이 ‘먼저’ 움직였을 뿐…

- 전민용(이하 전) : 반갑습니다. 이보라 선생님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뵙는 건 처음이네요.

이보라(이하 이) : 네 저도 이런 자리에 불러주셔서, 영광입니다.

- 김철신(이하 김) : 페이스북으로만 보다 이렇게 만나니 반갑습니다.

- 전 : 원래부터 꿈이 의사였나요?

이 : 아뇨, 어렸을 땐 천문학, 우주 이런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고등학생 때 ‘뉴튼’이란 과학잡지가 있었는데 그걸 보면서 나중에 이런 공부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 전 : 그럼 의대에 가게 된 계기가 있나요?

이 : 부모님이 무조건 의대가라고 하셔서…. (웃음)

- 전 : 저도 사실 공대에 가고 싶었는데, 원서 쓰는 날에 친척들한테 전화가 와서 꼭 치대를 가야한다고 압력을 받아 치대로 원서를 넣었죠. (웃음) 아무튼, 처음부터 의사의 삶을 선택한 게 아니라면, 지금은 어떻게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 : 다들 그렇듯이 학부 때 공부도 어렵고 힘드니까 계속 해야하나?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제가 좀 근본적으로 생각해보는 경향이 있어서, ‘인간이니까 인간에 대해 아는 건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해서 계속 공부했어요.

- 전 : 혹시 종교가 뭔가요?

이 : 무교입니다.

- 전 : 그런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됐나요?

이 : 의대 공부가 다, 교과서만 펼쳐도 ‘인간’의 신체, ‘인간’의 질병 뭐 이렇게 모두 인간을 향하고 있어서 자연히 관심을 갖게 됐어요.

- 전 : 학교 다니면서 서클이나 동아리 활동 같은 건 뭘 하셨나요?

이: 서클은 검도부, 학생회 활동을 했어요.

- 전 : 그러면 학생운동부터 하신 거네요.

이 : 아뇨. 의대 학생회는 뭐 사회과학이나 인문학 서적을 읽거나 그런 건 없었어요. 그런데 총학생회를 같이 하면서 그 친구들이랑 친해지면서 책도 같이 읽고 세미나도 참석하고, 집회 오라고 하면 가고 그랬죠. 나중에 보니까 정식적인(?) 학생운동 코스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저는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따라 다녔습니다.

- 전 : 세월호 유가족 단식 농성장도 그렇고, 여기저기 현장에서 많이 활동하시는데 그렇게 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이 : 제가 원래 몸이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라…. 뭐라 말하긴 어려운데, 학교 다니면서 학생운동 하는 친구들이나, 원주지역 시민단체, 당시 민주노동당 원주시당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하는 분들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살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 나도 몸 바쳐 일하려면 의대 공부를 그만둬야 하나 생각도 했지만, 그럴 용기는 없어서 그저 ‘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의사가 돼야지’하는 마음을 먹으면서 의대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졸업하고 전문의 따기 전까지는 그냥저냥 평범하게 살았던 것 같은데, 전문의 취득하고 봉직의로 나서면서는 진보진영의 의사로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의사로 살고 싶어 본격적으로 활동에 나서게 됐습니다. 뭐, 거창한 건 아니고 CMS 후원이나 집회 참석같은 가벼운 것부터 시작했어요.

인의협 이보라 사무국장

- 김 : 그런 생각을 혼자 하신건가요? 인의협 활동은 언제부터 하신 거에요?

이 : 고등학교 때나 대학교 때 별다른 모임을 나가거나 하진 않았고, 그냥 양심을 따라 살고 싶었어요. 인의협에 정식으로 가입한 건 2012년이구요.

- 김 : 계기가 된 일이 있었나요?

이 : 2011년 무렵이었는데, 노숙인 진료를 하고 싶어서 찾아보니까 인의협이 서울역 앞에서 노숙인 진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찾아가서 진료봉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정형준 선생님(인의협 정책국장)의 권유로 정식으로 가입하게 됐습니다. 문제는 정형준 선생님은 기억을 못 하시더라구요.

