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여성'에서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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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여성'에서 시작해야 한다
  • 편집국
  • 승인 2006.04.06 00:00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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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선 원장의 '대안없는 여성주의에 빠지질 않길 바란다'에 대한 반박글

건치 서울경기지부가 지난달 14일부터 4주간 진행하고 있는 여성포럼 첫날 강연에 나선 상지대 신경아 교수가 최근 서대선 원장이 쓴 '대안없는 여성주의에 빠지질 않길 바란다'는 제목의 글에 대해 반박글을 보내왔다. 전문을 싣는다.                                                                                       편집국

"대안없는 여성주의에 빠지지 않길 바란다"는 서대선 원장의 글을 읽은 지 꽤 시간이 지났다.

▲ 신경아 교수
독자들 중에는 '반박글이 언제나 나오나' 기다린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필자는 의도적으로(?) "시간을 좀 가져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사이 직접 서 원장님을 뵐 기회도 갖게 됐다.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우리들의 논쟁이 지나치게 감정적인 사건으로 읽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나 자신이 좀더 성찰할 여유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필자가 "평양은…"으로 시작되는 작품을 문제시한 것은 여성의 외모에 대한 이 사회, 아니 거의 모든 사회를 지배하는 이성애주의적 시각 때문이었다.

사실 (서 원장의 지적처럼)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이 모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감수성은 어찌보면 '욕망'의 차원에 걸쳐 있는 것이고, 그러한 욕망 역시 우리가 어떤 사회(또는 문화)에 살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지지만, 그 자체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문제는 "어떤 아름다움인가", "누구의, 무엇의 아름다움인가"하는 점인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여성, 정확히 말해서 여성의 몸은 이성애적 욕망과 소비자본주의 사회의 페티시즘(fetishism)이 투사되는 욕망의 기호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층(또는 계급)이란 재산(경제력, 자본)의 소유를 둘러싸고 나누어지는 인간 집단의 위계라는 점을 잘 알리라 믿는다. 필자는 그러나 이것은 남성들의 질서라고 생각한다.

권력의 자원에 접근하지 못하는 대다수 여성들은 대신 다른 수단을 사용하여 자원을 가진 남성들에게 가까이 가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여성의 몸, 외모를 통한 신분상승이 그것이다.

"재산으로서의 아름다움"(Beauty as a Property)은 - 20여 년 전 미국 사회학회지에 실린 논문의 제목 - 은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정칟경제·사회·문화적 자원을 둘러싼 남성들의 게임에 낄 권리를 허락받지 못한 여성들에게 그나마 주어진 것이 몸을 통한 신분상승이다.

수 천 년 동안 읽혀져 온, 앞으로 또 얼마나 더 읽힐지 모르는 신데렐라의 이야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만약 신데렐라가 아름답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독자들이 그 결말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된다.(이야기 자체가 지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남성중심 사회에서,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름다운 몸을 갖기 위한 여성들의 노력은 눈물겹고 처절하다. 다이어트나 성형으로 인한 부작용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은 상식에 속하는 것이지만, 그런 부작용 수준이 아니라, 일상적 관행과 의식 속에서 이미 우리는 여성을 '예쁜 여자'와 '못생긴 여자'로 나누는 데 익숙하다.

몇 년 전 한 여성단체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기업의 직원을 뽑는 면접시험에서 평가란에 '예쁨' '고치면 예쁠 것 같음' '못생겼음'이라고 쓰는 경우조차 있었다. 짧은 시간 복잡한 심사과정 속에서 이런 것까지 평가해야 한다니…. 면접관들의 노고가 걱정스러울 뿐(!)이다.

아니, 반대로 별로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을까? 여성의 외모에 대한 평가는 여성의 인격과 품성, 능력에 대한 평가보다 훨씬 더 우리의 의식 속에 깊게 내면화되어 있어서 언제 어디서라도 등급화가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취직을 하려고, 결혼을 하려고, 남자친구에게 잘 보이려고, 또는 자신감을 갖기 위해서 여성들은 화장을 하고, 성형을 하고, 다이어트에 관심을 갖는다.

그런데 화장을 하고 성형을 하고 다이어트를 하면 더 예뻐질 것이라고 누가 알려준 것일까? 유행하는 화장술, TV 스타처럼 뾰족한 코, 뼈만 앙상한 몸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누가 가르쳐준 것일까? 타고난 이목구비, 건강한 피부, 세끼를 적당히 먹고 열심히 일하는 몸이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왜 만나기 힘든 것일까?

24시간 방영되는 TV 스타의 모습과 성형 광고, 온갖 다이어트 식품들 속에서 왜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은 자신감을 얻기보다 오늘 먹은 저녁 한 끼를 걱정하고, 고치고 또 고치고 싶어하는 것일까? 자신을 부정하고 좌절하는 것일까?

