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선 원장의 '대안없는 여성주의에 빠지질 않길 바란다'에 대한 반박글
건치 서울경기지부가 지난달 14일부터 4주간 진행하고 있는 여성포럼 첫날 강연에 나선 상지대 신경아 교수가 최근 서대선 원장이 쓴 '대안없는 여성주의에 빠지질 않길 바란다'는 제목의 글에 대해 반박글을 보내왔다. 전문을 싣는다. 편집국
"대안없는 여성주의에 빠지지 않길 바란다"는 서대선 원장의 글을 읽은 지 꽤 시간이 지났다.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우리들의 논쟁이 지나치게 감정적인 사건으로 읽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나 자신이 좀더 성찰할 여유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필자가 "평양은…"으로 시작되는 작품을 문제시한 것은 여성의 외모에 대한 이 사회, 아니 거의 모든 사회를 지배하는 이성애주의적 시각 때문이었다.
사실 (서 원장의 지적처럼)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이 모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감수성은 어찌보면 '욕망'의 차원에 걸쳐 있는 것이고, 그러한 욕망 역시 우리가 어떤 사회(또는 문화)에 살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지지만, 그 자체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문제는 "어떤 아름다움인가", "누구의, 무엇의 아름다움인가"하는 점인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여성, 정확히 말해서 여성의 몸은 이성애적 욕망과 소비자본주의 사회의 페티시즘(fetishism)이 투사되는 욕망의 기호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층(또는 계급)이란 재산(경제력, 자본)의 소유를 둘러싸고 나누어지는 인간 집단의 위계라는 점을 잘 알리라 믿는다. 필자는 그러나 이것은 남성들의 질서라고 생각한다.
권력의 자원에 접근하지 못하는 대다수 여성들은 대신 다른 수단을 사용하여 자원을 가진 남성들에게 가까이 가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여성의 몸, 외모를 통한 신분상승이 그것이다.
"재산으로서의 아름다움"(Beauty as a Property)은 - 20여 년 전 미국 사회학회지에 실린 논문의 제목 - 은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정칟경제·사회·문화적 자원을 둘러싼 남성들의 게임에 낄 권리를 허락받지 못한 여성들에게 그나마 주어진 것이 몸을 통한 신분상승이다.
수 천 년 동안 읽혀져 온, 앞으로 또 얼마나 더 읽힐지 모르는 신데렐라의 이야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만약 신데렐라가 아름답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독자들이 그 결말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된다.(이야기 자체가 지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남성중심 사회에서,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름다운 몸을 갖기 위한 여성들의 노력은 눈물겹고 처절하다. 다이어트나 성형으로 인한 부작용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은 상식에 속하는 것이지만, 그런 부작용 수준이 아니라, 일상적 관행과 의식 속에서 이미 우리는 여성을 '예쁜 여자'와 '못생긴 여자'로 나누는 데 익숙하다.
몇 년 전 한 여성단체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기업의 직원을 뽑는 면접시험에서 평가란에 '예쁨' '고치면 예쁠 것 같음' '못생겼음'이라고 쓰는 경우조차 있었다. 짧은 시간 복잡한 심사과정 속에서 이런 것까지 평가해야 한다니…. 면접관들의 노고가 걱정스러울 뿐(!)이다.
아니, 반대로 별로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을까? 여성의 외모에 대한 평가는 여성의 인격과 품성, 능력에 대한 평가보다 훨씬 더 우리의 의식 속에 깊게 내면화되어 있어서 언제 어디서라도 등급화가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취직을 하려고, 결혼을 하려고, 남자친구에게 잘 보이려고, 또는 자신감을 갖기 위해서 여성들은 화장을 하고, 성형을 하고, 다이어트에 관심을 갖는다.
그런데 화장을 하고 성형을 하고 다이어트를 하면 더 예뻐질 것이라고 누가 알려준 것일까? 유행하는 화장술, TV 스타처럼 뾰족한 코, 뼈만 앙상한 몸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누가 가르쳐준 것일까? 타고난 이목구비, 건강한 피부, 세끼를 적당히 먹고 열심히 일하는 몸이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왜 만나기 힘든 것일까?
24시간 방영되는 TV 스타의 모습과 성형 광고, 온갖 다이어트 식품들 속에서 왜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은 자신감을 얻기보다 오늘 먹은 저녁 한 끼를 걱정하고, 고치고 또 고치고 싶어하는 것일까? 자신을 부정하고 좌절하는 것일까?