아무튼, 노숙인 진료 때 보니까 10명에서 20명 되는 의대생들이 많이 참여를 하더라구요. 뒤풀이에 따라가서 이야기 하는 걸 듣는데, 다들 착하고 좋은 학생들인데, 인의협의 정신? 뭐 그런 것과는 관련 없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더라구요. 인의협의 가치나 취지가 이렇게 좋은데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알아보니까 인의협 자체에 학생 교육 프로그램도 없고….

그래서 좀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다른 자리에서 정형준 선생님을 만나 이렇게 학생이 많은 데 왜 아무것도 안하냐라고 물어보니까. 정 선생님이 ‘그럼 선생님이 하시죠’ 라고 해서 가입하고 학생 사업을 맡아서 하게 됐어요.

- 전 : 재밌네요. 다시 돌아가서, 단식 농성장이나 이런 곳은 어떻게 해서 찾아가게 된 건가요? 인의협에서 요청해서?

이 : 아뇨. 처음에는, 제가 의대생일 때 민주노동당에 가입을 했었습니다. 그 인연으로, 서울 올라와서는 민노당 지역모임에 참가하면서, 민노당 요청으로 강기갑 의원 단식부터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에 노조 위원장 이런 분들이 단식할 때는 인의협 요청으로 나갔습니다.

진료 순번 되어서 나간 세월호 농성장
김영오씨 주치의로 주목 받고 ‘얼떨떨’

- 전 : 지금 우리나라 의사 중에서 가장 핫한(?) 곳에서, 세월호라던지 이런 곳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어 대단한 것 같습니다. 세월호 유가족 단식 때는 어떻게 해서 진료를 가시게 된 건가요? 세월호 특조위의 연결이 있었나요?

전민용 대표

이 : 유가족 분들과 관계가 있거나, 세월호 특조위 이런 건 사실 잘 몰랐어요. 그때 세월호 특별법 요구하면서 유가족 15분이 한꺼번에 단식을 시작하셨거든요, 그 때 실은 저보다는 최규진 선생님이나, 청한 김이종 선생님이 먼저 가셔서 유가족들 진료를 시작했어요. 여의도랑 광화문 광장 두 군데서.

저는 후발대로 단식 시작하고 1,2주 뒤에야 순서가 돼서 가게 됐는데, 세월호 사건이 굉장히 큰 일이 잖아요? 유가족에게 말 거는 것도 굉장히 조심스럽고, 함부로 가도 되나 귀찮게 하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튼 그날 진료를 나갔는데 우연히 참여연대 안진걸 처장님을 만났는데, 그분이 “1회성 진료는 의미 없으니 와서 자리를 킵(keep)하고 있어야 한다”고 해서 계속 나가야 하는 건가 보다 해서 계속하게 됐죠.

- 전 : 안진걸 처장님 또!

이 : 언제 쓰러질지 모르니 킵(?)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도 병원을 쉴 수도 없고 해서, 당시 서울시 동부병원에 있을 때인데, 다음날 오전이든 오후든 가능한 시간에 반차를 다 내서 유가족 분들 옆에 가서 있었어요. 일주일 동안은 그냥 앉아만 있었어요. 하루 4시간씩. 그렇게 하면서 신뢰를 쌓고, 그 다음부터는 출근 전에, 퇴근한 다음에 들러서 진료하고 그랬습니다.

단식하신 분들 중에 김영오 씨만 마지막까지 남았고, 계속 저는 들러서 진료했는데, 바보같아 보일 수도 있는데 그 분 진료가 그렇게 큰 이슈가 되고 그렇게 주목받을 일일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워낙 여기저기 단식 농성 때 나가서 진료했고, 사실 그때는 공중파나 어디서 찍어간 것도 아니고 해서.

김영오 씨 단식 때문에 온 나라가 들썩이고… 또 저는 인터뷰 요청 오면 오는 대로 응하면서 그렇게 보냈어요. 그러다 결국 병원에 실려 가시고 베드에 눕히고 나오니까 방송국 카메라가 막 여기저기서 불을 키고 이것저것 묻는데, 그제서야 ‘아, 내가 큰 사고 하나 쳤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 김 : 당시의 느낌은 어땠나요? 그 사건이 어떤 의미가 됐는지?