외모를 통한 차별과 그것에 의한 억압은 사실 인간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요즈음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노력해서 바꿀 수 있다"는 것, 더 나아가 "노력해서 바꾸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보편화함으로써 아름다운 몸을 갖지 못하는(정확히 말해서 만들지 못하는) 사람은 인격과 능력, 노력 역시 함량미달일 것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믿음처럼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못생겨도 마음이 중요했다"면, 지금은 "못생긴 것은 마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외모를 결정하는 것은 '마음'만은 아니며, 경제력과 시간, 정보 등 소비자본주의 사회의 권력과 자원들이다.

얼마전 북한의 여성응원단이 남한을 찾은 적이 있다. 20대가 대다수이고 매우 비슷한 외모를 지닌 그들에 대해 대중매체들은 매일 '미녀응원단'을 연발하며 환호를 아끼지 않았다.

필자는 그 때 너무나 창피해서 신문이나 방송을 볼 수 없었다. 분단이후 수 십 년 만에 어렵게 우리 사회를 찾아온 동족(同族) 여성들을 '미녀'로만 보려는 사회지도층과 대중들의 인식이 부끄러웠고, 유아부터 80대 노인에 이르는 수많은 여성들을 제쳐두고 굳이 젊고 비슷비슷하게 생긴 여성들만 뽑아 남한에 보낸 북측 지도층의 가부장적 의식을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서 원장이 만난 평양의 여성들 역시 북한의 수많은 평범한 여성들 중 한 사람은 아니라는 점을 서 원장도 잘 알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의도와 계산에서 선발된 여성들이며, 외모라는 수단을 통해 특권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집단이라는 점, 그리고 그들이 평양을 예쁘게 보이도록 만드는 바로 그 순간에 예쁘지 못한 수많은 여성들은 평양이 아닌 그 어느 거리를 떠돌며, 운이 나쁜(?) 사람들은 국경을 넘어 타향에서 성 매매나 고된 노동으로 생계를 잇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북한의 미녀응원단, 평양의 예쁜 안내원은 사실 신데렐라 이야기보다 더 나쁘다. 신데렐라는 외모를 신분상승의 수단으로 이용하도록 가르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지만, 여성 자신의 삶으로 그친다.

그러나 북한에서 동원하고 있는 여성의 외모는 남과 북의 진솔한 만남을 가로막고, 남쪽에서 또 북쪽에서 그동안 여성들이 어렵게 이뤄온 민주주의와 성 평등의 지향을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장애물'이다.

짧게 쓰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글이 길어졌다. 필자는 성격상 이런 식의 논쟁을 좋아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 하면 논쟁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사실 서 원장처럼 여성주의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진 분들과 벌이는 논쟁은 재미(?)는 없다. 서로 적대적인 지점을 확인하기보다는 이해와 소통의 부분이 더 크므로. 불꽃 튀는 논쟁을 기대하신 분들이 있었다면, 용서해주시길….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걸고 넘어지려고 한다.

서 원장의 마지막 말, "'여성'을 논하는 건 좋다. 그러나 '인간'을 말하는 게 더 시급하기 때문이다"라는 충고에 대해 이것은 필자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그러니까 80년대부터 들어왔던 이야기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러나 굳이 그 때 뿐이었을까?

근대사에서 보면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이후, 20세기 초 러시아를 비롯한 사회주의국가의 성립 이후 등, 굵직굵직한 세계사적 변혁이 발생할 때마다 그 변혁에 몸담아 투쟁했던 여성들에게 주어진 충고였다.

'진보'라는 이름 아래 성취해야 할 이런 저런 항목 중에 '여성'은 저 뒤에 있다는 것이다. 왜 그 진보라는 것은 '여성'에서 시작하면 안되는 것인가?

헤겔의 이야기처럼 '주변인의 관점'에서 볼 때, '주변인'에게 필요한 것을 성취해나갈 때 진정한 진보라는 것이 가능해진다면, 진보는 '여성'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 계급에서도, 빈민층에서도, 농민에서도, 장애인 속에서도 여성노동자, 여성빈민, 여성농민, 여성장애인은 주변에 있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인간 관념이 아니라 일상을 꾸려가는 구체적인 여성과 남성의 삶에 시선을 맞추어야 한다. 대안이 필요하다면, 이를 확인하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신경아(상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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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홍 2006-04-07 15:47:34
매우 어려운 질문인데....읽으니, 저두 매우 궁금하네요...누가 답변 좀....