외모를 통한 차별과 그것에 의한 억압은 사실 인간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요즈음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노력해서 바꿀 수 있다"는 것, 더 나아가 "노력해서 바꾸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보편화함으로써 아름다운 몸을 갖지 못하는(정확히 말해서 만들지 못하는) 사람은 인격과 능력, 노력 역시 함량미달일 것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믿음처럼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못생겨도 마음이 중요했다"면, 지금은 "못생긴 것은 마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외모를 결정하는 것은 '마음'만은 아니며, 경제력과 시간, 정보 등 소비자본주의 사회의 권력과 자원들이다.
얼마전 북한의 여성응원단이 남한을 찾은 적이 있다. 20대가 대다수이고 매우 비슷한 외모를 지닌 그들에 대해 대중매체들은 매일 '미녀응원단'을 연발하며 환호를 아끼지 않았다.
필자는 그 때 너무나 창피해서 신문이나 방송을 볼 수 없었다. 분단이후 수 십 년 만에 어렵게 우리 사회를 찾아온 동족(同族) 여성들을 '미녀'로만 보려는 사회지도층과 대중들의 인식이 부끄러웠고, 유아부터 80대 노인에 이르는 수많은 여성들을 제쳐두고 굳이 젊고 비슷비슷하게 생긴 여성들만 뽑아 남한에 보낸 북측 지도층의 가부장적 의식을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서 원장이 만난 평양의 여성들 역시 북한의 수많은 평범한 여성들 중 한 사람은 아니라는 점을 서 원장도 잘 알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의도와 계산에서 선발된 여성들이며, 외모라는 수단을 통해 특권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집단이라는 점, 그리고 그들이 평양을 예쁘게 보이도록 만드는 바로 그 순간에 예쁘지 못한 수많은 여성들은 평양이 아닌 그 어느 거리를 떠돌며, 운이 나쁜(?) 사람들은 국경을 넘어 타향에서 성 매매나 고된 노동으로 생계를 잇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북한의 미녀응원단, 평양의 예쁜 안내원은 사실 신데렐라 이야기보다 더 나쁘다. 신데렐라는 외모를 신분상승의 수단으로 이용하도록 가르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지만, 여성 자신의 삶으로 그친다.
그러나 북한에서 동원하고 있는 여성의 외모는 남과 북의 진솔한 만남을 가로막고, 남쪽에서 또 북쪽에서 그동안 여성들이 어렵게 이뤄온 민주주의와 성 평등의 지향을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장애물'이다.
짧게 쓰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글이 길어졌다. 필자는 성격상 이런 식의 논쟁을 좋아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 하면 논쟁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사실 서 원장처럼 여성주의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진 분들과 벌이는 논쟁은 재미(?)는 없다. 서로 적대적인 지점을 확인하기보다는 이해와 소통의 부분이 더 크므로. 불꽃 튀는 논쟁을 기대하신 분들이 있었다면, 용서해주시길….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걸고 넘어지려고 한다.
서 원장의 마지막 말, "'여성'을 논하는 건 좋다. 그러나 '인간'을 말하는 게 더 시급하기 때문이다"라는 충고에 대해 이것은 필자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그러니까 80년대부터 들어왔던 이야기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러나 굳이 그 때 뿐이었을까?
근대사에서 보면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이후, 20세기 초 러시아를 비롯한 사회주의국가의 성립 이후 등, 굵직굵직한 세계사적 변혁이 발생할 때마다 그 변혁에 몸담아 투쟁했던 여성들에게 주어진 충고였다.
'진보'라는 이름 아래 성취해야 할 이런 저런 항목 중에 '여성'은 저 뒤에 있다는 것이다. 왜 그 진보라는 것은 '여성'에서 시작하면 안되는 것인가?
헤겔의 이야기처럼 '주변인의 관점'에서 볼 때, '주변인'에게 필요한 것을 성취해나갈 때 진정한 진보라는 것이 가능해진다면, 진보는 '여성'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 계급에서도, 빈민층에서도, 농민에서도, 장애인 속에서도 여성노동자, 여성빈민, 여성농민, 여성장애인은 주변에 있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인간 관념이 아니라 일상을 꾸려가는 구체적인 여성과 남성의 삶에 시선을 맞추어야 한다. 대안이 필요하다면, 이를 확인하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신경아(상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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