이 : 그냥 필요하다고 해서 간 것이라 예상치 못한 반응? 언론의 주목에 깜짝 놀라긴 했지만 어쨌든 그건 그 사람들의 일이고 제가 어찌할 수 있는 건 아니라서. 저는 저대로 응대하고 대응 하면서, 정신력이 단단해지는 그런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 전 : 민노당 당원이라고, 그때 민간인 사찰도 당하고, 여기저기서 공격을 많이 받으셨고. 얘기를 듣다보니 좌파 운동권 같은 느낌은 적은 것 같습니다. 일례로 우석균 선생님만 해도 이념이 먼저, 실천을 뒤따라 하는 그런 전형적인 운동권인데. 이보라 선생님은 성실하게 본인의 양심을 따라 움직이는 분 같습니다.

이 : 몸이 먼저 움직이는 게 제 특성이죠.

신상이 털렸(?)을 때는, 바로 불편함을 느끼거나 하진 않았어요. 털릴 것도 없었고. 꿀릴(?)것도 없어서. 다만, 밤늦게 집에 갈 때는 좀 불안하더라구요.

- 전 : 세월호 사태부터, 김영오 씨 단식에서 드러나 박근혜 정부의 인권유린, 탄압, 이에 대한 시민의 분노가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으로 이끈 촛불혁명의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때의 유가족들과 함께한 사람들의 고통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 중에 이보라 선생님이 큰 역할을 하셨다고 봅니다.

이 : 예전에 운동 자료집 같은 거나 역사를 보면, 옛날 같았으면 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졌을 수도 있고. 어쨌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때보다는 민주적인 사회가 됐으니….

- 김 : 그때 병원에서 일할 때는 별 일이 없었나요?

이 : 환자한테서 이상한 항의전화를 받기도 했고, 조선일보에서는 저를 보건의료노조니, 금속노조와의 관계가 어쩌고 하면서 이것저것 다 섞어서 기사도 내고…. 그런데 뭐 진료자체는 문제는 없었어요. 이것 때문에 뭐 박원순 서울시장님이 병원에 오시기도 하고 해서 병원이 공격받는 일은 없었습니다.

백남기 농민 사인 논란에 침묵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해야만 하는 일 했을 뿐

- 전 : 또 한번 이보라 선생님이 유명인사가 된 건 백남기 농민 사망진단서 때문인데, 페이스 북이나 뉴스 인터뷰에서의 소신 발언이 화제가 됐었죠?

이 : 세월호 유가족 단식으로 어찌어찌 이름이 알려져 있어서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백남기 농민 건은, 누가 봐도 ‘외인사’인데 ‘병사’라고 기재된 사망진단서가 인의협 단체 채팅방에 올라왔어요. 그걸 보고 채팅방은 난리가 났고, 저도 분노하면서 페이스북에 글을 쓴 게 다음날 기사화가 돼서 놀랐어요.

- 전 : 그것 가지고 우석균 선생님도 기고하시고 했는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건 이보라 선생님이었죠. 개인적으로는 이런 현상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데…. 매번 나오는 사람 말고 새로운 얼굴이, 다양하게 나오는 게 더 효과적이라. 그리고 이런 고난과 역경이 또 반전되고.

이 : 촛불집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라는 촛불혁명으로 이어지고.

- 전 : 그런걸 보면, 보람되지 않나요?

이 : (웃음) 그렇죠. 사실 백남기 농민 사건이 터졌을 때가 독감 예방 접종기간이라 바빴어요. 낮에는 접종하고 밤에는 장례식장 가서 기자회견하고, 의견서 쓰라고 해서 또 쓰고, 추운 날인데도 땀 뻘뻘 흘리면서 다녔어요.