박한종 2006-04-07 13:21:19
두 글을 읽고 제가 썼던 글을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제 글의 일부를 다시 올리는 이유는....
이 문제가 다른 판본으로 읽힐 수도 있다는 점에서 입니다.
전문직 대중운동의 한계에서 시민의 건강건강을 확보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더 구체적으로 노인틀니의 보험화를 둘러 싼 갈등을 어떻게 보아야 할런지.....
즉 건치의 조직 문제 - 진보적 전문직 대중운동의 함의와 맥락적으로 관련되어 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건치와 여성, 건치와 전문주의....
다른 문제이기는 하지만,
같은 시각으로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생략
그러므로 정치를 적대와 차이 자체의 문제로 다루는 데에 있어 중요한 것은 적대와 차이의 기원이 아니라 자체로서의 관계라 할 것이다. 적대는 차이와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그 경계를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르기는 하나 나눌 수는 없는 것이다. 적대와 차이의 관계는 명석하기는 하나 동시에 모호한 것, 애매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판명하지 않는 것이라 하겠다(정의가 분명한 것을 명석하다고 하고 외연이 분명한 것을 판명하다고하며, 뜻이 분명하지 않은 것(중의적인 것)을 애매하다고 하고 나누기 충분하지 못한 것을 모호하다고 한다). 앞서 말하자면 정치는 이 영역, 차이와 적대가 중첩되 있는 영역, 차이의 한계에서 적대와 마주하는 영역에 있다 할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정치는 선명(명석)하나 편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변화시키는 것이다. 반대의 예(애매하면서도 판명한 것)는 아마도 오웰의 1984년의 체제나 파시즘의 정치일 것이다. 애매한 죄(도대체 무엇이 반사회적인 것인지?)와 판명한 딱지 붙이기(빨갱이!)....

예를 들어 정치로서 여성의 문제를 보자. 여성의 문제를 적대의 문제로만 볼 것인가, 또는 차이의 문제로만 볼 것인가? 가부장적 사회제도의 틀에서 여성의 문제는 적대의 문제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여성 일반과 남성 일반 자체는 적대의 문제로서는 풀지 못하게 된다. 여성의 문제는 가부장이란 적대의 모습과 여성과 남성이란 차이의 모습에서 다름이 있기는 하나 여성성/남성성의 문제는 그 경계가 상호 침투되고 있는 어떤 영역이 있는 것이다. 여성의 문제로부터 여성성이 무시될 수 없다면 이 영역은 부정될 수 없다. 여성성/남성성 자체를 부정하였던 60-70년대의 여성운동이 극복되었다면 말이다.
물론 차이로서의 여성성이란 것이 비록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의 그것이 아니라 여성 고유의 것이란 주장도 있으나 그 주장은 그러면 남성(또는 남성성)의 문제를 어떻게 정치적으로 풀 것이냐의 반론에 무력함을 스스로도 인정한다. 여성성/남성성의 영역은 가부장적 적대(적 모순)와 마주하면서 동시에 여성과 남성의 차이-비적대(적 모순)과 마주하는 영역, 그러기에 적대와 차이가 상호 중첩되는 영역인 것이다.
여성의 문제는 적대와 차이가 다르지만, 나누어질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정치의 존재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는 결코 차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는 그 행태에서 적대에 속하지만, 차이의 한계로서의 정치인 것이다. 바꾸어 말해 차이로서 존재한다면 그것은 정치일 필요조차 없는 것이며, 적대는 그의 해소를 위해 정치를 요구하나, 목적론적 동일성으로 속박도 아니요, 타자에 대한 무한한 환대로서의 그것이 아닌, 차이의 한계로서의 정치를 요구하는 것이다. 정치는 차이와 분리될 수 없지만, 차이로서가 아니라 적대와 중첩된 차이의 한계로서의 영역에서 적대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렌트가 정치를 인간의 행위의 영역에만, 공공의 영역에만 위치지우는 것은 잘못이다.
정치는 적대 속에서 적대를 해소하나 변증법적 필연의 과정으로서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외부성, 열려진 외부성속에서 적대를 해소하는 것, 그러기에 물론 때로는 적대적 대상을 전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적대를 차이의 한계로 이끄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러한 적대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내고 심화시켜 내는 과정인 것이다.

전문인 대중운동조직으로서의 보건의료조직 역시 그것이 운동조직이라면 정치의 문제를 자기의 문제로 가질 수밖에 없다. 정치를 차이의 한계로서 볼 때, 우리는 운동의 내적 전개(전문인/대중의 내용적 모순, 운동조직과 지향으로서의 의료인 대중등)에서의 대중노선이 어떠해야 것인가란 측면에서의 정치, 그리고 외적으로 국민의 건겅권을 지켜내기 위한 사회적 투쟁에서 어떻게 적대를 만들어내고, 어떻게 적대를 해소할 것인가란 측면에서의 정치를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나도 한마디 2006-04-06 17:54:47
어쩔 수 없이 지금 이 사회에 살고 있는 내가 느
끼는 그래서 이쁜 것(얼굴이든 몸이든 마음이든 행동이든)을 찾는 나의 욕망은 어떻게 해결해야하나요? 얼굴이나 몸은 외면하고 행동이 이쁜 것만 억지로 욕망해야하나요? 나의 욕망과 여성주의적 당위 사이의 간격을 좁혀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여성주의가 진보라면 나는 왜 나의 욕망이 아닌 진보를 위해 살아야하나요? 진보를 욕망하며 사는 삶에 대한 성찰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짝짝짝!! 2006-04-06 10:32:54
강의를 들으며 교수님께서 '평양은....'에 대해 언급하실 때
사실, 나는 좀 억지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그러나 지금 이글을 읽어보니
내가 아니 나또한 이 사회가 그리고 언론이 만들어 놓은
이데올로기에 철저히 빠져있었다고 느끼게 되었다.
'미녀 응원단','미녀 안내원'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깨어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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