- 전 : 그런 열정과 헌신적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그 원동력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이 : 저만의 착각일수도 있지만,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아’하는 생각? 지금 내가 있는 이 위치에서, 알고 있는 데 침묵하고 있는 건 안된다. 나라도 해야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당시 같이 의무기록 보면서 자문해 주신 신경과 선생님이나 여러 선생님들이 앞에 나가 인터뷰하거나 하는 걸 힘들어 하셔서…. 그런 심정도 이해가가면서도, 저도 굉장히 쪽(?)팔리고 부끄럽지만 이걸 알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창피함을 무릅쓰고 인터뷰를 했어요.

- 전 : 얘기를 나누면서 보면 내성적인 것 같은데, 중요한 일 앞에서는 물러서지 않는 담대함이 있으시네요.

이 : 그 순간에는 이걸 꼭 해야만 해! 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어요.

- 전 : 외향적인 성격은 아니신 거 같은데 원래 그랬나요?

이 : 글쎄요…. 어릴 때는 무대체질이었던 것도 같은데, 교육과정에서 ‘튀면 안된다’고 가르치는 교육과정에 길들여지면서 말도 없어지고, 가만있는 게 최고라서 생각해 그걸 선택하면서 이렇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인의협 이보라 사무국장

인의협, 작지만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 모인 조직
일관된 목소리 내 온 역사 계속 이어졌으면…

- 전 : 다행이네요. 그럼 이야기를 바꿔서, 이제 인의협에서 활동한지는 5년 정도 됐고. 인의협은 올해 30주년을 맞는데, 인의협은 지금 어떤가요? 그리고 덧붙여서 인의협을 평가하고 전망해 본다면?

이 : 사실 인의협의 존재를 알게 된 건 2000년 의약분업 때였습니다. 워낙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욕하는 단체고, 의사 중에 진보적인 사람들이 모인 건 알았지만 뭐하는 곳인지는 잘 몰랐습니다. 그러다 결국 지금처럼 적을 두고 활동하는 단체가 됐습니다.

지금은 매해 10명 정도의 신입회원이 들어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만성적 어려움 때문에 여전히 어렵지만, 그래도 민감한 이슈에 인의협이 앞장서서 활동하는 것을 보면서 인의협의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특히 지난 겨울 故백남기 농민 사건 때 회원이 급(!) 늘기도 했습니다. 의대생들도 많이 들어오고. 제가 조심히 내린 결론은, 의사집단이 어떤 이기적인, 직업 이기주의적인 것으로 흔들리는 걸 보면서, 그 중에서도 일관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 온 건 인의협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인의협의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이 하나 둘 모이면, 작아도 짜임새 있고 내실 있는 조직이 되리라 봅니다. 평범한 회원들이 모여서, 전국 조직을 갖고 움직이는 게 또 인의협의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회원으로서, 의사로서 이런 인의협같은 조직은 더 확대 발전돼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회비만 내시는 분들도 있어서, 이런 분들을 끌어내기 위한 소모임을 만들고 참여공간을 늘리려고 하는 데 잘 되어지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 전 : 대중적으로 조직의 가치를 잘 드러내는 방향으로, 선명하게 원칙적인 길을 가는 소수정예 부대로 건치랑 같이 발전해 나가면 좋겠네요. 그러다보면 또 의료인 내부에서도 대표적인 단체로 성장할 수도 있고.

백남기 농민 사건의 경우 얼마 전에 경찰들이 사과하는 등 세상이 많이 바뀐 것 같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이번에 발표한 ‘문재인 케어’가 뜨거운 이슈인데, 의료계 내부 반발도 만만치 않고….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 문재인 케어에 대해 의협은 애매한 입장이고 전공의협 같은 곳에서 반대가 엄청났습니다. 특히 한의사에 의료기기를 허용하는 부분에서 치열하더라구요.

다른 것 보다는 문재인 케어에서 보장성 강화라는 측면은 찬성하지만, 보장 범위가 넓지도 않고 재정도 크지 않아서 우려됩니다.

- 김 : 건치도 일관되게 그 부분을 비판하고 있죠.

이 : 대부분의 의사들은 전면 급여화가 되면 재정파탄이 오고 결국 지키지 못할 약속이 되고, 예비급여 형식으로 10%밖에 보장되지 않아 생색내기에 지나지 않으니 하지 말자고 하는 입장이죠.

그렇지만 인의협은 보장성 강화라는 기조엔 찬성하지만 문재인 케어 자체 내용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토론회도 여러 번 했습니다. 회원 중에 반발하는 분은 없었고, 일단은 지켜보자는 의견이 많았어요.

‘맨발의 보라’란 이름처럼 필요가 있는 곳으로
약자‧탄압 받는 사람 편에 서는 의사 되고파…

- 전 : 지금은 인의협에서 학생사업을 하시잖아요. 얼마 전에 일본도 다녀오셨던데.

이 : 작년엔 히로시마, 올해는 나가사키에서 열리는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 ‘의대생 캠프’라고 해서 의대생들을 모집해 다녀왔습니다.

원수폭금지대회는 일본 민의련에서 초청해 주셔서 간 것인데, 다른 것 보다 민의련이란 조직에 대해 알게돼서 놀랐습니다.

- 김 : 어땠나요?

김철신 편집국장

이 : 민의련 분들은 정말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헌신적이고 자부심도 높고, 또 일을 위해서 규율 있게 움직이는 게 인상 깊었습니다. 한국과는 좀 다른 분위기라서…. 우리는 좀 각자도생 한다고 해야하나? 하고 싶으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하는 그런. 반면에 민의련 분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헌신하는 것 같아 부러웠어요. 병원도 운영하고 규모 있는 행사도 치러내고, 평화헌법 운동도 하고, 우리처럼 한국에서 온 사람들도 멋진 손님으로 대접해주고 힘 있고 능력 있는 단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 전 : 민의련이 일본 공산당과 연결고리도 많고, 일본 공산당 특성이 지역 풀뿌리 운동에 많이 기대고 있고 지역단위에서는 영향력이 크죠. 생활밀착형 당이라 일본 내에서 저력이 있고, 민의련도 그런 느낌이네요.

이 : 저도 그런 식의 운동에 로망이 있습니다. (웃음)

- 김 : 앞으로 어떤 의사가 되고 싶은지?

이 :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제가 필요한 곳에 가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이를 통해 약자, 탄압 받는 사람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일을 하는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 전 : 단식농성장에 진료지원을 많이 나갔는데, 단식자에 대한 진료는 기준이 있나요?

이 : 사실 진료라기보다는 대화만 하는 것 같아요. 상담하고 필요하다면 최소한의 약을 처방하는 정도입니다.

단식자에 대한 진료는 단식을 잘 하실 수 있도록 지켜봐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단식의 이유는 절박한 이유로 주목을 끌기 위해서인데, 의사로서 단식을 못하게 하는 게 맞지만, 그것보다는 단식자의 단식 이유와 의지를 우선하는 거죠.

의사의 역할은 단식자가 단식을 할 수 있도록 하되, 최대한 합병증이 생기지 않도록, 오랫동안 단식하면 합병증이 안 생길 수가 없고 몸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위험한 상황에서 빠르게 조치를 하는 거예요. 원칙적으로는 의식이 없어져도 그대로 두는 게 의무라고는 하지만….

- 김 : 의사 윤리에 그렇게 돼 있나요?

이 : 나중에 윤리강령 찾아보니까 지침이 있더라구요. 아마 강제급식의 폐해 때문에 생겨난 거 같은데, 실제로 영국 아일랜드에서도 감옥에서 단식한 사람이 죽는데도 규정 때문에 의사가 그냥 지켜보기만 한 사례도 있고 해서.

- 김 : 논란의 여지가 있겠네요.

- 전 : 정치적 정당성 같은 것 때문에 보통 단식을 하는 것이긴 하지만, 죽어가는 사람을 두고 의사가 아무런 조치도 못하는 건 또 의사로서….

이 : 그렇죠. 단식자 진료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있습니다. 단식할 때 잘 할 수 있도록 돕는다 라던지, 의식을 잃으면 응급조치를 할 것 등등….

- 전 : 여러 가지로 많이 공부하셨겠네요. 아무튼, 오늘 늦은 시간까지 인터뷰 감사합니다.

- 김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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